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천자문'에서 접한 우주
류영모는 어떻게 그 해박한 지식과 깊은 통찰에 이르렀을까. 어린 시절의 교육은 어땠을까. 그가 세상의 정신을 이룬 동서고금의 종교와 신앙을 오직 흉중에서 융합하여 그 정채(精彩)를 빛나는 거미줄처럼 뽑아낸 기적의 영성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그 존재 바탕에 기인하는 바가 크겠지만, 학문과 교육을 통해 위대한 각성에 이르는 촉매의 지점들이 있지 않았을까. 그를 살피는 우리는 그와의 접점(接點)을 찾는 노력으로 어쩔 수 없이 ‘첫 공부의 추억과 개안(開眼)의 기억’ 속을 먼저 순례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기억을 끄집어낸다.
“다섯 살에 아버지에게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아주 신기해서 이걸 거듭 읽고 외워버렸습니다. 천지현황 우주홍황 이렇게 외우다가,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황현지천 황홍주우 이렇게 외우기도 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거꾸로 ‘아호재언 자조어위··· 황홍주우 황현지천’으로 줄줄 읊기도 했습니다. 일종의 놀이 같은 것이었죠. 눈을 감으면 글자들이 훤히 보였기에, 암기에 의존해 외우는 게 아니라 천장에 떠오르는 글자들을 보고 읽는 기분이었죠.”
류영모가 시작한 공부는 ‘천자문’에 담긴 심오한 뜻을 접하는 일이 아니라, 그 네 글자의 연속으로 이어진 250줄의 노래를 즐기는 것이었다. 그 노래가 세상의 핵심적인 이치를 담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검고 누렇다, 우주는 넓고 거칠다. 이 태초의 원시와 영원의 풍경은 그러나, 그가 세상의 종교와 지식을 통섭(統攝)적으로 이해하는 의미심장한 경험의 기반을 이룬다. 이것을 다섯 살이 어찌 처음에 알았겠는가. 교육은 이렇게 한 사람의 내면에 위대한 발견과 성장의 씨를 뿌린다.
회초리가 싫었다
천자문을 가슴속에 별처럼 담은 이 소년은 드디어 유학(遊學)을 시작한다. 홍문서골에 홍살문이 있는 부잣집에 차린 글방이었다. 서당 선생은 충북 괴산사람으로 <통감(通鑑)>을 가르쳤다. 통감은 중국 북송시대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편찬한 역사책이다. 이 책은 BC 403년부터 AD 960년까지 중국의 1362년간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다. 이 책은 중국의 역사를 통해 정치의 규범을 찾는다는 취지로 널리 읽혔다. 왕조의 흥망 원인을 분석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풀어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것이 서당의 교과서로 쓰인 이유는 소년기에 세상의 큰 그림을 접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선생은 한자로 된 교재를 나눠주고 학생들에게 먼저 읽어보게 시켰다. 어려운 한자도 많은 만큼 아이들은 당연히 쩔쩔맬 수밖에 없다. 예습을 해 와야 했다. 소년 류영모는 이미 한자가 익숙했던지라, 이 공부 또한 재미가 있었다. 선생은 엄했지만, 의미를 새겨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글을 읽고 난 뒤 그 구절을 붓으로 쓰는데, 선생은 손에 먹물이 묻어 있으면 꾸지람을 하고 회초리를 들어 종아리를 때렸다. 그런 일이 잦았다. 옛 서당에서 흔했던 풍경이겠으나, 이것을 당하는 소년 류영모는 견디기 어려웠다. 공부는 자발적이고 즐거워야 하는데, 왜 이렇게 고통을 주면서 가르치려 하는가. 매맞는 것이 몹시 싫었다. 그는 서당에 가기가 싫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서당에 가지 않으면 아버지의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류영모는 어린 마음에 회초리를 피할 꾀를 낸다.
거짓말은 참말보다 훨씬 ‘진화된 말’이라는 얘기가 있다. 참말만 하고 살 수도 있지만, 형편이나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하게 되면 참말보다 더 이익을 얻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람은 거짓말을 입에 담는다. 선생과 부모, 양쪽의 회초리를 피하면서 양쪽 모두에게 비난 받지 않는 방법을 류영모는 생각해낸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기도 했다. 서당에 가는 듯이 책을 가지고 집을 나와서는 서당과는 반대편으로 향하였다. 종로시장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였다. 저쪽 멀리엔 동대문이 우뚝하고 거리엔 초가집 가게가 늘어섰다. 가게 뒤쪽엔 기와집들이 촘촘히 박혔다(이 풍경은 류영모가 본 것보다 7, 8년쯤 뒤(1904년) 프랑스인 망도리외가 그린 그림 속에 있는 장면이다).
세상에 속일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길에 류영모가 있었다. 머리채를 늘어뜨린 어린 총각이 ‘통감’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날까 저어하며 고개를 숙인 채 시장바닥을 걷고 있었다. 동대문 밖엔 밭들이 줄지어 있고, 남대문 앞엔 미나리꽝이 있고, 서대문 밖은 솔밭이던 시절이다. 사대문 성안에도 채소밭이 많았고 밭 둘레에는 앵두와 자두 같은 과일나무가 지천이었다. 인구 17만의 1920년대 서울 풍경이다.
