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4월 어느날, 작은 배 한 척이 한강 두미협(斗尾峽)을 지나고 있었다. 두미협은 남한강 북한강이 만나 서북쪽 한강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목으로, 지금의 팔당댐 근처다. 그 배에 정약용이 타고 있었다. 큰형수 이씨의 제사를 마치고 형 정약전, 사돈 이벽과 함께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두미협에서 이벽은 “천주님께서 만물이 자라도록 힘을 주신 것이네”라며 정약용에게 책을 한 권 건넸다. 정약용 형제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벽과 토론을 벌였고 그 책을 열심히 탐독하기 시작했다. 정약용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다산 실학도, 천주교도 남양주서 시작됐다
한국 천주교회가 태어나던 순간이자 정약용의 애민(愛民) 실천사상의 한 축이 형성되는 순간이었고, 또한 정약용 삶의 파란(波瀾)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남양주 한강의 수면은 평온했지만, 저 깊은 저류(底流)에서 새로운 세상이 요동치고 있었다. 정약용의 철학도, 한국의 천주교도, 한 시대의 격동도 모두 남양주에서 시작되었다.
남양주는 조선시대 풍양현(豐壤縣)으로 불렸다. 한양에서 가까운데다 한강이 흐르다보니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였다. 당연히 사람들이 모였고 다양한 생각들이 어우러졌다. 남양주를 두고 “학문의 요람이었고, 철학의 산실이었으며, 예술과 상상력의 공간”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거기엔 늘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한양으로 가는 모든 것은 남양주를 통해야 했다.
조선의 왕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 이성계도 함흥과 한양을 오가며 남양주에서 머물렀다. 왕자의 난으로, 조선 왕실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때였다. 권력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지만, 다시 무언가 반전을 시도하고 싶었던 것일까. 조선 창업의 정신이 되살아났던 것일까. 그곳 하천은 태조가 머물렀다고 해서 왕숙천(王宿川)이라 불렸다. 태종 이방원은 한양 동쪽에 이궁(離宮)을 세웠다. 그것이 진전읍의 풍양궁이었다. 태종은 이곳을 자주 찾았으며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다.
이런 인연 때문일까. 남양주에는 유독 조선 왕과 왕실의 무덤이 많다. 세조와 정희왕후가 묻혀 있는 광릉(光陵), 비극적 삶을 살다간 단종비 정순왕후가 묻혀 있는 사릉(思陵),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홍릉(洪陵),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가 함께 묻혀 있는 유릉(裕陵). 그리고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인조의 할머니)의 순강원(順康園),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휘경원(徽慶園)도 남양주에 있다.
비록 폐위된 왕이지만 광해군의 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생모인 공빈 김씨(선조의 후궁)와 형 임해군 옆에 묻혀 있다. 권력과 정치에 희생 당해야 했던 비극적인 가족사를 보여준다. 흥릉 유릉 구역에는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영친왕비 묘(영원·英園),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의 묘, 마지막 황사손(皇嗣孫) 이구의 묘(회인원·懷仁園)도 함께 있다. 망국의 비애가 절절하다. 남양주에는 또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묘,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묘도 자리한다. 흥선대원군 묘는 원래 서울 마포에 있었으나 한 차례 이장한 뒤 1966년 남양주 화도읍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살기 넘치는 갈등의 대상이었던 아들과 며느리 곁으로 끝내 돌아온 흥선대원군,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백골 해후'
남양주에선 조선 왕조의 시작과 끝, 영욕과 부침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그렇기에 남양주는 가장 조선적인 땅이다.
남양주에는 수많은 선비와 학자, 시인묵객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조선시대 인재의 산실이 되었다. 그 한복판에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있었다. 석실서원은 병자호란 당시 충신이었던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1656년 창건되었다. 김수항,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등으로 이어지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고 문화사상을 잉태하는 산실로 자리 잡았다. 송시열, 이병연, 정선, 조영석, 홍대용 등이 바로 석실의 문하를 드나들었던 이들이다. 한때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논란도 있었지만 석실서원은 넉넉한 포용력으로 깊이 있는 강학(講學)을 이끌었고 기호지역과 영호남 인재를 모두 아우르면서 북학(北學)의 토대를 마련했다. 조선의 철학을 심화하고, 진경문화(眞景文化)를 구축하면서 18세기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운 것이다.
