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민의 국토관을 대한의 고유 영토 사천리(4000리)에서 삼천리(3000리)로 축소하게 한 원흉은 영토를 한반도로 국한한 헌법 제3조가 아니라 ‘무궁화 삼천리’ 애국가 후렴의 무한 반복 학습이기에 그렇다.
◆명·청시대 모든 문헌, 조선 영토는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
19세기 후반 일제 침략 이전 한국과 중국의 모든 문헌에 우리나라 영토는 사천리로 표기되어 있다.
1) 1593년 (선조 26년) 6월 29일: 조선은 국토의 넓이가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다.
(朝鮮幅圓, 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
2) 1897년 (고종 34年) 9월 29일: 육지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陸地疆土, 延互四千里)
3) 1897년 (고종 34년) 9월 30일 : 우리나라 영토의 넓이는 사천리로서 당당하게 전역을 다스리는 큰 나라 (惟我幅圓四千里, 堂堂萬乘之國)
4)1897년(고종 34년)10월 13일: 사천리 강토에 하나로 통일된 왕업을 세웠으니(幅員四千里, 建一統之業)
중국의 명·청(明淸, 1368~1910년) 시대를 대표하는 총서·사서·지리지 등 문헌에 조선 영토는 ‘동서 이천리, 남북사천리’ 로 기록돼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문헌을 10개만 고른다면 다음과 같다.
①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 1461년
② 『함빈록 咸宾录)』 1598년
③ 『황명경세문 皇明經世文』 1643년
④ 『명사기사본말 明史紀事本末)』 1658년
⑤ 『대청일통지 大清一統志』 1743년
⑥ 『대청만년일통지리전도 大清万年一统地理全图』 1767년
⑦ 『사고전서 四庫全書』 「조선부(朝鲜赋)」 1781년
⑧ 『사고전서 四庫全書』 「외사이관고총서(外四夷馆 考总叙)」1781년
⑨ 『사고전서 四庫全書』 정계양잡저(鄭開陽雜著)조선도설(朝鮮圖說)1781년
⑩ 『광여도전서 廣輿圖全書』(1785년)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닌 삼천리 삼수갑산
삼수갑산(三水甲山)은 어디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하고 추운 산골이라 이르던 함경도 삼수와 갑산지역을 말한다. 삼수갑산은 조선 시대 가장 힘든 귀양지로서 유배형 중에서도 최고형인 ‘유(流) 삼천리(三千里)’ 형벌을 받은 자가 가던 곳이다.
여기서 ‘유(流)’는 ‘유수행야(流水行也)', 물이 한 번 흘러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듯, 중한 죄를 범한 자를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 영원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라는 뜻이다.
『고려사』 형법지 제 5형조엔 유배형을 경중에 따라 이천리, 이천오백리, 삼천리로 구분했다.
① 2000리 유배 +장형(곤장) 17대+ 도형(징역) 1년+ 속전(벌금) 동80근
② 2500리 유배+ 곤장 18대 +징역1년+벌금 동 90근
③ 3000리 유배+ 곤장 20대+징역 1년+ 벌금 동 1백근
고려 시대 유배형은 967년 송나라의 <절장법(折杖法)>을 참조로 하여 독창적으로 제정한 것이나 <절장법>에도 없는 벌금을 부과하여 더욱 무거운 형벌이었다.
조선 시대 들어와 유배형은 더욱 가혹한 형벌이 되었다. 유배형에 징역을 없애고 벌금을 낮추는 대신, 장형을 대폭 강화한 <대명률(大明律)>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곤장 100대를 때린 후 ’2000리 유배+ 벌금 동 30근, 2500리 유배+벌금 동 33근, 3000리 유배+벌금 동36근 부과한 <대명률>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600리, 750리, 900리로 조정했다. 구리가 나지 않기에 벌금을 오승포로 대체했다.
그로부터 1898년 (고종 35년)까지 2000리 유배형은 한양에서 비교적 가까운 강화도 영월 울진 등으로, 2500리 유배형은 강진, 동래, 남해, 거제, 진도, 도초도(신안군)등으로 보내졌다. 가장 중형인 3000리 유배형은 가장 멀고 험한 삼수갑산과 추자도, 흑산도, 제주도 등으로 보내졌다.
