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9월15일부터 1991년 4월3일까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일어난 10건의 부녀자 연쇄살인사건. 전국을 공포에 떨게했던 이 사건의 유력 용의자를 무려 33년 만에 찾아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화성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현재 교도소에 수감 중인 50대 남성을 특정(特定)했다고 18일 밝혔다. 그는 1994년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5년째 수감 중이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했으나 대법원은 우발 범행일 가능성이 있다고 파기환송한 바 있다. 화성 사건의 공소시효는 이미 만료된 상태라 이 용의자를 이 건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경찰은 지난 7월 화성 사건의 증거물 일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DNA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일부 증거물(증거물 10건 중 피해 여성속옷 등 유류품 2점)에서 채취한 DNA와 이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경찰은 그가 나머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저질렀는지 여부를 추가 조사 중이다. 이 남자가 진범이라면 당시 20대로, 화성 연쇄살인사건 목격자와 생존 피해자들이 진술한 “중간 정도의 키에 20대 중후반”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은 어떤 영화인가. 2003년 개봉한 이 영화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을 일약 명감독의 반열에 올린 화제의 작품이다. 봉감독으로선 두번째 영화였으며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1996)를 각색한 것이다. 개봉 당시 영화를 본 뒤 충격 속에서 올렸던 '리뷰'를 다시 음미해본다.
[빈섬 이상국의 '알바시네' - 영화 '살인의 추억'과 끝나지 않은 진실게임]
헐리웃과 우리의 살인극이 다른 점. 그 친구들은 사람 잡는 게임에 매료되어 있는데 비해 우린 피로감과 권태로 가득 차 있다. 미제 사건을 다룬 영화라서 그럴까. 형사는 진실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구성한 스토리를 진실이라고 우기는 데 급급하다. 자막이 올라가는 빈 들판을 바라보는 시선이 공허하고 허탈하다. 범인은 끝까지 오리무중인데 그것을 붙잡으려 나선 송강호와 김상경은 왜소하고 굳어있다.
우선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충격이었다. 살인이 추억이 될 수 있는가. 그럴 순 없다. 살인과 추억을 병렬시킨 이 타이틀은, 상식과 금기를 깨면서 대중에게 섬뜩한 잔상을 남겼다. 현실사건이었던 이 살인극은 당대를 전율케한 악몽이었기에, 역설적으로 영화가 이 사건을 '추억'으로 소환했을 때 우리가 미처 발견하거나 깨닫지 못한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게 해주는 힘을 발휘했다.
상상력이 정지된 화면에선 거칠고 조잡하고 욕지기 가득한 현실감이 묻어나온다. 영화는 뜻하지 않았겠지만 헛다리만 짚는 경찰들의 좌충우돌을 처음부터 끝까지 비쳐줌으로써 완전범죄를 예찬하는 혐의를 지닌다. 여기엔 범죄자와의 대결구도보다는 혐의자에 불과한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경찰의 인권 유린이 활극처럼 펼쳐진다. 얼핏 보면 그 공권력 남용에 대한 고발극 같아 보이기도 한다.
# 신화가 되어버린 어느 살인을 복각하다
살인은 하나의 신화이다. 죽이는 자가 밝혀지지 않은 채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신화는 그 공포와 불안과 증오와 혼돈의 진폭을 한층 더 키운다. 죽은 여자의 시신을 보면서 구역질을 하는 경찰관과 그런 사건을 치른 뒤 피를 머금은 고기를 구워먹는 형사들을 통해 더럽고 무기력한 삶은 일상화되고 낯익은 풍경이 된다.
여자를 죽이는 범행 현장이 범인의 시선에서 보여진 것은 좀 어색하다 싶었다. 시종일관 송강호와 김상경의 눈에 의지했던 영화로서는 절대로 그 시선에 서는 것이 당혹스럽다. 전지적 시점이라면 영화의 매력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구성이 아닐까.
이 영화는 몇몇 조연들의 강한 이미지가 잔상으로 남는다. 고깃집 아들인 백강호는 어눌한 말투와 정신지체가 엿보이는 사내로,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문 때문에 살인 혐의를 뒤집어 쓴다. 시골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고문과 폭력과 협박으로 그에게 살인에 관한 진술을 받아냈지만 현장 검증 때 차질을 빚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다.
# 잔혹한 살인이 남긴 트라우마들
이 비슷한 일은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무더웠던 여름날 철둑 아래 도랑에서 이웃마을에 사는 처녀가 나체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흙이 몇 삽 덮여 있었던 그 시신에는 유두(乳頭)가 물어뜯겨져 나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동네는 발칵 뒤집혔다. 우리 할머니는 당시 도로의 보도블럭을 두어 장 주워와 화단에 깔았는데 들락거리던 경찰들은 그것까지도 문제 삼았다. 벌벌 떨면서 할머니는 파출소에 다녀왔다. 동네의 건달들이 모두 붙잡혀가 한 바탕씩 곤욕을 치렀음은 물론이다.
