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6일(현지시간) "부자 국가들이 개도국을 자청해 WTO의 규정을 피하고 우대를 받고있다"며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들이 WTO에서 개도국 지위에 따른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고 미 무역대표부(USTR)에 지시했다.
이와 관련해 △주요 20개국(G2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거나 회원 가입 절차를 밟고 있는 국가 △세계은행이 분류한 고소득 국가 △세계 무역량의 0.5%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 등 4가지 기준을 제시하며 이들 국가를 개도국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타깃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풀이되지만, 문제는 우리나라도 이 4가지 기준에 모두 해당된다는 점이다. 우선 우리나라는 현재 G20과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등 기구에서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15년에는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GDP) 3만6601달러로 세계은행 고소득 국가로 분류된 바 있다. 또한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무역액은 지난해 1조1405억달러를 기록, 전세계 무역량(약 39조달러) 가운데 2.9%를 차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문제제기로 우리나라가 WTO 개발도상국에서 제외되면 농업 분야가 주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지난 1996년 OECD 가입 당시 공산품·서비스 분야 등 농업을 제외한 분야에서는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는 조건으로 개발도상국 인정을 받았다. 이에따라 공산품·서비스 등의 분야에서는 개도국 지위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만 농업 분야에서는 관세율이나 보조금 조정 등의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농산품에 따라 국내 관세율은 천차만별이지만 대표적 농산품인 쌀의 경우 외국산을 들여올 때 513%의 관세율을 부과하고 있다. WTO는 개도국에 대해 국내가격과 국제가격 차이만큼 관세를 허용하고 있다. 반면 미국 등 선진국은 농산물에 대한 관세율이 낮아 10%를 넘지 않는 수준이다.
고준성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잃게 되면 기존의 높은 관세를 조정할 수밖에 없게 돼 국내 농산물시장에 대한 보호가 취약해질 것"이라며 "우리나라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 미만으로 낮아진 상태이기에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적을 수 있으나 농산물을 생산하는 계층에게는 피해가 크게 나타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WTO는 지난 2001년부터 다자간 무역협상 '도하개발어젠다(DDA)'를 통해 개도국 지정 및 세부 혜택 등을 새롭게 정립하려 했지만 아직까지 실질적인 진전이 없는 상태다. DDA협상에서 지난 2008년 마련한 농업·비농산물 분야 세부원칙 초안을 통해 '개도국 제외' 시 영향을 가늠해볼 뿐이다. 당시의 초안에 따르면 농산물 관세를 최대 70%까지 감축하고 보조금도 선진국은 45%, 개발도상국은 30%가량 줄이는 안이 만들어진 바 있다. 그러나 이후 미국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 등이 터지면서 DDA협상은 수그러든 상태다.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실질적인 농산물 관세율이나 보조금이 단기간 내에 조정될 가능성은 낮다"며 "미국이 WTO 내에서 선진국·개도국 사이에 짜여진 구도를 바꾸려고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165개 회원국이 모두 동의해야 하기에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했다.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WTO 협상은 컨센서스 베이스이기 때문에 협상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지금까지는 미국이 금융위기 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WTO 협상에 집중할 수 없었기에 협상이 부진했지만 앞으로는 미국이 특히 중국을 겨냥해 적극적으로 협상을 주도하거나 양자협상 등에서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내다봤다.
이어 "미국은 이번 '개도국 지위' 문제를 시작으로 전반적인 WTO 개혁에 나설 것으로 본다"며 "정부는 앞서서 농종변화 등 대안마련을 통해 대비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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