석실서원의 흔적은 정선의 1741년 작 진경산수화 ‘미호(渼湖)-석실서원(石室書院)’에 잘 남아 있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수록된 이 작품은 남양주 석실서원과 한강 물길을 담아낸 작품으로, 남양주와 석실서원에 대한 정선의 자부심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위대한 진경산수화가 남양주의 한강에서 잉태되었음을 웅변한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의 별서터가 운길산 아래에 있다. 조선의 자주적 역법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이순지, 연산군의 폭정에 당당히 맞섰던 박원종, 개혁 정치를 펼친 김식, 대동법을 추진한 김육 등 숱한 인재들의 흔적이 남양주 도처에 남아 있다.
그 흔적은 시대를 초월해 20세기에도 면면히 이어졌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장욱진. 그는 1963년 서울을 떠나 1975년까지 남양주 덕소에서 머물며 동양적 달관의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장욱진의 미술 또한 남양주에서 이뤄졌으며, 청록파 시인 조지훈도 이곳에 묻혀있다.
그런데 그 흔적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석실서원은 흔적도 없이 묻혀버렸다. 수석동에는 그저 표지석 하나만 덩그러니 서있을 뿐이다. 삼패리 한강변 장욱진 아틀리에는 통째로 사라져 표석 하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전태일 · 박종철 · 문익환 묻힌 곳
역사의 흔적은 기억이다. 기억은 우리 시대의 문화콘텐츠이고 문화관광 자산이다. 기억하지 않는 도시는 미래가 없다. 더 이상 흔적이 사라져선 안된다. 과거의 기억에 그치지 않고 이 시대의 기억도 축적해야 한다. 남양주의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곳엔 분신 노동자 전태일, 직업병으로 삶을 마감한 15세 소년 근로자, 1979년 신민당사 농성 YH 근로자 여성, 고문으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서울대생 박종철, 통일운동에 헌신했던 문익환 목사 등 130 여명이 잠들어 있다. 그들은 고단했던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이곳 민주열사 추모비엔 이렇게 씌어있다. “만인을 위한 꿈을 하늘 아닌 땅에서 이루고자 한 청춘들 누웠나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남양주에 멋진 기억을 덧대고 있다. 남양주시립박물관, 실학박물관, 모란미술관, 왈츠와닥터만 커피박물관, 주필거미박물관, 우석헌자연사박물관…. 지곡서당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울려 퍼진다.
그들은 왜 남양주에 왔을까. 조선의 왕들로부터 장삼이사(張三李四) 무지렁이 백성까지, 죽어서도 왜 남양주에 왔을까. 남양주는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길이 만나 한강으로 나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만남과 새로움을 꿈꾸는 청춘의 땅이기 때문이다. 남양주 봉선사에 가면 가톨릭 조각가 최종태가 조각한 보살상이 세워져 있다. 대웅전도 한자 대신 ‘큰법당’이라는 우리말 편액이 걸려 있다. 파격적이고 참신하다. 그것은 만남이고 화합이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이다.
1801년 마현마을을 등지고 남도 땅 강진으로 기약 없는 유배를 떠났던 정약용. 18년 긴 세월을 견디고 학문과 성정을 연마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했다. 남양주는 그런 곳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은 한강을 따라 이곳으로 모인다. 그리고 한강을 따라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간다. 남양주는 만나고 모색하고 새로운 정신을 탐색하는 곳이다. 정약용이 그랬고 정선이 그랬던 것처럼.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길은 서로 만나 남양주에서 두미협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진다. 한강은 비로소 남양주에서 시작한다. 남양주는 남한강 북한강 한강의 모든 역사를 목도하고 증언할 수 있는 곳이다. 남양주에 대한 인문학적 안목과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도시는 기억”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도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남양주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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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 - 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 - 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 - 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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