마을의 어느 형은 당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백수로 놀고 있었는데 밤중에 붙잡혀갔다. 그는 거꾸로 매달려 콧속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다. 형의 말. " 태어나면서 했던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생각나더라. 뭐든지 불어버리고 나오고 싶더라."
# 살인 혐의자의 인권을 들여다본 그 영화
화성의 건달들은 그보다 더했으리라. 그는 결국 고통과 불안을 이기지 못해 거짓 자백을 한다. 그가 당한 폭력은 살인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혐의를 받아야 하는 마을사람들의 억울하고 황당한 입장을 비춰준다. 그 폭력에 대한 보상은 가짜 나이키인 '나이스'신발 뿐이다. 고문 형사가 사다준 그 짝퉁 신발은 보통 사람들의 인권의 '정가(定價)'를 시니컬하게 말해준다. 백은 결국 자살한다. 그가 자백했던 살해 현장은 그가 저지른 것이 아니라 목격한 것이었을 지 모른다는 뒤늦은 추정을 뒤로 하고...
박해일의 경우는 얄궂다. 그는 공단에서 행정일을 하는 조용한 성격의 사내이다. 영화의 기분으로 보자면 틀림없이 범인일 법도 한데,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아니다. 미국에까지 보내서 분석케한 정액 유전자 감식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비교적 신중하고 과학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던 서울 형사 서태윤은 박해일이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확신을 넘어 과신했기에 그의 유전자와 범행 현장의 그것이 다르다는 서류를 보고는 거의 광기를 보이기까지 한다.
'혐의'라는 표현은 그가 '범인이 아니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우리네 정서는 혐의라는 말을 쓰는 순간, 그를 범죄자로 단정하는 습관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박해일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가 범인이 아닐 경우, 그가 당한 그 끔찍한 권력의 폭력은 한 삶을 짓밟은 치명상이다. 살인자를 잡아야 한다는 광기어린 강박은 한 인간을 완전하게 인격살인한다. 물론 그 살인에 대한 책임 묻기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꿈도 못꾸는 일이다.
# 범죄를 쫓는 경찰의 척박한 삶도 함께 조명
박두만과 함께 일하는 형사 조용구의 삶도 녹녹치 않다. 조용구는 전문대를 나온 박두만이나 4년제를 나온 서태윤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는 범죄 혐의자를 고문하고 폭행하는 구악(舊惡)의 전형이다. 이런 행동들 때문에 그는 새로 부임한 신동철 반장의 발길에 채여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한다. 그는 녹슨 못에 찔린 상처를 방치하는 바람에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는다. 바닥 인생의 절망과 어이없는 삶을 짊어지는 현실은, 살인자나 그것을 쫓는 자나 별 차이가 없음을, 조용구는 비감하게 보여준다.
# 시골의 숨막히는 정적과 그것을 깨는 살인, 봉준호 감수성의 발견
이 영화가 견지하는 기이한 감수성은 시골의 숨막힐 듯한 정적과 그것을 깨는 이미지의 파격에 있다. 그 대비는 눈부시다고 할 만하다. 황량한 논둑 도랑 속에 들어있는 여자의 주검과 그것을 구경나온 아이들. 주검이 발견될 때 마다 주변에는 경찰과 구경꾼들과 기자들이 몰려 아우성과 소란이 빚어진다. 현장 검증 날의 질척이는 논바닥은 그 백미다. 그리고 형사 일을 때려치운 박두만이 문득 다시 찾은 살인의 현장과 거기를 지나가는 아이의 맹랑한 말. 며칠 전 살인자가 이곳을 찾아왔다는 암시가 그 말에 숨어 있었지만, 그 뿐이다. 다시 카메라는 화성의 숨막히도록 고요한 들판을 천천히 끌어당기며 자막을 올린다.
