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강제징용 배상판결로 촉발된 갈등으로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하면서 양국 갈등이 경제·안보 등 전분야에서의 극한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며 결사항전 의지를 밝혔고, 아베 신조 정부가 1965년 맺은 한·일 협정으로의 회귀가 아니면 대화불가란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양국의 강대강 대치 국면은 장기간 평행선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갈등을 단순히 한·일간 과거사가 낳은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정부 이후 형성된 보호무역주의와 미·중 패권전쟁이란 큰 틀에서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북핵을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정세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한·일 갈등을 해결하는 단초가 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북핵으로 흔들리는 한·미·일 동맹...한·일 갈등도 같은 맥락
한·일 갈등을 북핵 문제와 연결지어 보는 관점은 미국이 북핵을 단순히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중국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전망에서 비롯됐다. 실제 미국은 최근 공개한 '2019년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에서 중국을 현상타파 국가(Revisionist Power)로 지목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국경과 가장 가까운(nearest) 곳에 전략자산을 강화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유튜브 방송으로도 유명한 한 국제전문가는 익명을 요구하면서 "일반적으로 한·미·일 동맹을 감안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한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대화에 나선 것도 북한이 뉴욕 채널을 통해 백악관에 원산 갈마지구 개항을 제안하면서부터라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분석이다. 개항은 통상뿐 아니라 상대국 군함의 정박을 의미한다. 북한 동해에 미국의 핵전력이 배치될 경우 중국에는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게 트럼프의 계산이란 것이다. 북한이 중심발은 여전히 중국쪽에 디디면서 미국쪽으로 오른발을 한발짝 디디는 피봇전략을 구사하면서 미국 입장에선 전략적 활용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이와 관련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은 최근 책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에서 화폐전쟁 저자로 유명한 쑹홍빈 중국 사회과학원 교수는 '관점'이란 책에서 공히 해양세력으로 부상하려는 중국과 이를 막으려는 미국이 지정학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두 저자는 그 대표지점으로 북한과 파키스탄을 지목했다. 두 지역 모두 미국이 에워싼 동맹·파트너국의 장벽이 가장 약한 곳이다. 동·북 아시아에서의 충돌 지점이 한반도에서 북한으로 국한 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견제 수단으로 북한이 유용해질수록 한·미·일 3각 동맹에서 한국의 역할은 축소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네 장의 사진에 드러난 한반도 주변 정세 변화
①번 사진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1일 오전(현지시간) 양자회담을 하기 앞서 악수를 한 뒤 등을 지고 각자 자리를 향하는 모습이다. 현재 한·일 갈등 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②번 사진에선 이날 오후 4시 열린 미·일·호주 전략대화에서 3개국 외무 담당 장관이 손을 맞잡고 있다. 오른쪽부터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상, 머리스 페인 호주 외교장관이다. 일본과 호주는 미국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동맹국들이다. 미국이 2019년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에서 린치핀(Linchpin·핵심축)이라고 언급한 한국은 이 자리에서 빠졌다.
이에 앞서 강경화 장관은 한·중 양자회담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손을 잡았다(③번 사진). 이 자리에서 왕이 부장은 한·일 갈등 상황에 대한 강 장관의 설명을 듣고 "자유무역체게 질서유지"를 강조했다.
④번 사진은 한·미·일 3국 장관 회담에서 찍혔다. 폼페이오 장관이 강 장관과 고노 외상의 냉랭한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폼페이오 장관은 이미 고노의 손을 잡은 뒤였고 "(한·일 문제는) 양국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스스로 함께 찾을 것"이라며 사실상 발을 뺐다. 적극적인 중재를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원인 속에 해법이...자유무역주의 국가와의 연대, 한·미·일 동맹 틀 강화해야
이 같은 상황에서 한·일 갈등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가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국가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역학관계의 변화는 근본적으로 자유무역주의 퇴조와 궤를 같이 한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G2로 부상한 중국이 관세장벽으로 미국이란 시장을 잃게 되면서 대체시장을 찾아 나선 게 일대일로의 핵심이다. 환구시보 사설에서 손자병법을 거론하며 일본에 대한 도전을 무모하다고 비꼬았던 중국이 자유무역주의를 옹호하며 강경화 장관의 손을 맞잡은 배경이다.
한·일 갈등도 근본적으로는 자유무역주의를 등에 업고 성장한 한국이 일본을 위협하는 현실이 발단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된 직후 밝힌 대국민 담화에서 말했듯 일본의 이번 경제규제는 일본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려는 투키디에스의 함정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
이번 ARF에서 싱가포르 위무장관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게 아니라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세안 회원국들을 화이트리스트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맥락이 같다. 공교롭게 미·일·호주 3국 회담이 열리는 때 강경화 장관은 한·아세안 회의에 참석중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주의를 배경으로 급성장하는 중국, 한국·싱가포르 등 아세안 국가와 미국·일본 등 선도국의 보호무역주의가 충돌하는 양상이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한국은) 자유무역주의로 성장했고 앞으로도 이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군사적으로는 한·미·일 동맹의 틀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이 북핵을 장기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보는 한 우리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GSOMIA) 파기 등 한·미·일 동맹의 약화를 지렛대로 미국을 중재 테이블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은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미국은 한·일 군사보호협정 파기에 대해 우려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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