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자(2019년 7월 29일자) 본지는 '생큐 아베'라는 어젠다로 뉴스 집중기획과 관련 칼럼을 실었다. 일견 역설 같아 보이기도 하는 '생큐 아베'는 현재의 한·일 갈등을 하나의 계기로 해석하는 이 나라의 비장한 각오를 담은 입장이기도 하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천명(闡明)'은 우리 국민에게 일정한 안정감을 주는 점이 있지만, 과연 이 판국에 무슨 수로 기회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있는지에 대해 여전히 불신이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 신문은 한·일 문제와 관련해 우리의 거시적인 비전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하나의 '화두(話頭)'를 던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상황은 녹록지 않다.
# 한·일 갈등 분수령, 녹록지 않은 전망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 보복 한 달째를 맞는 이번 주는 이 갈등의 확산 여부를 결정짓는 분수령으로 보인다. 7월 후반에 들면서 우리 정부 내에서도 '외교적 해법'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지난 24일 문재인 대통령의 시·도지사 초청 오찬 발언과 25일 이낙연 총리의 일본을 향한 제안은 그런 분위기를 말해준다. 26일엔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고노 다로 일본 외상과 전화통화를 했다. 내달 2일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의 성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관측도 나온다. 이 포럼에는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참석하는데, 한·일 간의 긴장에 대해 미국의 일정한 역할이 있을지에 대한 관심도 높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일본의 경제보복이 단기에 그치지 않고 장기화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을 내려놓지 않는다. 한국의 수출을 옥죄는 일본의 계획이 계속 진행될 것이란 얘기다. 일본정부는 ARF가 열리는 바로 그날 각의에서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결정하기로 되어 있다.
일본의 선의(善意)나 개심(改心)을 기대하기에는 아베의 얼굴이 너무 단단히 굳어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생큐 아베'를 언급하는 까닭은 무역전쟁 장기화를 예견하기 때문이며, 지난 50여년간 얽혀온 한·일 경제의 종속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재정비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음을 환기하기 위해서이다. 분명코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이참에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꾸고 산업생태계의 새판을 짜는 것 또한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 '위장된 축복'은 한국을 다시 도약시킬까
'생큐 아베'의 화두는 위장된 축복(disguised blessing)이란 말로 가끔 등장하는 표현이다. 이 말은 성서의 야곱이나 요셉 스토리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진정한 축복은 바로 행복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겪으면서 행복을 스스로 찾는 것이란 개념이다. 지금의 고난은 미래에 숨겨놓은 축복이기에 '위장된 축복'이라는 것이다. 세계2차대전 끝물에 치른 선거에서 패한 윈스턴 처칠이 물러날 때, 그의 아내는 "이 패배는 위장된 축복"이라고 그를 위로했다. 이후 그는 물론 다시 재기에 성공한다.
한국에서 '위장된 축복'이란 말이 으스스한 공기 속에서 흘러나온 때는 20여년 전 IMF 외환위기 때다. 캉드시 당시 IMF총재는 "고금리 긴축정책과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고강도 처방이 당장은 가혹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한국경제를 재도약시키는 축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한국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모델을 이식하며 초유의 노력으로 단기간 안에 위기를 극복한 바 있다.
# 문 대통령의 '생큐 아베', 캉드시의 '생큐 IMF'론
문 대통령도 '위장된 축복'을 거론하며 '생큐 아베'를 외쳐왔다. 일본의 보복조치가 역사문제 차원을 넘은 불순한 경제침략인 만큼 우리도 대일 기술의존의 고리를 끊는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타이밍임을 아베가 일깨워줬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로 결국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까지 보탰다.
정부의 문제는 그런 상황이 올 때까지 국민이 감내해야 할 고통에 대한 언급도, 고려도 부족해 보인다는 점이다. 또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데 대한 정부 내부의 책임감 있는 문제의식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거론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큐 아베'의 메시지가 울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캉드시의 발언을 들었을 때 저승사자의 말처럼 느껴졌던 것을 떠올려본다면, 문 대통령의 말이 무엇이든 지금은 비판부터 할 분위기인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생큐 아베'가 허세에 그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직시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아베 정권의 도발이 그간 한국사회가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지만 기득권의 이해와 정치권의 이해타산 때문에 하지 못했던 '묵은 난제'를 해결할 기회를 줬다는 지적은 그래서 귀에 쏙 들어온다. 그 묵은 난제 중에 가장 큰 것이 중소기업 중심의 기업 생태계 구축이다.
#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 성장'의 솔루션
재벌 대기업 중심의 성장체제는 중소기업의 성장을 막아왔다. 이번에 아베의 무역보복으로 대기업이 주도하는 조립형 수출 중심의 시스템을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일본에서 손쉽게 수입하던 양질의 소재가 차단되는 상황은 국내 중기를 재발견하고 중점 육성하게 만드는 기회가 됐다. 문 대통령은 소득주도 성장의 기저를 이루는 산업계 하부 구조의 강화를 아베 덕분에 실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또 그 구체적인 방략이기도 한 '원천기술의 축적'과 '부품 국산화율 높이기'는 일본을 비롯한 국가들에 대한 편향적인 대외의존도를 낮춰 국가경제의 불안정성과 취약성을 극복하는 길이다. 2003년 진대제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이 취임했을 때 일성(一聲)은 "30년간의 중기정책을 살펴보니, 그간 이렇게 주옥 같은 정책이 많았구나 하고 놀랐다"는 말이었다.
소재와 부품산업의 국산화와 육성 정책들은 그 이후에도 숱하게 나왔지만, 문제는 대기업 중심 정책시스템에 밀려 슬그머니 서류뭉치 속에 던져졌다. 현재 한·일 간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적 공생시스템을 좀 더 실력균형을 갖춘 상태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여기에 보태진다. '보복'은 힘의 우위를 과신하는 쪽이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아베에게 진짜 '생큐!' 할 수 있으려면
또 '생큐 아베'를 말하는 이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와 맞물려 이 사태를 보기도 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사물인터넷과 클라우드와 같은 '미래형 빅뱅'이 일어나고 있는 때에, 우리가 일본을 앞질러 기반 기술의 압도적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는 긴장감을 아베가 우리에게 주었다는 얘기다.
윤홍식 교수(인하대 사회복지학과)는 '생큐 아베'에 대해 이런 명쾌한 발언을 날렸다. "아베의 도발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지만,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스스로 그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내부 분열로 스스로 백기를 들지만 않는다면 이 도발은 우리가 그간 못 풀었던 난제를 풀 기회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생큐 아베'를 주창하는 뜻은 세 가지 중대한 비전을 담고 있다.
첫째는 일본의 이 도발이 단기적 해프닝이 아니라 장기전이거나 상시전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다.
둘째는 적전분열로 친일과 반일을 나눌 문제가 아니라 국민 결속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선 우리 정부가 더욱 판단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우리의 표적은 아베가 아니라 '일본과의 향후 관계'이며, 그간 과거형태의 관계에 안주해온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셋째는 국가의 품격이다. 보복을 하는 상대에게 '응전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중 분쟁을 학습한 '정글의 법칙'론자 앞에서, 오래된 적대감을 극복한 진정한 미래형 극일(克日)로 관계를 리드하자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래야 진짜 아베에게 생큐!할 수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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