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득'이란 말 속에서 배움의 묘리를 발견하다
류영모는 1907년 6월 경성학당을 마친 뒤 경신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이 학교는 류영모가 다니던 연동교회를 교실로 쓰고 있었기에 그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입학 무렵, 경신학교의 전체 학생수는 128명이었고, 급우는 36명이었다. 류영모는 선교사 게일에게서 성경을 배웠고, 밀러 목사에게서 물리를, 그리고 김도희 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경신학교에 들어간 입학생들은 김도희 선생으로부터 한자대자전 한권씩을 받았다. 류영모에게 한자의 문리(文理)가 틔었던 것은 이때였다. 그는 한자의 어원이 소개되어 있는 이 사전을 보물처럼 여겼다. 집에서 혼자 한자공부를 하다가 '습득(習得)'이란 낱말을 곰곰히 들여다보게 됐다. 학문이나 기술을 배워서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지식이 어떻게 사람 속에 들어오는지를 담아놓은 표현이 아닌가. 17세 소년은 이 말이 신기했다. 한자 얻을 '득(得)'자의 자획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이것을 파자(破字)라고 부른다. 그랬더니 일(日)과 행(行), 그리고 일촌(一寸)이 나왔다.
그는 학교에 가서 김도희 선생께 이 발견을 전했다. "그러니까 '득(得)'이란 글자의 어원적 의미는 '날마다 한 치씩 나아간다'는 뜻이 아닐지요?" 파자를 한 내용을 설명하자, 김도희 선생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여줬다. 조선의 대학자 화담 서경덕이 '조삭비(鳥數飛)'를 발견한 것에 비견되는 깨달음이었다. 화담은 소년시절 어린 새가 날마다 조금씩 더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배움이란 저래야 하는구나"라고 무릎을 쳤다. '조삭비'는 새가 (부지런히) 자주 날개를 퍼득여 본다는 의미다.
류영모는 경신학교의 교명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경신(儆新)이란 말은 '깨우쳐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 이 이름은 선교사 게일이 당시 한문에 능통한 김정식·이창식·유성준과 상의한 끝에 지은 이름이었는데, 원래는 '경신(敬神, 신을 경배함)'이란 한자를 검토했다고 한다. 이 말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잠언 1장 7절 -개역성경)"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다가 좀더 대중적인 취지가 담긴 '경신(儆新)'이 채택됐다. 그는 지식의 근본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일임을 평생의 신념으로 삼고 실천했다.
2000년 동서양이 그의 심장 속에서 '합일'
2학년이 될 무렵, 류영모는 '일일역행(一日力行)'이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날마다 힘써 행하자'는 의미의 이 시에는 한자의 어원과 파자(破字)가 많이 활용되어 있다. 17세 때 만난 '한자대자전'의 힘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한자는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생각한 것을 담아놓기 좋아서 뜻을 알기 쉽고 기억하기가 좋지요." 그가 불경과 공맹노장을 넘나들 수 있게된 것 또한 한자에 대한 폭넓은 이해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동양적 사유의 기틀을 갖추고 성경 구절에 담긴 함의를 살폈을 때, 그의 생각의 용광로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의 신앙 속에서 어떻게 천지개벽이 일어났는지 그 종횡무진의 사유(思惟)를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는 '동일(同一)'과 '합일(合一)'의 개념 차이를 설명하면서 "물질적인 것이 같아질 때 동일을 쓰고 정신적인 것이 같아질 때는 합일을 쓴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의 심장 속에서, 2000년 이상 각자 쌓아온 동양과 서양의 신앙적 기틀이 놀라운 '합일'을 찾아가고 있었다.
언드우드가 세운 경신학교와 다석
류영모가 다닌 경신학교는 지금의 경신중고등학교의 모체이며, 지금의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가 경신학교 대학부에서 출발했던 만큼, 유서 깊은 우리나라 근대학교 중의 하나다.
이 학교를 창립한 사람은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Underwood H.G·1859~1916)다. 그는 1885년 이 나라에 들어왔고 그 사흘 뒤에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86년 서울 중구 정동에 살던 집에 딸린 건물을 이용해 '언더우드 학당'을 만들었다. 고아원을 겸한 학교였다.