<조선 시대 유배형>
① 2000리 유배형: 곤장 100대+ 오승포 360필+600리 유배(강화 영월 울진 등)
② 2500리 유배형:곤장 100대+오승포 330필 + 750리 유배(강진 동래 남해 등)
③ 3000리 유배형: 곤장 100대+ 오승포 300필 +900리 유배(삼수 갑산,흑산,제주 등)
◆‘삼천리’는 영토가 아니라 조선 시대 최악의 형벌 용어
조선 시대 최악의 형벌은 능지처참(凌遲處斬)과 거열(車裂)형이다. 능지처참은 사형수 신체를 산 채로 회 뜨는 잔혹한 형이다. 대역죄, 모반죄 왕실 모독죄를 범한 자에게 행한다. 속칭 살천도(殺千刀)라고 하는데, 1000번 칼질하여 죽인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실제로 죄인에게 6000번까지 난도질을 가한 기록이 있다.
거열형은 사형수의 사지를 소나 말에 묶고 달리는 방법으로 신체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중국 한(漢)대까지 시행되었으나 당(唐)대 이후 능지처참으로 전환됐다.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 세조는 <대명률>에도 없는 거열형을 능지처참과 병행하여 시행했다. 하지만 사형집행관(?)으로 차출된 소나 말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 등 이유로 집행되지 않고 거열형보다 더 잔혹한 능지처참으로 대체됐다.
‘장통불여단통’(長痛不如短痛 긴 고통이 짧은 고통보다 못하다)- 2008년 중국 대륙을 휩쓴 최고 유행가 제목이다. 또한 이 ‘장통불여단통’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백 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라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못지않게 현대 중국인이 자주 쓰는 관용어이기도 하다.
3000리 유배형은 죄인의 목숨을 살려두니 참혹하게 생명을 앗는 능지처참이나 거열형은 물론 참수형이나 교수형보다 가벼운 형벌로 보인다. 하지만 3000리 유배형을 받은 죄수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산채로 수 천 갈래 회를 뜨는 능지처참이나 소나 말로 사지를 찢기는 거열형의 고통도 길어야 반나절이다. 반면, 3000리 유배형의 고통은 죽음만큼 괴로운 고통이 황천을 건너기까지 계속된다.
우선 곤장 100대가 기본이다. 곤장 100대를 맞을라치면 다 맞기도 전에 쇼크로 급사하는 경우가 많다. 삼천리 귀양을 떠나기 전에 황천으로 영원한 유배형을 떠나는 것이다. 유배지에 도달하기 전에 죽거나 그 후유증으로 유배지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곤장 60대만 맞아도 초주검 상태가 됐고, 100대를 맞으면 거의 사망에 이르러 사서에는 장살(杖殺)에 처해졌다고 적고 있다.
곤장 100대를 맞고도 무사히 살아남은 맷집 좋은 자는 머나먼 삼천리 삼수갑산까지 걸어서 가야 했다. 특히 삼천리 유배형을 받은 자는 대개 유배지에서 죽을 때까지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유배지에서 가시덤불로 만든 울타리 안에서 갇혀 살았다. 위리안치(圍籬安置)다.
더군다나 3000리 유배형을 받은 자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사례가 거의 없다. 오히려 유배 중에 사형을 당하는 사례가 많아 항상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일례로 송시열은 당시 82세 고령을 감안 100대 곤장을 면한 3000리 유배형을 받아 제주도로 귀양 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조정은 그를 한양으로 압송했다. 도중에 정읍에서 사약을 먹여 죽였다.
