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그때 한국 왔을 때 홀대받은, 그 시진핑입니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박승준 아주경제 논설고문.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입력 2019-12-19 16:43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박승준 논설고문 [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박승준의 지피지기(知彼知己)]

저의 정치이력은 이렇습니다


나는 1997년 9월 12일부터 18일까지 엿새 동안 열린 중국공산당 제15차 당 대회에서 44세의 나이에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중국 안팎 차이나 워처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당원숫자는 5800만명 정도였고, 이 가운데 선발된 2048명의 대표들이 5년에 한 차례씩 여는 당 대회에서 선출한 중앙위원회 정위원 193명, 후보위원 151명 등 모두 344명 가운데 득표순으로 제일 꼴찌로 겨우 이름을 올렸다고 홍콩에서 발행되어 전 세계 화교들이 보는 아주주간(亞洲週刊)이 보도했다. 이 시사주간은 내 이름 바로 위에 7개월 전에 93세로 세상을 떠난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 동지의 아들 덩푸팡(鄧樸方·당시 53) 동지의 이름도 올랐다고 전했다.

당시 선거방식은 2048명의 당대표들이 각자 344명의 중앙위원 명단을 써내 득표순으로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당 총서기로 두 번째 중앙위원 선거에 후보로 나선 장쩌민(江澤民·당시 71) 동지는 2060표를 받아 두 번째 당 총서기로 무난히 선출됐다. 당 대회는 장쩌민 동지가 제시한 “덩샤오핑 이론의 기치를 높이 들고 21세기로 향하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업을 전면 추진하자”는 구호를 채택했다. 어느 때보다 개혁의 열망이 높았던 15차 당 대회에서 덩샤오핑 동지의 맏딸 덩난(鄧楠·당시 52), 덩샤오핑 동지의 절친 보이보(薄一波·당시 89)의 아들 보시라이(薄熙來·당시 48)를 비롯한 많은 당 원로의 자제들, 아주주간의 표현으로 ‘태자당(太子黨)’들이 중앙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데 실패했다. 나도 경제 담당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習仲勛·당시 84) 동지를 아버지로 둔 태자당이었지만, 득표순 꼴찌로나마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2000년에 47세로 푸젠(福建) 성장으로 발탁돼 중화인민공화국 최초로 40대 성장 시대를 열었고, 현재 총리를 맡고 있는 리커창(李克强) 동지도 45세에 허난(河南) 성장이 되어 나의 강력한 경쟁자가 됐다. 나는 푸저우(福州)시 당서기이던 1995년에 처음으로 한국 여행을 했고, 저장(浙江)성 당서기이던 2005년 7월에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으나 인천공항에 나를 마중 나온 한국 외교부 관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저장성 기업인 350여명을 이끌고 와서 신라호텔에서 투자설명회를 했으나 사전 홍보가 제대로 안 돼 주한 중국대사관에 “사람들을 모아 달라”는 부탁을 해야 했다. 나는 이 투자설명회에서 한국 기업인들에게 “지난 몇 십년간 한국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부상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이며, 우리는 한국의 귀중한 경험을 겸허하게 학습하려 한다”는 연설을 했다. 나는 여의도 쌍둥이 빌딩을 방문해서 LG 구본무 회장(작고)과 만났고, 삼성 윤종용 부회장의 안내로 삼성전자 수원과 기흥공장을 돌아볼 수 있었다. SK 최태원 회장과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도 만났다.

나는 장쩌민 전 당 총서기와 2002년 제16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2007년에 상하이(上海)시 당서기로 선출됨으로써 중국 안팎에 ‘떠오르는 핵심 지도자’로 본격 각인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2007년 10월에 개최된 제 17차 당 대회와 2008년 3월에 개최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에 당선되고, 국가부주석에 임명됨으로써 후진타오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후임자가 될 것이라는 강력한 위치를 확보했다. 중국 행정부인 국무원의 직제에는 일반적으로 ‘부(副)’의 글자를 단 직위에는 대체로 5~6명의 인물들이 직책을 나누어 맡는 것이 보통이지만 ‘국가부주석’만은 단 한 명을 임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국가부주석 자리에 오른 나는 외교 일선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2008년 4월 29일에는 중조(中朝) 수교 60주년을 기념해서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박의춘 조선 부외상을 인민대회당에서 접견하면서 “전통을 계승하고, 미래를 바라보자, 이웃간의 우호 협력을 강화하자”고 말했다.

2009년 부주석 때 방한기억이 생생합니다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가부주석에 오른 나에게 2008년에 맡겨진 중요한 외교행사는 평양과 도쿄(東京), 서울을 차례로 방문하는 일이었다. 평양은 6월 18일에 방문하도록 일정이 잡혔고, 도쿄는 다음해인 2009년 12월 14일부터 3박4일, 서울은 12월 17일부터 19일까지 2박3일이었다. 예정에 따라 나는 평양을 방문했고, 순안공항에서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에 이르는 연도에 수많은 평양 시민들이 나와 꽃술을 흔들며 열광적으로 환영을 해줘서 나는 국가주석에 이미 오른 듯한 착각을 할 정도였다.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 동지와도 회담을 했다. 김정일 동지를 만나서는 후진타오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김 위원장에게 전하라는 안부도 전달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60주년을 열렬히 축하하며, 조선 인민들이 각종 국가건설 사업에서 더욱 커다란 성취를 이루기를 축원한다”는 인사도 했다. 김정일 동지는 “중국공산당과 정부가 사천 대지진의 재난을 극복하고 북경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했다.