2000년 동서양이 그의 심장 속에서 '합일'
2학년이 될 무렵, 류영모는 '일일역행(一日力行)'이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날마다 힘써 행하자'는 의미의 이 시에는 한자의 어원과 파자(破字)가 많이 활용되어 있다. 17세 때 만난 '한자대자전'의 힘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한자는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생각한 것을 담아놓기 좋아서 뜻을 알기 쉽고 기억하기가 좋지요." 그가 불경과 공맹노장을 넘나들 수 있게된 것 또한 한자에 대한 폭넓은 이해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동양적 사유의 기틀을 갖추고 성경 구절에 담긴 함의를 살폈을 때, 그의 생각의 용광로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의 신앙 속에서 어떻게 천지개벽이 일어났는지 그 종횡무진의 사유(思惟)를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는 '동일(同一)'과 '합일(合一)'의 개념 차이를 설명하면서 "물질적인 것이 같아질 때 동일을 쓰고 정신적인 것이 같아질 때는 합일을 쓴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의 심장 속에서, 2000년 이상 각자 쌓아온 동양과 서양의 신앙적 기틀이 놀라운 '합일'을 찾아가고 있었다.
언드우드가 세운 경신학교와 다석
류영모가 다닌 경신학교는 지금의 경신중고등학교의 모체이며, 지금의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가 경신학교 대학부에서 출발했던 만큼, 유서 깊은 우리나라 근대학교 중의 하나다.
이 학교를 창립한 사람은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Underwood H.G·1859~1916)다. 그는 1885년 이 나라에 들어왔고 그 사흘 뒤에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86년 서울 중구 정동에 살던 집에 딸린 건물을 이용해 '언더우드 학당'을 만들었다. 고아원을 겸한 학교였다.
언더우드가 당시 조선의 아이들을 살펴보니 거의 기아(棄兒) 상태와 다름없는 신세가 많았다. 우선 그들을 구제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고종에게 이 계획을 제시한다. 왕실의 승낙이 있은 뒤 남학생 40여명을 받아들여 학당을 개교했다. 언더우드 학당을 연 지 4년이 지났을 무렵인 1890년, 언더우드가 일본에 있던 피어슨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이 고아원엔 25명의 남자아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방을 청소하고 자기가 먹을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학교 운영에 필요한 일도 합니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몸차림을 정돈한 뒤 한문 공부를 8시까지 합니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엔 영어와 성경을 공부합니다. 오후엔 주로 놀도록 했고 복습과 한문공부를 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한문은 한국인 교육에서 중요한 과목입니다. 미국의 선교본부에서 이 학교의 예산을 크게 줄인다고 하니 걱정입니다."
언더우드학당은 이후 예수교학당, 민노아학당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유지하다가 1901년 종로구 연지동 연동교회를 교실로 쓰는 경신학교로 출발한다. 경신학교는 배재학당과 더불어 근대교육의 주축을 이루는 학교로 성장한다.
임정 부수석 지낸 김규식을 키운, 언더우드 학당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1881~1950)은 언더우드 학당 출신이다. 8개 국어를 유창하게 했던 어학의 천재는 어떻게 이 학당에 갔을까. 그의 아버지는 민씨정권을 비판하다가 귀양을 갔고, 어머니는 사망하여 고아와 다름없는 처지가 됐다. 그는 영양실조와 열병으로 죽은 아이로 취급받으며 뒷방의 병풍 뒤에 누워 있기도 했다.
그의 숙부가 언더우드 학당을 찾아 아이를 맡기려 했으나 8살이 안 되는 아이는 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후 죽어가는 김규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언더우드가 분유와 약을 들고 강원도로 그를 찾아간다. 언더우드가 도착했을 때, 어린 김규식은 울부짖으면서 먹을 것을 찾으며 벽지를 뜯어먹고 있었다고 한다. 언더우드는 아이를 업고 학당으로 돌아와 그를 살려냈다. 그는 이 학당의 가장 어린 학생이 되었다.
