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정권의 실체]외조부의 이름으로...아베 "임기 내 개헌 국민투표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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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회 기자
입력 2019-08-20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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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④필생의 과업 개헌(1)

  • "현행 헌법은 美 강요한 것...日스스로 만들어야"

  • 1946년 공포 이후 개정 없어...'변화된 시대론'

  • 학자들 "아베 개헌은 '괴헌'...헌법 파괴행위"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 도발에 곳곳에서 '극일(克日)'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일본을 이기려면 먼저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 정권과 이를 떠받치고 있는 극우세력의 뿌리와 실체부터 짚는 게 급선무다. 앞으로 5회에 걸쳐 이를 집중 분석해본다.<편집자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13일 우리의 추석 격인 '오봉' 명절을 맞아 야마구치현 나가토시에 있는 선친(아베 신타로 전 외무장관) 묘소를 참배한 뒤 기자들에게 헌법개정에 대해 "자민당 창당 이후 최대 과제"라며 "국회에서 헌법 논의를 드디어 본격적으로 해 나가야 할 때를 맞았다고 (선친께) 보고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묘소도 함께 찾았다.

아베 총리는 참의원 선거를 치른 지난달 21일 밤 한 TV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자민당 총재(총리) 임기인 2021년 9월까지 헌법개정안 국회 발의와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게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개헌은) 내 사명으로 남은 임기에 개헌에 당연히 도전하겠다"고 강조했다. 당초 "2020년에 개정헌법을 시행하는 게 목표"라고 했던 데서 한 발짝 물러난 것이지만, 개헌이라는 '정치적 과업'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한 셈이다.

◆"외조부의 이름으로"...개헌 집착하는 아베

아베 총리가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개헌은 외조부인 기시 전 총리의 숙원이었다. 기시 전 총리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장관 등을 지내고 종전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복역한 뒤 총리(1957~1960)까지 오른 인물이다. 기시가 중심이 돼 1955년 11월 결성한 자유민주당(자민당)은 '당 정강' 가운데 하나로 '현행 헌법의 자주적 개정'을 내걸었다. <기시 노부스케 증언록>에 따르면 기시는 자신이 전후 정계에 복귀한 것도 "일본을 재건하는 데 있어 헌법개정이 얼마나 필요한지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행 헌법에는 제정절차에 오류가 있고 내용에도 잘못이 있으며, 이는 미국이 점령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개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기시는 후대가 이뤄야 할 일로 '개헌'과 '북방영토 반환'을 들었다. 아베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 증언록>을 수 차례 읽었다고 한다.

극우 성향의 일본 산케이신문 계열 매체인 석간후지는 "헌법 개정은 아베 신조 총리의 비원이다. 정치인이 된 것도, 제1차 정권에서 좌절을 거쳐 다시 집권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총리의 생각은 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시 전 총리가 개헌을 추진한 구체적인 정황은 지난해 말 공개된 일본 외교문서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 극비문서는 기시가 총리로 취임한 지 4개월 만인 1957년 6월 첫 미국 방문을 앞두고 당시 주일 미국 대사로 있던 더글러스 맥아더 2세와 가진 방미 예비회담 내용 등을 담고 있다.

1957년 5월 11일자 문서에 따르면 기시는 맥아더에게 "안보조약을 개정하고 남방제도(오가사와라) 문제를 해결 한 후 (국정 선거에) 임하고 싶다. 그러면 양원(중의원, 참의원) 모두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의 다수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군 점령으로 맺어진 불평등한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하고 국민의 염원이었던 오가사와라 제도의 반환이 성사되면 헌법 개정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기시 전 총리는 5년을 목표로 개헌을 추진하는 동안 미·일 안보조약을 본격적인 상호방위조약으로 전환하기 위한 체제를 정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기시는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이 국회에서 승인된 뒤 1960년 7월 퇴진했다. 당시 일본에서 일어난 안보투쟁이 워낙 거센 가운데 강경론을 구사한 기시에 대해 자민당 내에서도 반발이 잇따른 뒤였다. 안보투쟁은 미·일 안보조약 개정, 이른바 신(新)안보조약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대대적인 저항운동이었다. 신안보조약에 포함된 상호방위 의무 조항이 화근이 됐다. 일본이 또다시 동북아시아 냉전 속에 군사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는 전쟁의 참화를 겪은 일본인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기시는 개헌 구상의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 꿈은 외손자 아베 총리의 숙원으로 남았다. 2012년 12월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한 아베는 취임 직후 기시의 묘소를 찾아 다시 총리가 됐음을 알린다. 아베 총리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할아버지는 미·일 동맹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는 신념에서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했다"며 "나도 할아버지와 같은 신념과 결단력으로 조슈번(현재 야마구치현) 출신의 정치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내고 싶다"고 밝혔다.
 