류영모는 서당 공부를 빼먹고서 서당 아이들이 집에 돌아갈 때쯤 되어서 시치미를 떼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아버지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영모를 보자 버럭 화를 내며 “이놈, 어디엘 갔다 오느냐”면서 다짜고짜 앞에 세워 종아리를 쳤다. 영모가 대답을 못하자, 그는 “서당엔 왜 안 가고 돌아다녔느냐”고 족집게처럼 말하지 않는가. 철썩철썩 쏟아지는 매를 맞으면서도 소년은 아버지가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시장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비밀은 나중에 어머니에게서 풀렸다. 영모가 서당에 오지 않자 서당 선생은 학동들을 시켜 영모를 데려오도록 집으로 보냈다. 영모는 집에 없었고, 부모는 서당에 간다던 영모가 옆길로 샜음을 알아챘다. 시장을 거닐던 영모는 모르고 있었지만 부모는 몹시 화가 나기도 하고 걱정도 되기도 하여 종일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서당에서는 서당대로 학생이 잠적한 것에 대해 난리법석이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매를, 그 몇 배로 맞고 난 뒤 류영모는 생각했다. “남을 속이는 일이 이토록 큰일이구나. 그리고 남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그는 다시는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는다. 세상을 속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것을 가슴에 새겼던 계기였다. 류영모는 팔순을 넘긴 어느 날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땐 얼마나 부끄럽고 슬프던지,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때 정말 죽고 싶었다
70여년을 따라온 그 기억과 ‘죽고 싶었다’는 고백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거짓에 대해 그가 그토록 엄격하고 진실에 대해 그토록 강직했던 마음자리가 거기서부터 생겨났음을 알 수 있지만, 그날의 깊은 트라우마도 느낄 수 있다. 회초리를 피하고 싶었던 마음이 낳은 거짓말과 그것이 다시 회초리를 부른 그 사건 앞에서, 그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일에 좀더 면밀하고 부드러울 필요가 있음을 ‘죽고 싶었다’는 말로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최근의 많은 교육들은 자녀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절망시키거나 혼란스럽게 한다. 교육이 진실로 자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자아실현’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시대엔 저 소년의 충동이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최근 이 나라에서 청소년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은 삶의 환경이 아무리 좋아져도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는 필요충분의 조건을 갖추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웅변한다. 자녀가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야말로 진짜 교육의 핵심임을 소년 류영모도 그때 어렴풋이 느꼈을까.
류영모는 죽음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파란만장한 고해(苦海)를 헤쳐 나가는 인생길에 자살의 유혹을 한 번도 안 느꼈다면 그것은 모자라는 사람이든지 미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50살에 자살의 유혹을 극복하고서 진리의 나를 깨달았지요. 석가나 예수의 구도(求道)를 위한 고행(苦行)은 죽어도 좋다는 결심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로댕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이 진짜 산 사람이라면 무엇을 생각하였을까요. 육신의 생명이 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나를 넘어서면 죽고 싶은 생각 사라져
하지만 그 고민에서 그친다면, 어떤 빛도 만날 수 없다. 가치가 없는 삶을 피하려다가 가치가 없는 죽음에 이를 뿐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는 삶에서 주어진 문제들을 보다 치열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류영모의 말은 이렇다.
“제나(自我)를 넘어서게 되면 죽고 싶다는 생각도, 살고 싶다는 생각도 없어집니다. 오로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좇는 것입니다. 살고 싶다는 사람이 미(未·미흡)라면, 죽고 싶다는 사
람은 과(過·과도)입니다. 공자(孔子)는 "지나친 것은 못 미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고 하였지요. 참사람은 살고 싶다, 죽고 싶다를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제나로 죽어서 얼나로 살아야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류영모는 학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배움살이(學生活), 먹음살이(食生活), 흘림살이(色生活)라는 세 가지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게 됩니다. 식색(食色)의 삶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짐승들이 모범적으로 잘 합니다. 짐승들도 식색의 삶을 가르치고 배우지만 학문이란 것은 없지요.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복잡한 학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글로 된 학문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공자(孔子)의 <논어> 첫머리에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논어> 학이편)라는 글귀가 실려 있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글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글(文)은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의 길을 적은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경전만이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바로 글이며 경전입니다. 하늘의 말씀은 인간에게 가장 긴요한 진실과 가장 시급한 삶의 문제들에 대한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입니다.”
요사이 글깨나 쓰는 자들, 한 일이 무엇인가
경전만이 글이라는 류영모의 단언은 머리를 탁 치는 듯하다. 모든 글이 경전만큼의 진실과 경전만큼의 간절함과 경전만큼의 아름다움과 경전만큼의 환함과 경전만큼의 삶과 경전만큼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가. 그것을 되묻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즘 이 사회 지도자들은 대단한 학력과 이력을 자랑 삼는다. 그러나 그 학력과 이력이 이룬 그 몸뚱이는 지금 무엇을 '언행(言行)'하고 있는가.
"공부 좀 하셨습니까. 그 공부는 다 어디 가 있는지요?" 그 말을 류영모는 불쑥 이렇게 질문한다.
"요사이 글자나 알고 글깨나 읽고 책을 써 낸 자들이 한 짓이 무엇입니까?"
# [다석어록]
내 맘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알인 독생자를 믿지 않으면 멸망한 것이다. 위로 거듭날 생각을 안 하니, 그것을 모르니까 이미 죽은 것이다. 몸의 숨은 붙어 있지만 벌써 멸망한 것이다. 이 몸이 죽지 않는다거나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하면 못쓴다. 위로 난 생명(얼나)을 믿어야 한다. 몸이 죽는 게 멸망이 아니다. 벗겨질 게 벗겨지고 멸망할 게 멸망해야 영원한 생명의 씨알이 자란다. 거듭난 생명의 씨알로서 위로 나야 그게 사람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다. 얼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짐승의 새끼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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