국가 간의 외교 교섭은 교섭이 끝난 뒤에도 최소한 30년 정도 비밀로 하게 되어있지만, 싱가포르의 유력 신문 연합조보(聯合朝報)는 나의 도쿄 방문과, 이어지는 서울 방문의 일정 협의에 문제가 생겼다는 보도를 했다. 원래 일본 방문은 12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4일, 서울 방문은 17일부터 19일까지 2박3일로 잡혀있었는데 한국 측이 “이명박 대통령이 17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하도록 예정이 돼있으니 하루 당겨서 16일 시 부주석의 일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조정하자”고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결국 양국 외교부간의 줄다리기 끝에 나의 서울 방문은 16일 밤 도쿄에서 서울에 도착해서 17일 아침에 이 대통령과 조찬을 하는 것으로 조정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나는 서울로 가기 전 도쿄에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당시 총리는 물론 아키히토(明仁) 천황을 만날 수 있었다. 일본 황실의 의전 규칙은, 외국 지도자가 일 천황을 만나려 할 경우 30일 전에 신청을 하도록 되어있었다는데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민주당 간사장이 내가 일본에 도착한 14일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30일 룰이라는 것 누가 만들었느냐, 법률로 정해진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말하면서 “천황폐하의 국사(國事) 행위는 일본 국민이 뽑은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며, 그것이 일본 헌법의 이념이자 정신”이라고 소리쳐서 나의 천황 면담이 성사됐다는 것이 일본 매체들의 보도내용이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내가 도착한 도쿄 거리에는 예상외로 거리마다 오성홍기(五星紅旗)가 걸려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의 서울 방문 일정 조정은 청와대가 이미 열흘 전에 “시 부주석의 방문은 16일부터 19일까지”로 발표를 해버린 마당이라 도쿄에서 16일 밤에 서울에 도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에 서울에 도착해서 신라호텔에 숙소를 정한 나는 다음날 아침 이명박 대통령과 조찬 회담을 했고, 이 대통령은 조찬을 마치고는 곧바로 코펜하겐으로 출국해버렸다. 나는 17일 하루 종일 정운찬 총리와 김형오 국회의장과 만나고, 오찬은 경제 4단체장과 했다. 오찬에는 정몽구 현대기아그룹 회장과 삼성전자 최지성 사장을 비롯한 다수의 그룹 회장들과 만났다. 다음날인 18일 조찬은 숙소인 신라호텔에서 한·중 우호협회회장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그룹 명예회장이 조직한 모임이었고, 박 회장은 조선일보 베이징특파원을 하다가 갓 서울로 돌아온 조선일보 박승준 기자와 참석자 가운데 제일 먼저 악수를 하도록 소개해주었다.

내가 평양이나 도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서울 방문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는 몇십년 뒤에나 공개될 것이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4월 30일 중국 최초의 엑스포가 열린 상하이(上海)를 방문해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만난 바로 사흘 뒤인 5월 3일 김정일 조선노동당 국방위원장이 그동안의 공백을 깨고 베이징(北京)을 방문하는 일이 벌어져 한국정부가 당황해 한 것과 나의 서울 방문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혹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내가 현직에 있으므로 밝힐 때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둔다. 1992년에 중·한 수교가 이뤄진 뒤 10여년 동안 조선 당과 정부의 최고책임자인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베이징을 방문하는 일이 없었고, 2010년 김정일 동지의 베이징 방문이 이뤄진 뒤에는 1년 사이에 세 차례나 김정일 동지가 중국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남아있는 상태다.

제 기억이 어떤 역할을 할지는 비밀입니다

내 기억에 내가 2012년 11월에 열린 18차 당 대회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되고, 이듬해 3월 국가주석으로 임명된 뒤 한·중관계는 크게 개선됐으며, 2015년 9월 3일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베이징에서 열린 반(反)파시스트 전쟁 전승기념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나의 왼편에 서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의 오른편에 섰을 때가 가장 최고조에 도달했던 때가 아닌가 기억한다. 이때 한·중관계가 최고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김정은 동지가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한 것이 큰 배경이 됐다. 김정은 동지가 감행한 그 핵실험은 우리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2012년 11월 당 대회에서 당직 선출을 마치고, 201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과 총리 등 국무원 요직 취임을 앞두고 있던 권력 교체기에 우리의 거듭되는 경고를 무시하고 감행한 핵실험이었다. 우리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김정은 동지가 핵실험을 강행한 이후 조선과 일체의 최고지도자 교류를 끊어버리기로 결정했으며, 그런 결정은 2018년 6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동지를 싱가포르로 초청해서 만나는, 우리에게 “이러다가 북한을 미국에 뺏기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을 안겨주기 전까지 5년 반 동안 지속됐다는 점을 밝혀둔다.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동지의 싱가포르 회담과 하노이 회담에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평가도 역사의 평가로 남겨둘 것임을 이 자리를 통해 밝혀둔다. 조·미(朝·美) 접촉에 대한 우리 중국의 입장은 “조·미 접촉으로 조선반도의 긴장이 완화되는 상황을 우리 중국은 지지한다”는 것임도 분명히 밝혀둔다.

오는 23일 베이징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데 이번 회담에 이상의 내 기억이 어떤 작용을 할지도 비밀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