이렇게 성장한 그는 17세 때 미국에 건너가 버지니아주 로녹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05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에서는 박사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그는 "조국의 앞날이 걱정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귀국했다고 한다. 이후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경신학교 일을 돕기도 했지만, YMCA학교 학생부 담당과 학감을 맡아 분주하게 일했다.
3·1운동을 촉발한 정재용과 다석
1907년 17세로 입학한 류영모는 경신학교에서 9살 위인 26세의 유학생 출신 김규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교유를 한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류영모는 재학 중 교장의 명으로 오산학교 교사로 가는 바람에 경신학교 졸업생이 되지는 못했다. 당시 경신학교에는 다석보다 한 학년 아래에 정재용(1886~1976)이 있었다. 이 이름이 혹시 생소할지 모르지만, 사실상 탑골공원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분이다. 탑골공원 내의 비석에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정재용의 동상이 있고 비문도 새겨져 있다.
류영모보다 네 살이 많았던 정재용은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해주 의창학교 교감을 지냈는데 이때 기미년을 맞았다. 그는 연락을 받고 3월 1일 파고다공원에 왔는데 약속을 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민족대표들이 약속을 바꾸어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긴 것을 몰랐던 것이다. 정오를 알리는 오포 소리가 울렸는데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모였던 수천명의 군중들이 웅성거리며 흩어지려 했다. 그때 정재용이 분연히 앞으로 나와 팔각정으로 올라갔다. 그는 품속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2월 26일 고성관에서 2만1000장을 인쇄하여 전국으로 배포하고 남은 한 장이었다. 선언서를 읽고 나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갑자기 파고다공원의 군중들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33인을 대신해 뜻밖의 사람이 이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다.
류영모는 고양군 벽제면 웃골에 있는 동광원에 들를 때면 꼭 학교 후배인 정재용을 찾았다. 해주 출신인 정재용은 자신을 수양산인이라 자칭하기도 했다.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씹으며 절조를 지킨 백이숙제의 자부심과 고향의 수양산을 함께 새긴 것이다. 다석일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1972년 11월 17일 수양산인장(莊) 정재용 선생 경심(敬尋, 옷깃을 여미며 찾아뵙다)" 1976년 정재용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부음이 실린 신문기사를 오려서 평생 애지중지하던 '한자대자전' 표지 안쪽에 붙여넣고는 타계한 시간을 적어놓았다. 평생 지기(知己)를 잃은 아쉬움은 간결하게 거기 담겼을 것이다.
# 다석어록 : 자각 없는 학문은 노예짓에 불과하다
학문의 시작은 자각(自覺)부터다. 자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학문이 많다고 해도 그것은 노예에 불과하다. 우선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을 들고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씀과 같다. 거울 경(鏡)이 말씀 경(經)이다. 이 거울 속에 참나(얼나)가 있다. 말씀이 바로 참나이다. 말씀을 풀어보는 동안에 붙잡히는 것이 진리인 이치요 참나인 정신이다. 우리가 할 것은 가온찍기(내가 깨어나는 순간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에 점을 찍는 것)밖에 없다. 점을 찍는 것은 생각 속에 말씀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참나를 무시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기막히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참나처럼 값비싼 것이 없는데 이를 무시하고 덧없이 살고 있다(1956).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이 고아원엔 25명의 남자아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방을 청소하고 자기가 먹을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학교 운영에 필요한 일도 합니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몸차림을 정돈한 뒤 한문 공부를 8시까지 합니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엔 영어와 성경을 공부합니다. 오후엔 주로 놀도록 했고 복습과 한문공부를 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한문은 한국인 교육에서 중요한 과목입니다. 미국의 선교본부에서 이 학교의 예산을 크게 줄인다고 하니 걱정입니다."
언더우드학당은 이후 예수교학당, 민노아학당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유지하다가 1901년 종로구 연지동 연동교회를 교실로 쓰는 경신학교로 출발한다. 경신학교는 배재학당과 더불어 근대교육의 주축을 이루는 학교로 성장한다.
