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책으로 10. D. 애덤스, 『은하수 여행 ~~ 안내서』>
밤새 비가 엄청 많이 내렸던 지난 일요일(28일) 이른 아침, 빗길을 뚫고 동네 도서관에 갔다 왔다. 영국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1952~2001)의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여섯 권 중 안 읽은 4, 5, 6권을 빌려왔다.
빗방울 때문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공기는 무거웠고, 베란다 흰 난간에 빗방울이 떨어질 듯 말 듯 줄느런히 매달려 있었다. 표면장력이 중력을 못 이기는 순간이 되면 빗방울은 하나씩 하나씩, 어떨 때는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졌다. 찰나(刹那)적 추락이다.
애덤스의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폭발,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구 폭발은 ‘은하계 초공간 개발 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은하계 변두리에 ‘초공간 고속도로’를 건설하려는 위원회의 계획에 지구가 장해물이었다. 폭파를 앞두고 위원회 공병단장은 우주선에서 지구인에게 최후통첩을 한다. “잠시 후 지구가 사라진다. 지난 50년 간 철거계획을 고시했으나 들은 체도 안 했으니 더 기다릴 수 없다. 2분이면 끝나니 걱정하지 말 것.”
같은 시간, 런던 변두리 지역에서는 지방의회의 철거 전담 직원이 우회도로를 새로 내는데 방해가 되는 집 한 채를 철거하기 위해 그 집 앞에서 최후통첩을 하고 있다. 뒤에는 집을 박살낼 불도저가 엔진이 걸린 채 서 있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이 집을 철거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불도저 앞에 드러눕거나 자신과 드잡이를 하며 철거를 막아온 집주인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제 더는 못 기다린다. 철거에 돌입한다!
런던 지방의회 철거반의 불도저가 이 집을 뭉개려는 바로 그 순간 초공간 개발위원회 공병단도 지구 폭파 단추를 눌렀다. ‘지구는 2분 동안 펄펄 끓다가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허망하게 사라진 지구에서 단 한 명만 살아남는다. 런던 지방의회 불도저 앞에 드러눕던 그 집주인이다. 방송국 말단 직원인 그는 술집-퍼브(Pub)-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외계인의 도움으로 폭파 직전 지구에서 탈출했다. 이 외계인은 외계인들의 우주여행을 위한 안내서를 만들기 위해 우주를 여행하다 지구인의 모습으로 지구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구에서 지구가 폭파될 것을 알고 있던 유일한 존재였다. 우주 유일의 지구인이 된 주인공은 이 외계인 친구와 함께 우주선을 히치하이킹하며 우주를 떠돈다. 때로는 우주선 선장 모르게 훔쳐 탄다. (훔쳐 탄 우주선에서 지구멸망 6개월 전에 다른 남자-그도 외계인이다-에게 뺏겼던 애인을 만나기도 한다.)
재미있는 설정이고 뛰어난 상상이다. 이런 설정과 상상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어진다. 귓속에 넣으면 우주의 어떤 언어도 통역이 되는 물고기(바벨 피시)가 나오고, 인간이 생쥐로 동물행태 연구를 했지만 사실 생쥐는 ‘비상하게 초지능적이고 범차원적인 존재’들이 인간행태를 연구하기 위해 스스로 변형된 생물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우주 노인’도 나온다. 생쥐가 덫에 놓인 치즈를 보고 찍찍 거릴 때 인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따위가 범차원적 존재들의 연구 목적이다.
‘우주 노인’은 원래 행성제작업체 직원이었다. 그는 수십만 년 동안 그 회사에서 근무하며 폭파된 지구 제작에도 참여했는데, 무엇보다 노르웨이의 피요르드가 사라진 걸 제일 아쉬워한다. 노인은 지구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피요르드 해변을 고안하고 디자인한 사람이 자기라고 말한다. 그는 피요르드가 아쉬워 지구를 새로 만들어볼 생각을 하고 있다던가 ….
행성(行星)과 성단(星團)의 이름이 숱하게 나오고, 물리학 용어와 이론, 블랙홀, 각종 우주선의 추동력에 대한 설명 따위가 페이지마다 소개되지만 이 소설은 ‘공상과학소설(SF)’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지구 멸망’이라는 끔찍한 주제를 터무니없는 상상과 끝없는 수다, 요설(饒舌)로 포장한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이 책에는 애덤스가 만든 촌철살인(cutting remarks)이 자주 번득인다. 희한한 비유와 통찰이 불쑥 튀어나온다. 재미도 있지만 생각거리도 준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이 <돈키호테>, <전쟁과 평화>, <두 도시 이야기> 등 위대한 작가들의 고전명작이 즐비한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소설 1,000권’에 포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 오던 아침 일찍 이 책을 빌리러 나선 건 “빗방울은 홍수가 제 탓인 줄 모른다”라는, 아마도 애덤스 최고의 촌철살인일 이 경구의 앞뒤 맥락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영어로는 “The single raindrop never feels responsible for the flood.”인 이 멋진 경구는 지난해 말 한 친구 덕에 알았다. 페이스북에서 더 자주 소통하는, 그 자신 촌철살인의 명인인 그는 그 무렵 한 공영방송이 김정은 캐릭터 상품을 개발해 팔려 하고, ‘위인환영단’이라는 괴 단체가 김정은을 환영하자는 내용의 현수막을 광화문 네거리에 걸어놓자, 이 경구를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하지”라는 걱정이 듬뿍 묻어났다.
이 경구가 “어디에 나왔는지는 모르겠다”는 친구를 위해 출전(出典) 찾기에 나서 애덤스에게 이 말의 저작권이 있음을 알게 된 나는 그의 대표작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이 경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3권까지 읽고 중단했던 것을 베란다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린 빗방울들을 보고 4, 5, 6권을 마저 읽어보기로 한 것이다.
애덤스는 열아홉 살이던 1971년 히치하이킹으로 유럽을 여행하다가 오스트리아의 작은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지만 영어건 독일어건 어떤 언어로도 대화가 되지 않아 좌절한다. 알고 보니 그들은 부근 호텔에서 열린 국제 청각장애인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었다. 그때 이 소설의 씨앗이 애덤스의 무의식 속에 뿌려졌다. 처음엔 BBC 라디오 연속극으로 발표됐다가 인기가 폭발하자 소설로 재탄생했다. 여섯 권 중 5권은 애덤스의 문체와 감각, 유머를 유난히 좋아한 영국의 다른 유명 작가가 ‘안내서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새로 썼다. 애덤스에 대한 존경의 표시, ‘오마주(Homage)’인 셈이다.
비는 그쳤다. 폭우가 쏟아질 때 여린 마음에 걱정되던 물난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일관계, 남북관계에는 빗물이 계속 고인다. 홍수가 난 후, 빗방울들이 제 탓인 줄 알게 된들 뭐하나. 다 쓸려나간 뒤인데.
**이 경구의 저작권자는 애덤스가 아니라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라는 주장이 있다. 볼테르가 일찍이 “어떤 눈송이도 눈사태가 제 탓인 줄 모른다”는 말을 했다는 거다. 나는 볼테르보다는 애덤스의 것이 더 적실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홍수는 봤지만 눈사태는 경험하지 못해서일 거다. 다른 변형도 많다. “어떤 자동차도 교통체증이 제 탓인 줄 모른다”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를 본 또 다른 친구가 다운받은 걸 보내주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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