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그럴 것이,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에서 시작한 파도가 이렇게 클지 누가 감히 예상했을까. 쉽게 예상하기 힘들었던 몇몇 이슈가 당시 야당에 반사이익으로 돌아갔으니, 복을 많이 타고난 사람임은 틀림없다.
이런 입담은 단순히 정권을 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수장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올려 왕의 부덕을 반성했다. 백성의 삶이 피폐해질 것을 걱정해 굴욕적인 화친을 맺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 말로 '경제'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래서 복을 타고났고, 그것도 참 많이 타고났다. 세계 경제성장률은 2013년 2.6%, 2015년 2.8%, 2017년 3.1%를 기록(UNCTAD 기준)했다. 이런 세계 경제의 호황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에겐 반쯤은 거저 먹는 게임 같은 것이다. 세계 경기가 좋으면 이래저래 수출도 좋을 수밖에 없다.
◆5년 탄탄대로 예상했던 경제,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경제
당시 많은 연구소는 세계 경제의 상승 곡선이 이어질 것으로 봤다. '미국이 끓고 있다'는 표현과 함께 양적 완화 종료 문제를 슬슬 거론하기 시작했으니, 세계 경제의 분위기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복 타고난 문재인'은 '참, 복 많이 타고난 문재인'으로 태평성대를 표현하는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그런데 경제라는 게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미국에서 양적 완화 축소(Tapering)를 본격적으로 얘기하자, 신흥국들은 발작(Tantrum)을 일으켰다. 문 대통령보다 몇 달 앞서 태어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무역 전쟁으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웠다. 각국은 위기 극복을 위한 협력보다는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섰다.
우리나라 경제엔 치명타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2.8~3.2%를 왔다 갔다 하던 성장률이 2018년 2.7%, 올해는 2% 안팎으로 뚝 떨어졌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경제 성장 악화의 주요인이 대외 여건에 주로 기인한다는 정부의 해명에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틀린 얘긴 아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격언은 결국 '곳간이 넉넉할 때 흉년에 대비하라'는 얘기다. 경제 언어로 하면 구조조정과 혁신이다. 낭비 요소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미래 먹거리를 찾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옛 선인들의 혜안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를 잘 새기고 실천했는지는 의문이다.
5년짜리 단임 정권의 필연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 대통령 임기 중간에 총선이 맞물려 있어 자신의 지지층에 쓴소리하기 어렵다는 현실도 부인하긴 어렵다. 문 대통령을 포함해 역대 대통령 모두 취임 일성으로 한결같이 '국민의 대통령'을 강조했지만, 실천 여부엔 항상 물음표가 따르는 이유다.
◆부총리의 사과를 믿으려면···
지난 19일, 문 대통령과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2020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했다. 기조에 변화가 있다. 단기든 중장기든 '성장' 자체에 방점이 찍힌 것은 분명하다. 해석은 제각각이다. 문 대통령의 발언과 엮어 기존 기조는 유지하면서 총선용 자료를 냈다는 혹평도 나왔다. 구체성이 떨어진 성장 정책의 내용이 빌미를 제공한 듯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건 홍남기 부총리의 공개적인 사과다. 홍 부총리는 경제정책방향 발표 전날 열린 주요 매체 부장단과의 간담회에서 "내년 경제정책에도 노동 분야 혁신 정책이 미흡했다"고 반성했다. 경제계가 주장해온 직무급제 도입과 노동시장 유연성과 관련한 개혁 과제들이 노동계의 반발로 진전이 없는 데 대한 언급이다.
직무급제 도입과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 방안들은 기본적으로 노사 합의를 전제로 한다. 정부가 딱히 할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방안들이 우리 기업의 경쟁력 확대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논의의 틀을 만들고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 그것이 정부, 특히 고용노동부의 역할이다. 그래서 이날 홍 부총리의 반성문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주무 부처인 이재갑 장관은 분명한 입장을 내놔야 한다. 홍 부총리의 발언이 기업들의 투자를 더 끌어내려는 처지에서 생긴 사탕발림이 아니길 기대한다. 지지층인 노조와 그들의 양보를 끌어내기 어렵다면, 홍 부총리와 이 장관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줄 것도 진지하게 건의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내년 경제정책방향을 보고받으면서 40대 일자리와 제조업 고용 대책을 특별히 주문했다. 대통령도 자신의 주문을 풀기 위한 첫 고리가 강한 지지층인 노조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터이다. 홍 부총리는 내년 1분기 안에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보고했다.
이때까지 노조의 양보를 끌어내지 못하면, 그야말로 총선용 경제정책을 발표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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