임정 부수석 지낸 김규식을 키운, 언더우드 학당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1881~1950)은 언더우드 학당 출신이다. 8개 국어를 유창하게 했던 어학의 천재는 어떻게 이 학당에 갔을까. 그의 아버지는 민씨정권을 비판하다가 귀양을 갔고, 어머니는 사망하여 고아와 다름없는 처지가 됐다. 그는 영양실조와 열병으로 죽은 아이로 취급받으며 뒷방의 병풍 뒤에 누워 있기도 했다.
그의 숙부가 언더우드 학당을 찾아 아이를 맡기려 했으나 8살이 안 되는 아이는 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후 죽어가는 김규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언더우드가 분유와 약을 들고 강원도로 그를 찾아간다. 언더우드가 도착했을 때, 어린 김규식은 울부짖으면서 먹을 것을 찾으며 벽지를 뜯어먹고 있었다고 한다. 언더우드는 아이를 업고 학당으로 돌아와 그를 살려냈다. 그는 이 학당의 가장 어린 학생이 되었다.
이렇게 성장한 그는 17세 때 미국에 건너가 버지니아주 로녹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05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에서는 박사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그는 "조국의 앞날이 걱정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귀국했다고 한다. 이후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경신학교 일을 돕기도 했지만, YMCA학교 학생부 담당과 학감을 맡아 분주하게 일했다.
3·1운동을 촉발한 정재용과 다석
1907년 17세로 입학한 류영모는 경신학교에서 9살 위인 26세의 유학생 출신 김규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교유를 한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류영모는 재학 중 교장의 명으로 오산학교 교사로 가는 바람에 경신학교 졸업생이 되지는 못했다. 당시 경신학교에는 다석보다 한 학년 아래에 정재용(1886~1976)이 있었다. 이 이름이 혹시 생소할지 모르지만, 사실상 탑골공원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분이다. 탑골공원 내의 비석에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정재용의 동상이 있고 비문도 새겨져 있다.
류영모보다 네 살이 많았던 정재용은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해주 의창학교 교감을 지냈는데 이때 기미년을 맞았다. 그는 연락을 받고 3월 1일 파고다공원에 왔는데 약속을 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민족대표들이 약속을 바꾸어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긴 것을 몰랐던 것이다. 정오를 알리는 오포 소리가 울렸는데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모였던 수천명의 군중들이 웅성거리며 흩어지려 했다. 그때 정재용이 분연히 앞으로 나와 팔각정으로 올라갔다. 그는 품속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2월 26일 고성관에서 2만1000장을 인쇄하여 전국으로 배포하고 남은 한 장이었다. 선언서를 읽고 나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갑자기 파고다공원의 군중들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33인을 대신해 뜻밖의 사람이 이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다.
류영모는 고양군 벽제면 웃골에 있는 동광원에 들를 때면 꼭 학교 후배인 정재용을 찾았다. 해주 출신인 정재용은 자신을 수양산인이라 자칭하기도 했다.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씹으며 절조를 지킨 백이숙제의 자부심과 고향의 수양산을 함께 새긴 것이다. 다석일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1972년 11월 17일 수양산인장(莊) 정재용 선생 경심(敬尋, 옷깃을 여미며 찾아뵙다)" 1976년 정재용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부음이 실린 신문기사를 오려서 평생 애지중지하던 '한자대자전' 표지 안쪽에 붙여넣고는 타계한 시간을 적어놓았다. 평생 지기(知己)를 잃은 아쉬움은 간결하게 거기 담겼을 것이다.
# 다석어록 : 자각 없는 학문은 노예짓에 불과하다
학문의 시작은 자각(自覺)부터다. 자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학문이 많다고 해도 그것은 노예에 불과하다. 우선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을 들고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씀과 같다. 거울 경(鏡)이 말씀 경(經)이다. 이 거울 속에 참나(얼나)가 있다. 말씀이 바로 참나이다. 말씀을 풀어보는 동안에 붙잡히는 것이 진리인 이치요 참나인 정신이다. 우리가 할 것은 가온찍기(내가 깨어나는 순간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에 점을 찍는 것)밖에 없다. 점을 찍는 것은 생각 속에 말씀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참나를 무시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기막히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참나처럼 값비싼 것이 없는데 이를 무시하고 덧없이 살고 있다(1956).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