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대표적이다. 연준은 2015년 말부터 지난해 말까지 기준금리를 9차례 올렸지만, 올해는 금리를 동결하다가 지난 7월과 9월에 이어 30일(현지시간)에도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연준은 이날 이른바 '보험성 금리인하' 행진의 종료를 시사했지만, 시장에선 내년에 추가 금리인하 재개 가능성을 엿보는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국채 같은 자산을 매입해 직접 돈을 푸는 양적완화 재개 가능성도 거론된다.
연준을 따라 통화긴축을 벼르던 유럽중앙은행(ECB)도 마찬가지다. ECB는 지난 9월 기준금리 가운데 하나인 예금금리를 -0.4%에서 -0.5%로 낮췄다. 양적완화도 재개하기로 했다. 31일 퇴임을 앞둔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후임자인 크리스틴 라가르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드라기의 적극적인 부양 의지를 이어받을 태세다.
신흥국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 기조도 완화 쪽으로 기울었다. 한국은행은 지난 7월에 이어 이달에도 기준금리를 인하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금리인하, 양적완화를 비롯한 추가 통화부양 가능성을 시사했다. 블룸버그는 한국은 물론 호주·뉴질랜드 등이 이미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췄다며, 이들 3개국 중앙은행 가운데 한 곳 이상이 양적완화에 나설 공산이 크다고 관측했다.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통화완화 행보 뒤엔 이른바 '일본화(Japanification)'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일본화 공포가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며,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정책당국이 일본화 덫에 빠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 경제의 일본화는 일본이 겪은 장기불황의 전방위 확산을 의미한다.
일본 경제는 1980년대 최대 호황을 누렸다. 경제지표와 더불어 주식, 부동산 가격이 하늘을 찌르는 사이 일본 기업들은 미국 경쟁사와 랜드마크 부동산을 사들였다. 이미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된 일본의 부상은 미국을 위협할 정도였다.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도쿄증시 간판지수인 닛케이225가 1989년 12월 29일 3만8915 선에서 최고점을 찍더니 이듬해부터 수직낙하하기 시작했다. 지수는 여태껏 한 번도 30년 전 고점을 회복하지 못한 채 2만 선에 머물러 있다. 일본 경제는 1990년대 초 자산거품이 터지면서 디플레이션, 장기불황 수렁으로 빨려들어갔다. 거품 붕괴에서 비롯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사실상 '잃어버린 30년'으로 흘러가고 있는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세계 경제에 만연한 저인플레이션·저금리 현상을 일본화의 대표적인 전조로 꼽는다.
저인플레이션은 물가상승률이 낮은 걸 말한다. 물가상승률이 계속 떨어져 마이너스(-)가 되면 디플레이션이 된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현상이다. 경기 회복세로 물가인상 기대감이 커지면 소비가 늘어 경기에 더 힘이 실리지만, 물가상승세가 더디거나 심지어 물가가 더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소비위축 요인이 된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부양에 전력을 쏟았지만 물가상승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인 저금리 현상도 추세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주요국 기준금리는 금융위기 이후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불안감에 휩싸인 투자자들이 국채로 몰리면서 시중금리와 연동된 국채 금리도 추락일로에 있다. 도이체방크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서 마이너스 금리로 거래되는 채권이 전체의 30%가 넘는다.
그 사이 주요국에서는 장기불황이 한창일 때의 일본처럼 공공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일본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이 1990년 67%에서 지난해 238%로 주요국 가운데 최고가 됐다. 일본 정부가 줄어든 GDP를 부채(국채 발행)로 메운 결과다.
◆시라카와 전 BOJ 총재 "일본화 교훈 잘못 배웠다"
BOJ는 장기불황에 맞서 제로금리, 양적완화, 마이너스 금리 등 실험적인 통화부양책을 총동원했다. 성과는 미미했다. 일본 경제는 여전히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FT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벤 버냉키 당시 연준 의장을 비롯한 주요국 통화정책당국자들은 일본의 통화정책 실패 사례를 면밀히 검토했다. 이들은 곧 거품 붕괴 직후 BOJ의 조치가 단호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보다 공격적인 통화부양과 은행권 자본확충이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금융위기 대책도 사실상 실패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비전통적인 통화정책 수단을 잇따라 도입했지만, 일본화의 전조만 더 뚜렷해진 모습이다.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BOJ 총재는 세계 경제가 일본화 공포에 휩싸인 건 일본화의 교훈을 잘못 배운 탓이라고 짚었다. 2008~2013년 재임한 시라카와 전 총재는 구로다 하루히코 현 BOJ 총재의 전임자다. 시라카와는 최근 닛케이아시안리뷰(NAR)에 기고한 글에서 정부가 디플레이션이라는 유령이 아닌, 생산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게 일본화의 진정한 교훈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장기불황에 빠진 건 BOJ의 통화정책이 대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급격한 고령화, 빠르게 발전하는 첨단기술, 세계화를 비롯한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게 시라카와의 분석이다. 통화부양책이 기업과 가계가 미뤄둔 투자와 소비에 당장 나서도록 자극하면 얼마간 시간을 벌 수 있겠지만, 구조적인 문제에 발목을 잡힌 성장잠재력을 높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중앙은행들의 통화부양 여지가 크지 않은 만큼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 부양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고 꼬집었다. 재정 부양은 정부가 민간부문 대신 빚을 떠안고 돈을 푸는 것으로, 통화 부양보다 직접적이지만 성장잠재력이 제한된 상황에서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는 인력을 늘리고 생산성을 높여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니시무라 기요히코 전 BOJ 부총재도 FT에 "일본에서 일어난 일들은 일본 자체와는 무관하다"며 "일본의 문제는 특별한 게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다. 어쩌면 불가피한 것으로, 모두가 직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고령화를 비롯한 구조적인 변화의 선봉에 선 것일 뿐 다른 나라들도 결국 같은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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