2500리 유배형에 해당하는 강진으로 귀양간 다산(茶山) 정약용은 18년만에 풀려나 고향 남양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반면에 3000리 유배형에 해당하는 흑산도로 귀양 간 다산의 친형 매심(每心) 정약전은 죽을 때까지 풀려나지 못했다. 2000리와 2500리 유배형은 가석방이 가능한 무기징역에 해당한다면 3000리 유배형은 석방의 희망이 없는 종신형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조선왕조실록』(국보 151호)에는 ‘삼천리(三千里)’ 낱말이 모두 292회 나온다. 태종 9회, 세종 9회, 문종 4회, 단종 2회, 세조 16회, 예종 1회, 성종 3회, 연산군 6회, 중종 98회, 명종 22회, 선조 16회, 광해군 16회, 인조 10회, 효종 5회, 현종 12회, 숙종 7회, 경종 1회, 정조 11회, 순조 1회, 고종 10회 합계 259회 전부 삼천리 유배형을 뜻한다. 나머지 33회 (고종 32회, 순종1회)만이 삼천리 영토개념으로 나오는데 모두 1876년(고종 13년)1월 20일 기록 이후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과 함께 조선 3대 대표 사서이나 임진왜란시 불에 타 인조 이후 기록만 남아 있는 『비변사등록』(국보152호)과 『승정원일기』(국보303호)에도 ‘三千里’ 낱말이 각각 48회와 2029회 나온다. 『비변사등록』의 48회 ‘삼천리’ 모두 『승정원일기』의 1791회 ‘삼천리’는 삼천리 유배형을 뜻한다. 나머지 『승정원일기』의 238회(1876년 이후)만 삼천리 영토개념으로 나온다.
◆1876년 1월 20일, ‘삼천리’가 삼수갑산에서 금수강산으로 둔갑한 날
짧은 고통 능지처참 보다 오히려 견디기 힘든 긴 고통 유배형 삼천리가 우리나라 영토의 의미로 사상 처음 사용된 때는 1876년(고종 13년) 1월 20일. 일본의 강압에 의한 불평등조약 강화도 조약 체결 직전이다.
일본이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일에 관하여 대신들과 논의하다
판중추부사 박규수(朴珪壽)가 아뢰기를, "일본이 좋은 관계를 맺자고 하면서도 병선(兵船)을 끌고 오니 그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삼천리’ 강토가 안으로는 정사를 잘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도를 다하여 부국강병해지는 성과를 얻는다면 어찌 감히 함부로 수도 부근에 와서 엿보며 마음대로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고종실록」 1876년(고종 13년) 1월 20일
박규수(1807~1877년)는 제너럴 셔먼 호 사건(1866년)에 당시 평양감사로 공을 세워 대원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한 개화파인데 그가 왜 역사상 처음으로 삼천리 강토라는 용어를 사용했는가는 더 연구해 볼 일이다.
하여튼 이날 이후 ‘삼천리’ 는 ‘삼천리 유형’에서 ‘삼천리 강토’로 둔갑해갔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윤치호(1866~1945년, 애국가 작사자, 일본제국의회 귀족의원 역임) 등을 비롯한 종일매국노들은 물론 일제의 흉계를 알 수 없는 송병선(1836~1905년) 같은 순국지사들도 자주 삼천리 강토를 입에 올렸다.
‘사천리 금수강산’에서 천리나 국토를 참절한 ‘삼천리 강토’ 그 추악한 변신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종일매국노의 선구자격인 일진회장 이용구가 발표한 <일한 합방 성명서>(1909년 12월 4일)에서다.
윤치호가 1909년 11월 이토히로부미 추도위원장을 역임할 무렵 그가 작사한 애국가 후렴 ‘무궁화 삼천리’가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극히 어진 일본 천황 폐하인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2천만 동포를 교화시키고 양육하여 동등한 백성으로 잘 만들 것입니다. 그러니 살래야 살 수 없었던 사람이 이에 새롭게 살 길을 얻게 되며 죽을래야 죽을 수 없었던 사람이 이에 죽을 곳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은 생각하기를 합방을 이룩하는 것은 ‘삼천리’ 강토에 바꿀 수 없는 태산 같은 터전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1909년(순종2년) 12월 4일
일제강점기는 ‘친일 삼천리’ 의 전성시대다. 일제강점기 대표 친일잡지와 문학지 <삼천리>와 <삼천리 문학>이 ‘친일 삼천리’ 시대를 선도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삼천리>의 주요 필진은 김동환, 김동인, 이광수, <삼천리문학>의 필진은 모윤숙, 최정희로 모두 친일인명사전 등재인물이다.
3.1운동 100주년이 저무는 2019년 12월 말 현재 우리는 여전히 국토참절의 주문 ‘무궁화 삼천리’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무궁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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