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는, 판을 뒤엎는 총과 웃음탈의 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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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10-1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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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의 한 장면.]



#웃음이란 무엇인가, '장미의 이름'과 '조커'

영화 '조커'는 웃음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을 오래 전에 받아본 기억이 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었다. 중세의 한 수도원장은 예수가 평생 한번도 웃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웃음이 악마의 유혹이며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믿었다. 그는 수도원 도서관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제2권의 희극론 필사본에 독을 발라놓는다. '웃음'을 찾는 자에 대한 테러다.

조커는 우스개 소리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카드의 '정해지지 않은 강력한 패'를 말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영화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다. 

먼저 웃음의 역설은 스토리를 뒤트는 핵심코드다. 아서 플렉의 피에로 화장과 가면 안쪽엔 웃지 않는 얼굴이 들어있다. 남을 웃기지 못하는 '예능감 제로'의 아서가, 그 가식과 위장 안에 기거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조커 비극의 핵심이다. 감독은, 웃기지 않는 아서에게 웃음을 그칠 수 없는 병까지 붙여준다. 이쯤 되면 그에게 웃음은 저주다.

관객들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이, '카드패 조커'의 의미다. 조커는 정체성이 일정하지 않으면서 결정적인 때에 등장해 판을 바꿔버리는 존재다. 이 때문에, '조커' 아서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 그가 카드패의 조커가 되는 건, 총 한 자루

감독은 아서와 관객 사이에 조금씩 이물감을 집어넣는 악취미를 보여준다. 정확히 말하면, 관객 쪽의 아서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는 과정이다. 그건 아서가 달라져서가 아니라, 관객이 처음에 이 주인공을 오해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 웃기는 코미디언의 우울한 인생에 대한 연민이었을 것이다. 10대 아이들이 그가 들고 있던 광고판을 빼앗고 그를 구타할 때 그런 감정들은 더 고조됐을 것이다.

그가 '정해진 배역'을 떠나 카드패의 조커가 되는 건, 그를 가엾이 여긴 동료가 호신용으로 총을 준 뒤부터다. 총은 지루한 룰들을 지킬 필요 없이 판을 바꿀 수 있는, 그의 힘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는 약자의 한계를 벗는다. 아서가 총을 지닌 게 아니라, 총이 아서를 지닌 것에 가깝다. 아서가 곧 '총'이며, 언제든지 어떤 제어장치도 없이 살인이 가능한 '총의 화신'이다. 

아서는 어떤 사람인가. 영화는 조금씩 그 팁을 보여주지만, 그런 것들이 노출될수록 아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관객이 약자 주인공에게 부여했던 '선한 인간'의 선입견들이, 그의 망상과 광기와 분노가 뒤섞이면서 발현되는 살육 행위들로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관객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일관된 존재'로 확정하지 못하게 된다. 조커가 놀고 있는 영화 속의 공간에서 어쩌면 그의 정체성은 . 그렇다고 처음에 지녔던 감정을 완전히 철회하지 못하는 가운데, 관객들은 그와 불편하면서도 기묘한 공감을 섞는 관계를 유지하며 영화를 따라다니게 된다. 심각한 정신질환까지 앓는 그가 무슨 짓을 할지 갈수록 조마조마해지는 것이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 첫 조커를 행사한 지하철 살인사건

영화가, 외형과 내면의 이격(離隔)을 꾸준히 키우는 동안 아서는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있는 피에로탈을 덮어 쓰고 있다. 첫 살인을 저지른 지하철은 그의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이격시킨다. 그는, 여성을 희롱하는 기득권층(금융회사 직원들)에게 주체못할 폭소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되고, 이 때문에 여성은 구했지만 자신이 구타를 당한다. 이때 등장하는 총이 '조커'를 행사하는 후련한(?) 시발점이 된다. 조커는 판을 확실히 쓸어야 하기에, 도망치는 마지막 한 놈까지 따라가 죽인다.

이 사건은, 아서에 대한 관객의 혼란을 결정적으로 키운다. 이 사람을 지지할 것인가, 비판할 것인가. 그런데, 영화는 시치미를 뚝 떼고 조커의 광란극들을 '지지시위'하듯 쫓아가며 열광해준다. 물론 아서가 갈수록 흉폭해지는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태생의 비밀을 끌어댄 원천적 분노가 있고, 자신의 코미디 재능 없음에 대한 조롱을 비웃은 것에 대한 반사적 분노도 있다. 함부로 장애자를 조롱하는 것에 대한 사회 약자편의 정의 비슷한 분노도 있다. 거기에 착란증에서 생겨난 환상들 또한 폭력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영화가 증빙서류처럼 붙여놓은 그 '살육의 이유'는, 관객에겐 더없이 석연찮다. 그렇다고 살인과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니, 이 자를 선인이라 할 것인가, 악인이라 할 것인가. '조커' 패를 쓰는 것에는 감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 코미디 자체를 뒤엎는 코미디 살인 코미디

아서가 그토록 꿈 꿨던 머레이쇼에 초대됐을 때, 그는 다른 출연자 부인에게 느닷없이 과도한 키스를 퍼부어 당사자와 객석을 뜨악하게 한다.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선 분석하기 어렵다. 이것도 유머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남을 웃겨야 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이 웃긴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심리상담사에게 아서가 내뱉은 말 "어차피 조크는 주관적인 것이니까요."라는 생각을 실행한 것이다. 

관객들은 아서가 쇼에 나왔다가 자신의 유머가 먹혀들지 않자 갑자기 권총을 꺼내 자살을 하는 장면을 미리 떠올렸을지 모른다. 아서 또한 그런 생각을 하고 나왔을 수 있다. 하지만, 쇼가 진행되면서 그는 계획을 바꾼다. 자신이 죽는 것보다 쇼진행자인 머레이가 죽는 것이 훨씬 더 웃기는 상황이라고 결정한 것이다. 아서의 조커 패는, 판을 쓸어버리는 것에 목적이 있지 자신을 쏴서 패배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걸 그는 깨달았는지 모른다.

코메디 무대 자체를 뒤엎는 것이야 말로 최대의 코메디라는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그가 쇼 진행자를 쏜 이유는, 자신의 안웃기는 코메디를 조롱하기 위해 초청한 괘씸죄다. 문제는 죄질에 상응하지 않는 보복의 크기일지 모른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살인이 게임의 행동이며 의사 표현의 수단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 웃음으로 무장한 가면이, 세상의 조커가 되다

영화가 복잡해지는 것은, 청소부들의 파업으로 쓰레기 처리가 이행되지 않은 도시의 이미지다. 쓰레기로 뒤덮인 도시에서 역설적으로 빈부간의 갭이 지워지는 것이다. 아서의 가면은, 극심한 빈부차에 고통받던 빈자들이 자신의 신원을 숨기면서도 서로 결집하여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무기가 된다. 기득권을 처단한 살인사건은 오히려 아서를 영웅으로 만들고, 총으로 휩쓸던 '판'은 가면으로 휩쓰는 판으로 확장된다. 가면이 조커가 된 것이다.

가면은 타인의 웃음을 자아내지 못하는 그의 가짜웃음이었고, 그것이 세상을 뒤엎는 조커가 됨으로써, 엉뚱한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내달린다. 객석에서는 이 조커판에 대해 백퍼 수긍하지 못하는 기분으로 괴물같은 영웅탄생을 지켜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 영화가 이토록 참신하며 불편한 이유는 일상의 정상적 논리를 해체하는 이상한 후련함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는 것에 있다. 이건 블랙코미디가 아니라 블러드(blood 혹은 blurred) 코미디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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