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29일 박근혜 전 대통령 2심을 직권으로 파기환송했지만 뇌물액 86억원은 문제삼지 않았다. 파기 사유는 1・2심 모두 박 전 대통령이 현직 때 저지른 뇌물죄를 다른 죄와 별개로 선고하지 않고 하나로 합쳐 선고한 점이었다.
이번 선고에서 그대로 인정된 뇌물죄에서 전경련 이름은 여전히 빠져 있다. 당시 회원사들이 수동적으로 공익활동 일환으로 미르・K스포츠 출연금을 냈다는 판단이다.
앞서 특검은 최씨와 박 전 대통령이 2015년 5월 대기업들로부터 출연금을 받아 재단법인을 세우고 출연 기업을 배제한 채 운영하자고 공모했다고 봤다. 박 전 대통령 지시를 받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전경련에 재단 출연금을 요구했다. 이에 전경련은 회원사 임원들에게 두 재단 출연이 대통령 의중임을 전달했다. 법인 출연금 규모는 처음 30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늘었고 삼성이 낸 액수는 미르(125억원)와 K재단(79억원)을 합쳐 204억원에 달한다.
박 전 대통령 2심은 그가 이 부회장에게 재단 출연을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삼성은 통상적인 공익활동 일환으로 전경련을 통해 각 재단 출연금을 냈고, 이 부회장은 재단이 최씨의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해 세워진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설명이다. 또한 삼성이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재단 출연에 응하지 않을 경우 입을 수 있는 불이익을 우려해 출연을 결정했다고 봤다. 법원은 두 재단 출연 관련 직권남용・강요 피해자로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을 비롯해 현대차, SK, LG, 포스코, 롯데, GS, KT, LS, 한진, CJ, 금호아시아나, 두산, 대림, 아모레퍼시픽, 부영, 신세계 등 최종 출연 결정자들을 인정했다. 재단 설립에 관여한 몇몇을 제외한 전경련 일부 임직원도 피해자에 포함됐다.
이 부회장 2심 역시 이 부분을 무죄로 봤다. 재단이 받은 출연금으로 인한 두 사람의 간접적 경제적 이익을 직접적인 뇌물 수수로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1심도 정부 주도로 전경련이 재단 설립을 주관하며 주요 그룹 모두 출연해 사업 자체를 추가 검토할 필요가 없었다는 삼성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재단 출연금이 뇌물이 아니라는 원심 판단을 파기환송 사유에 넣지 않았다.
대법원 파기환송 직후 전경련은 논평을 내고 탈퇴 회원인 삼성전자 입장에 무게를 실었다. 전경련은 일본 수출규제 강화와 미중 무역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삼성전자 경영활동이 위축돼 한국 기업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재단 출연 기업으로 도마에 오른 4대 그룹(삼성・LG・SK・현대차)이 2017년 탈퇴하고 정권마저 바뀌면서 전경련은 적폐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재계 공식 소통 창구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와 10대 그룹의 비공개 조찬에 다리를 놓으면서 존재감을 재확인했다. 1988년부터 민간 차원 최고 부문 경제회의인 한미재계회의를 이끌어온 영향이 컸다는 평가다. 회의는 10월 11일 제31회를 맞는다.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이후 공석인 한국 측 위원장은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겸하고 있다. 전경련을 외면해온 청와대가 지난 3월 벨기에 필립 국왕 초청 국빈 만찬에 허 회장을 GS 회장이 아닌 전경련 수장 자격으로 초청한 배경도 벨기에 측과 전경련이 준비한 비즈니스 포럼이었다.
민간 외교 역량이 확인되고 있지만 전경련 입지는 아직도 장담하기 어렵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재단 설립 직권남용에 전경련이 이용된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탈퇴한 4대 그룹도 이미 두 사람의 국정농단 도구로 인식된 전경련 재가입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입장이다.
삼성전자는 29일 이 부회장 사건 파기환송에 대한 입장문을 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밝힌 과거의 잘못에는 미르・K재단 출연이라는 돌다리를 두드리지 않은 점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 측 변호인 이인재 변호사는 재단 관련 뇌물죄 무죄가 확정된 점을 의미 있다고 평가했다.
논평으로 탈퇴 회원을 두둔한 전경련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모습이다. 전경련은 정경유착 근절과 투명성 강화, 싱크탱크 강화로 위기를 헤쳐가고 있다. 1961년부터 최고 의사결정기구였던 회장단 회의를 없애고 그 역할을 이사회로 옮겼다. 정경유착 고리로 지목된 사회협력회계를 없애고 사업과 회계를 누리집에 공개하고 있다. 경제・산업본부의 정책 연구 기능은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으로 옮겼다. 최근에는 일본 무역 보복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각종 행사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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