# 봉스트라다무스, '기생충' 이어 '살인의 추억'도 족집게?
한편 봉준호 감독은 2013년 '살인의 추억' 개봉 10주년 때 가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범인인 그 사람의 심리 이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 만약 그 분이 살아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올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혈액형은 B형이고, 1986년 1차 사건으로 봤을 때 나이는 아마 1971년 이전에 태어난 남자가 아닐까 합니다. 영화에도 나온 9번째 사건 희생자인 여중생의 치마에서 정액이 나왔습니다. 경찰이 유전자 정보는 아직 가지고 있을 겁니다. 만약 여기 왔다면 모발과 대조해서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은 성격으로 봐서 스스로 매체에 다뤄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살인의 추억' 10주년 행사에 충분히 올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말을 마친 봉감독은 갑자기, "저기 지금, 누구 나가시네요."라며 극장 출구 쪽을 바라보며 조크를 해서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바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화성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현재 교도소에 수감 중인 50대 남성을 특정(特定)했다고 18일 밝혔다. 그는 1994년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5년째 수감 중이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했으나 대법원은 우발 범행일 가능성이 있다고 파기환송한 바 있다. 화성 사건의 공소시효는 이미 만료된 상태라 이 용의자를 이 건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경찰은 지난 7월 화성 사건의 증거물 일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DNA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일부 증거물(증거물 10건 중 피해 여성속옷 등 유류품 2점)에서 채취한 DNA와 이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경찰은 그가 나머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저질렀는지 여부를 추가 조사 중이다. 이 남자가 진범이라면 당시 20대로, 화성 연쇄살인사건 목격자와 생존 피해자들이 진술한 “중간 정도의 키에 20대 중후반”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은 어떤 영화인가. 2003년 개봉한 이 영화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을 일약 명감독의 반열에 올린 화제의 작품이다. 봉감독으로선 두번째 영화였으며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1996)를 각색한 것이다. 개봉 당시 영화를 본 뒤 충격 속에서 올렸던 '리뷰'를 다시 음미해본다.
헐리웃과 우리의 살인극이 다른 점. 그 친구들은 사람 잡는 게임에 매료되어 있는데 비해 우린 피로감과 권태로 가득 차 있다. 미제 사건을 다룬 영화라서 그럴까. 형사는 진실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구성한 스토리를 진실이라고 우기는 데 급급하다. 자막이 올라가는 빈 들판을 바라보는 시선이 공허하고 허탈하다. 범인은 끝까지 오리무중인데 그것을 붙잡으려 나선 송강호와 김상경은 왜소하고 굳어있다.
우선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충격이었다. 살인이 추억이 될 수 있는가. 그럴 순 없다. 살인과 추억을 병렬시킨 이 타이틀은, 상식과 금기를 깨면서 대중에게 섬뜩한 잔상을 남겼다. 현실사건이었던 이 살인극은 당대를 전율케한 악몽이었기에, 역설적으로 영화가 이 사건을 '추억'으로 소환했을 때 우리가 미처 발견하거나 깨닫지 못한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게 해주는 힘을 발휘했다.
상상력이 정지된 화면에선 거칠고 조잡하고 욕지기 가득한 현실감이 묻어나온다. 영화는 뜻하지 않았겠지만 헛다리만 짚는 경찰들의 좌충우돌을 처음부터 끝까지 비쳐줌으로써 완전범죄를 예찬하는 혐의를 지닌다. 여기엔 범죄자와의 대결구도보다는 혐의자에 불과한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경찰의 인권 유린이 활극처럼 펼쳐진다. 얼핏 보면 그 공권력 남용에 대한 고발극 같아 보이기도 한다.
# 신화가 되어버린 어느 살인을 복각하다
살인은 하나의 신화이다. 죽이는 자가 밝혀지지 않은 채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신화는 그 공포와 불안과 증오와 혼돈의 진폭을 한층 더 키운다. 죽은 여자의 시신을 보면서 구역질을 하는 경찰관과 그런 사건을 치른 뒤 피를 머금은 고기를 구워먹는 형사들을 통해 더럽고 무기력한 삶은 일상화되고 낯익은 풍경이 된다.
여자를 죽이는 범행 현장이 범인의 시선에서 보여진 것은 좀 어색하다 싶었다. 시종일관 송강호와 김상경의 눈에 의지했던 영화로서는 절대로 그 시선에 서는 것이 당혹스럽다. 전지적 시점이라면 영화의 매력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구성이 아닐까.
이 영화는 몇몇 조연들의 강한 이미지가 잔상으로 남는다. 고깃집 아들인 백강호는 어눌한 말투와 정신지체가 엿보이는 사내로,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문 때문에 살인 혐의를 뒤집어 쓴다. 시골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고문과 폭력과 협박으로 그에게 살인에 관한 진술을 받아냈지만 현장 검증 때 차질을 빚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다.
# 잔혹한 살인이 남긴 트라우마들
이 비슷한 일은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무더웠던 여름날 철둑 아래 도랑에서 이웃마을에 사는 처녀가 나체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흙이 몇 삽 덮여 있었던 그 시신에는 유두(乳頭)가 물어뜯겨져 나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동네는 발칵 뒤집혔다. 우리 할머니는 당시 도로의 보도블럭을 두어 장 주워와 화단에 깔았는데 들락거리던 경찰들은 그것까지도 문제 삼았다. 벌벌 떨면서 할머니는 파출소에 다녀왔다. 동네의 건달들이 모두 붙잡혀가 한 바탕씩 곤욕을 치렀음은 물론이다.
