일본은 1986년부터 10년간 지속된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미국에 인후(咽喉)를 찔리며 막강했던 반도체 산업을 한국과 대만에 넘겨주었다. 미국 반도체시장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불공정 무역 판정과 시장 자율규제의 더블펀치를 얻어맞고 헤매는 동안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런 일본이 이번에 한국 반도체산업을 겨냥하면서 한국 경제의 급소를 가격했다. 모양은 30년 전과 비슷해 보이나 속 내용은 전혀 다르다. 일본은 패전의 상처를 극복하고 1979년 고도성장의 피크에 도달했다. 1981년 158억 달러였던 대미 무역흑자는 1985년 462억 달러로 급증했고, 이에 미국이 플라자합의를 통해 엔고(高)를 이끌었으나 무역흑자는 1987년 563억 달러로 오히려 큰 폭으로 늘어났다. 미국은 반도체산업 외에도 주요 제조업들이 일본 기업에 밀리고 있어 대일 위기론이 팽배했다.
1989년 1월 당시 모리타 아키오 일본 소니 회장과 작가 이시하라 신타로는 에세이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내놓으며 자력외교를 주장했다. 이 책에서 이시하라는 일본 기술의 우위성을 내세우며 미국을 자극했다. “세계는 특히 반도체 생산에서 일본기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일본은 그 기술의 우위성을 교섭의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한·일 관계를 들여다보자. 한국은 대일 무역적자국이며, 반도체를 비롯해 대다수 제조업들이 소재·부품의 대일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기술 우위를 무기로 삼은 일본의 경제규제는 다분히 보복적이고 적반하장의 요소까지 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경제 규제 조치와 관련해 꼭 직시해야 할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첫째, 일본은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하청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제품보다는 소재·부품을 공급하는 나라다. 모노쓰쿠리(제조기반 산업)가 독보적이다. 세계 제조업의 공급망(서플라이 체인)은 물론 부가가치를 이어주는 가치망(밸류 체인)의 상류(上流)에 있다. 한국은 부품과 제품을 수출하는 중류(中流), 중국은 상품의 대량생산을 맡는 하류(下流)에 있다. 과거에는 일본이 앞장서고 한국과 중국이 뒤따르는 기러기 편대 모양이었으나 이제는 거미줄 모양으로 얽혀 있다. 일본이 가장 많은 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이유는 동아시아의 한·중 제조대국이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중·일의 체인은 이제 국제 공유자산으로 봐야 한다.
둘째, 한·일 기업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기술이전과 상호투자, 인적교류 등으로 경영수법, 기업문화, 기술교육, 공장 시스템 등이 같은 곳이 태반이다. 이런 일의대수(一衣帶水) 관계를 인위적으로 떼어낸다면 막대한 유·무형의 자산을 잃게 되는 것이다.
셋째, 지난 40년간 일본이 반도체 산업에 투자한 돈이 중국이 지난 한 해에 투자한 돈보다 훨씬 작다는 점이다. 중국은 한국 타도를 외치며 반도체에 무차별 투자에 나서고 있다. 한국 반도체가 무너진다면 즉시 중국이 대두할 건 자명한 이치다. 일본이 한국이란 버퍼존(완충지대)를 버리고 중국을 택한다면 그것은 자해행위일 뿐이다.
다카스기 노부야 한국후지쓰 전 회장(전 서울재팬클럽 이사장)은 월간지 문예춘추 4월호에서 한국경제가 넷째 패러다임 체인지를 향해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1960년대 한강의 기적, 둘째는 1997년 아시아 통화위기 극복, 셋째는 2008년 리먼 쇼크 때의 위기극복이다. 셋째 패러다임 체인지를 거친 한국의 1인당 GDP는 2만 달러를 돌파했다. 2017년에는 약 2만9000달러로 3만 달러에 근접했다. 2017년 일본의 1인당 GDP는 약 3만8000달러로 한국이 약 반세기에 걸쳐 일본을 바짝 쫓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넷째 패러다임 체인지를 맞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카스기 전 회장은 이런 분석의 틀 아래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도 두 나라의 동반자적인 경제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제조업과 서비스가 만나고, 현실세계와 가상세계가 융합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두 나라는 세계기술시장의 표준을 선도하고, 새로운 제조업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포착해야 한다. 아베 총리는 한·일 두 나라가 쌓아올린 글로벌 자산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깊이 인식하고, 두 나라의 발전을 위한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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