일본국헌법 원본 첫 페이지[사진=위키피디아]


◆"강요된 헌법...구시대 헌법...미래 개척해야"
 
일본에서 5월 3일은 '헌법기념일'로 공휴일이다. 1946년 11월 3일 공포된 '일본국 헌법'이 6개월 뒤인 이듬해 5월 3일부터 시행된 것을 기리는 날이다. 일본 헌법은 73년 전 공포된 이후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제정 이후 아홉 차례 개정됐다. 어찌보면 아베의 개헌론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대표적인 게 이른바 '강요된 헌법론'이다. 현행 헌법은 연합군최고사령부가 단기간에 틀을 잡아 일본에 강요한 것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헌법을 새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종전 후 일본을 점령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최고사령관은 일본을 파멸적인 전쟁으로 몰아넣은 '대일본제국 헌법'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1945년 10월 취임한 시데하라 기주로 총리는 맥아더의 의향을 받아 자체적으로 개헌위원회(마쓰모토위원회)를 꾸린다. 문제는 위원회가 개헌 원칙으로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는 기존 헌법의 뼈대에 손대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천왕 주권'을 전제로 한 개헌은 미세조정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마쓰모토안에 실망한 연합군총사령부는 개헌 작업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맥아더는 마쓰모토안이 공개된 지 이틀째 되는 날인 1946년 2월 3일 코트니 휘트니 민정국장을 불러 ①천황의 지위는 보전한다 ②국가의 주권적 권리인 전쟁을 폐기한다 ③일본의 봉건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 원칙을 담은 독자안을 만들도록 했다. 민정국이 2월 4일부터 12일까지 9일에 걸쳐 완성한 초안(맥아더 초안)은 13일 일본 정부단에 전달됐다. 총사령부는 일본 정부의 항의를 곧이 듣지 않았다. 결국 일본 정부는 3월 2일 맥아더 초안을 기초로 정부안을 만들어 총사령부와 문안 조정을 거쳐 4월 17일 최종본을 공개했다. 70여년 한결 같이 내려온 일본국 헌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아베를 비롯한 극우 개헌론자들이 자국 헌법을 두고 "며칠 만에 날림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비하하는 이유다.

아베의 개헌 명분 가운데는 '변화된 시대론'도 있다. 70여년 묵은 헌법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전후 일본 정치 환경이 바뀐 만큼 헌법도 시대흐름에 맞게 변해야 한다는 논리다. 집권 자민당은 이에 맞춰 개헌에 대한 일본사회의 거부반응을 완화하기 위해 △환경권 △긴급사태(계엄령) △재정건전화 관련 조항을 헌법에 추가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해왔다.

아베 총리의 또 다른 개헌 논리는 '미래지향'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헌법을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창조적인 정신이 있어야 일본인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아베의 개헌은 '괴헌'...헌법 파괴 행위 

주목할 건 일본 헌법학계의 대가들조차 아베 총리의 개헌 명분과 그 실행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저명한 헌법학자인 고바야시 세쓰 게이오대 명예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태평양전쟁 시절의 기시 전 총리를 "기시는 대일본제국의 이름으로 전쟁을 했던 최고 책임자 가운데 하나였다. 무관의 최고책임자가 도조였다면, 문관의 최고책임자는 기시였다"고 기억하는 이다. 

그는 1980년대부터 30여년간 자민당의 헌법 관련 모임에 참여해왔다. 고바야시는 자민당의 개헌론에 동참한 데 대해 "시대의 변화에 맞게 헌법을 개정해가는 것 자체가 결코 금기는 아니다"라는 철학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개헌이 언제부턴가 헌법을 파괴하는 '괴헌(壞憲)'으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그는 "(아베 정권이) 절대로 개헌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며 "온몸을 바쳐 저항하는 중"이라고 했다.

고바야시 교수는 헌법이 다른 법률과 달리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고 강조한다. 일반 법률이 '국민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혹은 하지 말아야 할지'를 규정한다면, 헌법은 국민이 아닌 권력의 활동을 제약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민당에는 이같은 사실을) 몇 번이고 설명해도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국민이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공공을 생각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말았다"거나 "일본국 헌법에는 '권리'라는 말은 20여회 나오지만, 국민에게 부과된 의무는 세 개뿐이다"는 불평을 쏟아냈다고 꼬집었다.

고바야시 교수는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민당이 공식적으로 밝히는 헌법 인식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기억했다. 2009년 8월 중의원 선거 참패로 민주당에 정권을 빼앗기면서 자민당의 헌법관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온건 성향에 공부할 줄 아는 '자수성가형' 의원들이 대거 낙선하고, 머리는 나쁘지만 대대로 이어온 강력한 지역 기반 덕분에 승승장구해온 '세습의원'만이 생존하면서 자민당 의원들의 평균적인 '레벨'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 중의원 의원 가운데 세습의원이 20%가 넘는다. 집권 자민당 내에서는 3명 가운데 1명, 내각 각료의 절반 이상이 세습의원이다. 크게 다르지 않았던 구조 아래 자민당이 2012년 4월 내놓은 '헌법개정 초안'은 일본국 헌법을 '평화헌법'이라 부르는 근거 조항인 9조의 전쟁 포기 및 전력 보유 불가 원칙을 흔들었을 뿐 아니라 기존 헌법에 존재했던 '개인' 개념을 '사람(人)'으로 대체했다. 개인으로 존중받아야 할 국민이 개, 고양이 등과 다른 종류의 생물인 사람 정도로 인식되고 만 셈이다.

이는 '천황주권' 사회에서 일본을 파멸적인 전쟁으로 몰아넣은 대일본제국 헌법을 일본국 헌법으로 개정해 일본이 '국민주권' 사회, 평화국가로 거듭난 데 대한 일본인들의 긍지를 깨뜨리는 악수였다. 

◆참고문헌
▲<아베는 누구인가>(돌베개)
▲<아베 신조의 일본>(세창미디어)
▲<도쿄 30년, 일본 정치를 꿰뚫다>(효형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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