마을의 어느 형은 당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백수로 놀고 있었는데 밤중에 붙잡혀갔다. 그는 거꾸로 매달려 콧속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다. 형의 말. " 태어나면서 했던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생각나더라. 뭐든지 불어버리고 나오고 싶더라."
# 살인 혐의자의 인권을 들여다본 그 영화
화성의 건달들은 그보다 더했으리라. 그는 결국 고통과 불안을 이기지 못해 거짓 자백을 한다. 그가 당한 폭력은 살인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혐의를 받아야 하는 마을사람들의 억울하고 황당한 입장을 비춰준다. 그 폭력에 대한 보상은 가짜 나이키인 '나이스'신발 뿐이다. 고문 형사가 사다준 그 짝퉁 신발은 보통 사람들의 인권의 '정가(定價)'를 시니컬하게 말해준다. 백은 결국 자살한다. 그가 자백했던 살해 현장은 그가 저지른 것이 아니라 목격한 것이었을 지 모른다는 뒤늦은 추정을 뒤로 하고...
박해일의 경우는 얄궂다. 그는 공단에서 행정일을 하는 조용한 성격의 사내이다. 영화의 기분으로 보자면 틀림없이 범인일 법도 한데,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아니다. 미국에까지 보내서 분석케한 정액 유전자 감식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비교적 신중하고 과학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던 서울 형사 서태윤은 박해일이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확신을 넘어 과신했기에 그의 유전자와 범행 현장의 그것이 다르다는 서류를 보고는 거의 광기를 보이기까지 한다.
'혐의'라는 표현은 그가 '범인이 아니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우리네 정서는 혐의라는 말을 쓰는 순간, 그를 범죄자로 단정하는 습관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박해일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가 범인이 아닐 경우, 그가 당한 그 끔찍한 권력의 폭력은 한 삶을 짓밟은 치명상이다. 살인자를 잡아야 한다는 광기어린 강박은 한 인간을 완전하게 인격살인한다. 물론 그 살인에 대한 책임 묻기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꿈도 못꾸는 일이다.
# 범죄를 쫓는 경찰의 척박한 삶도 함께 조명
박두만과 함께 일하는 형사 조용구의 삶도 녹녹치 않다. 조용구는 전문대를 나온 박두만이나 4년제를 나온 서태윤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는 범죄 혐의자를 고문하고 폭행하는 구악(舊惡)의 전형이다. 이런 행동들 때문에 그는 새로 부임한 신동철 반장의 발길에 채여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한다. 그는 녹슨 못에 찔린 상처를 방치하는 바람에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는다. 바닥 인생의 절망과 어이없는 삶을 짊어지는 현실은, 살인자나 그것을 쫓는 자나 별 차이가 없음을, 조용구는 비감하게 보여준다.
# 시골의 숨막히는 정적과 그것을 깨는 살인, 봉준호 감수성의 발견
이 영화가 견지하는 기이한 감수성은 시골의 숨막힐 듯한 정적과 그것을 깨는 이미지의 파격에 있다. 그 대비는 눈부시다고 할 만하다. 황량한 논둑 도랑 속에 들어있는 여자의 주검과 그것을 구경나온 아이들. 주검이 발견될 때 마다 주변에는 경찰과 구경꾼들과 기자들이 몰려 아우성과 소란이 빚어진다. 현장 검증 날의 질척이는 논바닥은 그 백미다. 그리고 형사 일을 때려치운 박두만이 문득 다시 찾은 살인의 현장과 거기를 지나가는 아이의 맹랑한 말. 며칠 전 살인자가 이곳을 찾아왔다는 암시가 그 말에 숨어 있었지만, 그 뿐이다. 다시 카메라는 화성의 숨막히도록 고요한 들판을 천천히 끌어당기며 자막을 올린다.
# 봉스트라다무스, '기생충' 이어 '살인의 추억'도 족집게?
한편 봉준호 감독은 2013년 '살인의 추억' 개봉 10주년 때 가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범인인 그 사람의 심리 이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 만약 그 분이 살아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올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혈액형은 B형이고, 1986년 1차 사건으로 봤을 때 나이는 아마 1971년 이전에 태어난 남자가 아닐까 합니다. 영화에도 나온 9번째 사건 희생자인 여중생의 치마에서 정액이 나왔습니다. 경찰이 유전자 정보는 아직 가지고 있을 겁니다. 만약 여기 왔다면 모발과 대조해서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은 성격으로 봐서 스스로 매체에 다뤄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살인의 추억' 10주년 행사에 충분히 올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말을 마친 봉감독은 갑자기, "저기 지금, 누구 나가시네요."라며 극장 출구 쪽을 바라보며 조크를 해서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바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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