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에 대한 예의는 있나, 스스로에 대한 염치는 있나
관자(管子) 목민편은 ‘나라엔 네 줄기 밧줄이 있어야 한다(國有四維)’고 통찰한다. 그 네 가닥의 밧줄(維는 벼리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물의 코를 꿰는 줄이다, 그물을 펴고 오므리는 긴요한 존재를 의미한다)은 뭔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예의염치(禮義廉恥)’다.
예(禮)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우는데, 백성이 지도자를 비웃는 ‘무례’의 나라다.
염(廉)이 끊어지면 나라가 뒤집히는데, 온갖 잘못을 숨기는 ‘파렴(破廉)’의 나라다.
치(恥)가 끊어지면 나라가 망하는데,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무치(無恥)의 나라다.
어렵게 말할 것 없다. 국민에 대한 예의가 있느냐, 자신에 대한 염치는 있는가. 이 두 가지의 질문이다. 앞쪽이 없으면 국민이 비웃고 뒤쪽이 없으면 무대의 혓바닥만 춤을 춘다.
지금 이 나라에 무엇이 무너졌으며 무엇이 없는가. 국가가치를 지탱하는 핵심밧줄인 ‘염치’가 실종됐다는 자각이 ‘이게 나라냐’와 ‘이건 나라냐’의 본질이다. 이 염치 잃은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 ‘언행불일치’ 조국과 노회찬이 다른 결정적 이유
조국 법무장관과 노회찬 전 정의당대표의 공통점은 언행불일치였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불일치의 ‘크기’도 다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불일치가 드러났을 때 드러낸 부끄러움의 유무가 아닐까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이 사회의 개혁을 외쳐온 사람이다. 개혁은 옳은 말을 행동화하는 실천이기에, 옳은 말이 그대로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관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 일관성의 가치를 놓쳤다고 생각했을 때, 노회찬은 죽음으로 부끄러움을 표현했다. 그를 아까워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죽을 만큼 치명적인 부끄러움이었던가 라고 물으며 옷깃을 여몄다. 진보의 ‘살아있는 염치’를 일깨워준 그를 잊을 수 없다. <2편으로 계속>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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