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살던 문화 류씨, 고조부 때 서울로 이사
류영모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서울시 경찰청이 있는 곳으로 옛 남대문 수각다리(水閣橋) 근처이다. 류영모의 아버지 류명근이 태어난 곳은 자하문 밖 부암동이다. 류영모의 고조부 때에 황해도로부터 이곳으로 옮겨 왔다. 고조부 이상의 선조들은 문화(文化) 류씨(柳氏)의 본향인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아래에 있는 문화마을(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에서 살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문화 류씨 시조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류영모는 선조의 가계(家系)에 대해서 일기(多夕日誌)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 위로 다섯 번째 갈림에 계시었던 류윤복(柳潤福) 할아버지께서 남의 고을살이(郡守職任)에 따라다녔고, 의령 남(宜寧 南)씨 할머님께서도 나라에서 호적할 때 남의 호적이나 대서(代書)하시게 되셨다고 전할 만큼 집안 살림이 어려우셨던지, 아드님 곧 내 고조(高祖)되시는 류동식(柳東植)·할머니 남양 홍(南陽 洪)씨 내외분께서 시모님 남씨를 모시고 본향인 문화고을(황해도 구월산 밑)을 떠나신 듯합니다. 새 복지(福地)로 한성(漢城) 서북쪽 무계(武溪)와 삼계(三溪)의 협곡으로 잡으셨습니다. 내 5대(五代) 조부모님께서는 그 뒤에 아드님이 잡으신 복지로 오신 듯하므로 5대 조부모님 산소가 서교(西郊)에 계셨고, 6대(六代) 조부모님 류성기(柳成起)씨, 7대(七代) 조부모님 류준만(柳俊萬)씨 함자는 장지(壯紙)에 묵서(墨書)한 고호적(古戶籍)에서 살폈을 뿐입니다. 준만(俊萬 7대), 성기(成起 6대), 윤복(潤福 5대), 동식(東植 고조) 덕신(德信 증조), 무연(務連 조부), 명근(明根 부), 영모(永模)."
종교는 상놈의 종교 되어야 한다
류영모의 고조부인 류동식이 30대에 생계(生計)를 찾아 서울로 옮겨 왔다. 그때가 조선조 영조(英祖·조선 21대왕·재위 1724~1776)말경이 된다. 류동식이 30살쯤이었다면 대개 1770년쯤이다. 정조(正祖) 13년에 한성부(漢城府)의 인구가 18만9000명이었다. 그 인구의 40.6%인 7만6000명이 서울 도성 밖에 살고 있었다. 옛날에도 흉년이 들면 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서울로 모여들어 주로 청계천변에 빈민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 빈민 구제책을 세우기도 하였다. 류영모의 일가는 청계천 주변을 택하지 않고 산지(山地)를 택하여 자하문 밖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성(城) 밖의 인구에 포함된다.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서울의 인구가 10만명 선을 유지하였고, 정조 이후 조선조 말까지는 20만명 수준을 유지하였다.
류영모는 유교(儒敎)사상에서 온 씨족과 가족만을 지상(至上)으로 아는 생각 때문에 조선조가 멸망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선조의 족보타령·양반타령을 아주 싫어했다. "이제 우리는 몇 대조 할아버지 들추는 족보타령은 집어치워야 해요. 내가 위대해야지 조상만 위대하면 무얼 해요. 조상은 위대한데 내가 망국지종(亡國之種)이라면 조상에 대하여 불효입니다.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들출 수 있습니까?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상민(常民)들이 많이 믿어 상놈의 종교라 하였어요. 이는 유교가 양반의 종교인데 대해서 한 말이지요. 참 종교는 상놈의 종교가 되어야 해요. 종교가 귀족적이 되면 이미 영원한 정신을 잃은 것입니다."
1930년대에 학교 학적부(생활기록부)를 쓰는데 양반·상민의 계층을 밝히는 신분란이 있었다. 거기에 쓰기 위해 조사하는 가정환경조사서에도 반상(班常)을 밝히게 되어 있었다. 류영모는 자녀들의 가정환경 조사서에 자신이 직접 평민(平民)이라고 적어 넣었다. 상놈이라 자처한 것이다. 문화 류씨는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高麗)를 세운 고려 개국공신의 후예다. 조선왕조의 류성룡(柳成龍)이 보여 주듯이 양반에 속한다.
예수·석가도 거지삶 실천했다, 이게 상놈정신
류영모가 옛 수첩에 이렇게 써 놓은 글이 있다.
"이 상(常)놈. 심상(尋常)하게도 무상(無常)한 물신(物神). 이상(異常)하게도 비상(非常)한 정신(精神)."
류영모는 참사람이 되자면 가장 미천한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석가가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산 것은 이 때문이다. 무소유의 삶이란 거지(乞人)의 삶이다. 사회에서 거지 이상의 미천한 사람은 없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농민들이 입는 루바시카를 입고 농사를 한 것도, 마하트마 간디가 하리잔과 같이 웃통을 벗고 맨발로 다닌 것도 가장 미천한 자리에 서고자 함이었다. 예수가 "사실 사람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라고 한 것은 소위 잘났다는 지배층의 귀족을 나무라는 말이다. 양반의 우월의식은 죄악이란 말이다. "상놈의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다"는 백범(白凡)은 백정(白丁)과 범부(凡夫)의 윗글자를 따서 백범(白凡)이라 한 것이다. 못난 상놈이란 뜻이다. 류영모의 '이 상(常)놈' 정신, 김구의 '나 백범(白凡)'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백범'이 바로, 상놈정신을 별칭에 붙인 것
이 나라에서 가난하고 못난 놈들이 믿던 기독교가 어느 짬에 가멸하고 잘난 귀족들의 종교가 되었다. 가난하고 지위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밀려나 폭력이 지배하는 사이비 종교에 빠지고 있다. 폭력을 숭배하는 종교는 마피아 집단보다 더 무섭다. 일본의 옴진리교가 그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중세 가톨릭은 귀족종교와 폭력종교의 혼합이었다. 종교집단에 정치집단처럼 위계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스승과 제자가 있을 뿐이다. 예수는 마지막에는 스승의 자리도 버리고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였다.
재산 없고 지위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상놈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예수는 말하기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9:13)고 하였다. 우리는 언제나 "저희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루가 17 :10)라고 해야 한다. 잘난 체하는 귀족은 멸망의 넓은 문으로 들어갈 뿐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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