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국적기 캐세이퍼시픽 항공이 내년도 긴축예산안을 편성하고 배정된 항공기 좌석수를 1.4% 이상 줄인다. 직원의 급여인상폭도 기존 3~8%에서 2% 이내로 한정하고 연말 상여금도 대폭 줄인 3800달러(약 452만원) 선에서 일회성으로 지급한다. 또한 수익성이 낮은 노선을 점차 줄이고 수요 감소에 대응해 기내 승무원들을 지상직으로 배치하고 무급휴가를 권장한다는 방침이다.
어거스터스 탕 캐세이퍼시픽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4일 직원들에 대한 공지를 통해 “급여인상폭 축소와 연말 보너스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한 구성원들의 실망을 인식하고 있지만 회사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성의를 표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 정부와 시위대의 대치가 장기화하면서 수백만명의 방문객이 사라졌다”며 “우리가 직면한 불황에 대응하기 위한 비용관리 수단을 차후에 다시 공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광·운송 수요 부진, CEO 사임 등 잇단 악재에 이미지 추락
싱가포르 항공과 더불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항공사이자 세계 최고의 항공사로 손꼽히는 캐세이퍼시픽이 흔들리고 있다. 6개월 이상 지속된 홍콩시위가 장기화, 일상화하면서 홍콩 대표기업인 캐세이퍼시픽이 직격탄을 맞았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 주요 현지 언론들은 캐세이퍼시픽이 수익감소, 운항노선 축소, 급여인상 제한, 중국 정부와의 마찰, 운송수요 급감으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며 연일 관련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악재는 관광객 감소다. 홍콩관광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 10월 홍콩 입국자수는 331만명으로, 전년동기대비 43.7% 감소했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이 휩쓴 2003년 5월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이다.
특히 홍콩 입국 관광객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 본토인의 방문이 급감했다. 10월 홍콩을 방문한 중국 본토인은 250만명으로 전월대비 45.9% 감소했다. 시위대와 경찰의 폭력 충돌이 격렬해지면서 홍콩은 10월 1~7일 중국 국경절 황금연휴 특수도 놓쳤다. 중국 본토에서 홍콩 시위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홍콩을 찾는 중국인이 크게 줄었다.
캐세이퍼시픽과 계열사인 캐세이드래곤의 10월 탑승자 수는 274만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 대비 7.1% 줄었다. 3개월 연속 감소세다. 중국 본토와 홍콩을 오가는 운항이 20%를 차지하는 캐세이퍼시픽의 운항편수도 함께 쪼그라들었다.
캐세이퍼시픽은 올해 상반기에 13억5000만 홍콩달러의 순이익을 냈으나, 하반기에는 순손실을 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널드 람 캐새이퍼시픽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우리는 하반기 재무 실적이 상반기보다 훨씬 낮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단기 전망은 도전적이고 불확실하다. 캐세이퍼시픽과 홍콩 모두에게 어려운 시기”라고 말했다.
영국계 스와이어그룹을 모체로 하는 캐세이퍼시픽과 중국 정부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는 점도 불안 요소 중 하나다. 중국 당국은 항공면허연장을 재검토하는 등 캐세이퍼시픽에 대해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홍콩 노동조합연합에 따르면 홍콩민주화 시위 직후 홍콩국제공항 등지에서 지금까지 캐세이퍼시픽 승무원 1200명과 캐세이퍼시픽 지상직 직원 600명 이상이 주요 파업에 동참했다.
중국 당국은 “불법적인 시위, 항의, 폭력적인 공격에 참여한 사람들이 운항하는 캐세이퍼시픽 항공이 중국 본토 영공을 비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중국 항공업무 감독기관인 민용항공총국은 캐세이퍼시픽의 조치 부족으로 항공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았다면서 시위에 참여했거나 지지를 표시한 직원들을 중국 본토행 관련 업무에서 제외하라고 명령했다.
중국 본토에서 불매운동이 이어지면서 사태가 확산하자 존 슬로사 캐세이퍼시픽 회장과 루퍼트 호그 CEO가 책임을 지고 지난 8월과 9월 연이어 사퇴했다.
SCMP에 따르면 지금까지 홍콩시위와 관련해 해직된 캐세이퍼시픽 직원은 2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동경의 대상...현재는 경기침체에 전망 암울
캐세이퍼시픽은 최상의 기내서비스와 막강한 전세계 운항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세계적 항공권위지 스카이트랙스(SKYTRAX)가 매년 최상위권 반열에 선정하는 세계적인 항공사다.
한국에서도 캐세이퍼시픽의 명성은 과거 1980년대 홍콩 전성기 시절부터 유명했다. 이때 우리나라 항공사의 성장모델이 ‘캐세이퍼시픽’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다.
현재도 예비 승무원지망생 등 항공사 입사 희망자들에게는 모국의 국적기가 아니라면 복지와 다양한 혜택이 있는 싱가포르 항공이나 캐세이퍼시픽 같은 5성급 글로벌항공사가 동경의 대상이다.
캐세이퍼시픽은 회사 규모도 막강하다. 직원이 2만7000명에 달하고, 민항기와 화물기 등 238대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 국적항공사인 대한항공의 보유 대수가 166대인 점을 비춰보면 월등히 큰 규모다.
특히 정확한 운항시간과 신속한 서비스로 장거리 비즈니스클래스의 탑승률이 높다. 타 항공사 대비 월등한 비즈니스클래스 이익률은 캐세이퍼시픽만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 같은 캐세이퍼시픽의 오랜 명성이 추락하고 있다며 실적 악화와 손상된 이미지를 복원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루야 유 베이컨인터내셔널 연구원은 "홍콩시위가 장기화하면서 수요 부진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캐세이퍼시픽의 부진도 2020년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루 쳉 홍콩물류경제연구소 소장은 올해 하반기 홍콩 경제가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성장을 나타낼 것이라며 경제 위축이 이어지면서 캐세이퍼시픽을 포함한 현지 항공업계 전망이 당분간 어둡다고 평가했다.
SCMP에 따르면 올해 3분기 홍콩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9% 감소했으며, 전 분기에 비해서도 3.2% 줄어들었다. 폴 찬 홍콩 재무장관은 “올해 GDP는 작년 동기 대비 1.3%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시위 사태가 초래한 손실이 홍콩 GDP의 2%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캐세이퍼시픽은 내년 예산을 창사 이래 처음으로 하향 조정했다. 17대의 신규 항공기 도입 계획도 미루고, 대대적 정비가 필요한 구형 항공 기종은 운항을 중단한다는 방침이다. 5성급 서비스를 자랑하는 기내 서비스도 일부 축소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탕 CEO는 최근 인터뷰에서 “지난 3분기 승객이 4% 이상 줄어든 데 이어 4분기에는 7~8% 이상의 승객 감소가 예상된다”며 “상황이 무척 좋지 않다. 전사적 차원에서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하고 임직원이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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