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공공기관에서 법무를 담당하는 A씨는 한글날이 전혀 반갑지 않다. 직원들이 시중에 배포된 무료 글꼴을 아무런 검토 없이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용 시 뒤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꼴 제작사나 법무법인으로부터 반강제적으로 합의금을 내라는 메일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시중에 수백개가 유통되는 무료 글꼴은 겉보기만 무료인 경우가 많다. 이용 약관을 들여다보면 웹사이트, 이북(E-Book) 발간이나 상업적 용도로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독소 조항을 품고 있다. 해당 무료 글꼴을 이용해 홈페이지에 PDF 문서를 올리거나 회사의 브랜드명과 캐치프레이즈를 제작하면 꼼짝없이 관련 비용이 청구된다.
20여년 전부터 무료 글꼴의 사용범위를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결론이 난 것은 1996년(94누5632)과 2001년(98도732) 두 번의 걸친 대법원 판결을 통해서다. 대법원은 글꼴 자체는 저작권이 없지만, 글꼴 파일은 저작권이 인정된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후 글꼴 제작사와 법무법인의 목표는 책과 포스터 같은 오프라인 간행물에서 글꼴 파일을 이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PDF 문서·이북과 홈페이지 같은 온라인 페이지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저작권 개념이 희박한 기업과 구성원들을 타깃으로 했다. 상업적 용도로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무료 글꼴을 인터넷에 배포한 후 기업과 관공서가 이를 이용하는 것을 확인하면 관련 비용을 청구했다. 법무법인이 청구하는 라이선스 비용은 100만원에서 1000만원 사이로 알려졌다. 글꼴 제작에 들어가는 노력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큰 비용을 청구하는 '삥뜯기'식 합의금 장사라는 게 오픈넷과 같은 진보 인터넷 진영의 지적이다.
무료 글꼴을 함부로 이용하는 사례가 줄어들자 합의금 장사는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특정 프로그램에서만 무료 이용을 허락하고 프로그램을 벗어나면 합의금을 요구하는 사례나, 처음에는 상업적 이용까지 가능한 정책을 취했다가 이용자가 늘어나면 상업적 이용을 금지한 후 합의금을 요구하는 식이다.
하지만 가독성·디자인 향상 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중의 무료 글꼴을 이용하는 소상공인과 비영리기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상업적 이용이 가능한 무료 글꼴을 모아서 보여주는 '눈누'에 따르면, 무료 글꼴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면 '인쇄', '웹사이트', '영상용 자막', '브랜드나 캐치프레이즈 CI', '프로그램(이북 포함) 탑재', '포장지', '글꼴의 수정·복제·배포 가능 여부' 등 7가지 사용조건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7가지 사용조건을 모두 허용하는 무료 글꼴의 대표적 사례로는 네이버 나눔글꼴, 구글·어도비 본글꼴 등이 있다.
법률사무소 MnK 이경윤 변호사는 "무료 글꼴 여부를 확인하려면 글꼴 제작사 홈페이지 등의 계약서·이용 약관을 상세히 살펴봐야 한다. 무료 배포의 범위를 개인·비상업용으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며 "디자인업체에 의뢰해 홈페이지나 광고물을 만들었는데 결과물에 유료 글꼴이 사용되었다면, 의뢰자가 저작권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저작권 침해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글꼴 제작사 등으로부터 내용증명을 수신했을 경우에는 굳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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