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1978)
# 영화 '삽질' 개봉으로, 문득 떠오른 정희성의 시
지난 달 개봉한 영화 '삽질(김병기 감독)'은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의 문제를 파헤친 추적 다큐다.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전 정부의 치수 관련 토목사업을 작심하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강바닥을 파헤치고 시멘트를 비빈 삽의 역할이, 굴착기를 비롯한 대형 중기계에 비한다면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 사업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것이었는가를 말하기 위해 감독은 '삽질'이란 제목을 달았을 것이다.
영화는 뜻밖에 1980년대에 노래로 만들어져 대학가에 메아리치던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의 시(詩)로 비교적 서정적인 운동권 가요다)'를 떠오르게 했다. 그와 함께 과연 우리에게 이미 한참 낯설어진 '삽'이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삽질이란 삽으로 하는 노동을 표현한 말이기 때문이다.
한때 삽은 농부의 상징이었다. 무논(모내기 시절 물이 찬 논)을 관리하는 도구로 이보다 간편하고 소중한 것은 없었다. 거름이나 재(이것도 거름으로 썼다)를 퍼내고 논밭의 흙을 뒤집고 논두렁과 밭두렁을 정리하며, 도랑의 물꼬를 트는 일은 이것이 도맡았다. 죽은 이의 관짝을 향해 흙을 던지는 것도 삽이었고 마지막으로 흙냄새 가득한 새 무덤을 삽뒤로 툭툭 치는 풍경도 일상이었다.
# 삽은 농경시대 온국민의 손발같은 존재였다
물건에서 느꼈던 농민들의 애착과 연민을 인상적으로 드러낸 시가 있었다.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정진규의 시 '삽' 중에서
순수 농경사회에서 다른 산업이 생기면서 삽은 재빨리 그 노동현장에 투입됐다. 자갈과 모래, 시멘트를 퍼내는 건설업, 강을 내고 다리를 만드는 토목업, 석탄을 캐서 담는 석탄산업, 폐기물을 버리는 곳에도 삽이 쓰였다. 제설용으로도 삽은 여전히 요긴하다. 군대에서도 야전삽이란 이름으로 침상 머리맡에 걸려 있다.
농업국가의 제1의 노동용구이던 삽은, 산업화 바람과 함께 슬그머니 사라지는 운명을 겪는다. 아주 사라진 건 아니지만 주연급에서 빠지면서 홀대를 받게 된 것이다. 아주 중요한 일이던 삽질은 허드렛일로 치부되고, 삽은 노동 대비 산출이 형편 없는 물건으로 주저앉는다.
# 산업화에 따라 퇴물로 취급된 삽의 비극
정호승은 이 시절의 기분을 '흰 삽'이라는 시에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이 삽을 버리고/포크레인으로 무덤을 파기 시작한다/새벽부터 산꼭대기까지 기어올라와/포크레인이 공룡처럼 으르렁거리며 산을 무너드린다...포크레인에 짓이겨진 어린 진달래여/아버지의 죽음에는 삽이 필요하다/줄담배를 피우며 비오는 날마다/흙이 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저 곤고한 아버지의 삽질을 위해/삽으로 파묻는 죽음의 따스한 손길을 위해'
무덤을 파고 덮던 삽을 대신하여 포크레인이 등장한 것에 대한 비감이다. 죽은 자를 배웅하는 일조차도 무지막지하고 삭막해진 현실을 담았다. 거대한 포크레인 삽날에 비해 삽은 얼마나 인간적이었던가.
삽질이란 말의 의미가 거룩한 의미를 잃어간 것은, 농경의 퇴조에 따른 삽의 '실업'과도 관련이 깊다. 이제 '삽질'은 삽과 노동을 조롱하는 용어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 의미는 '쓸데 없는 일을 하다'는 말로 옮겨갔다. 왜 삽질이 쓸데 없는 일인가. 본질적인 문제는 탈농(脫農)에 있지만, 그로 해서 쓰임새가 줄어들었는지라 삽이 엉뚱한 일에 곧잘 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태만함을 경계하고 규율을 세우기 위해 필요도 없는 삽질(예를 들면 땅을 파게 하고 곧바로 그것을 메우게 하는 따위)을 시키는 것이 이 낱말을 크게 오염시켰다.
또 건설 토목업 자체에 대한 비하적 표현으로도 '삽질'이란 말이 쓰인다. 영화 '삽질'이 등장한 것은 '토목대통령'이라 불렸던 MB정부를 일격에 날리는 가차없는 비판이다. 농경시대의 총아였다가 이미 퇴물이 되어있는 '삽'이, 이렇게 느닷없이 거대한 활자로 부각된 것도 기이한 일이다.
# 농경(農耕)에서 산업화로 전이되는, 전환기의 삽
'삽질'이란 말이, 가장 낮은 노동의 상징으로 호명되면서도 그 가장 낮은 삶에게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연장'으로 인식되던 전환기적 시각을 보여준 시가 바로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아닐까 한다.
강에 삽을 씻는 장면은 이미 농경의 풍경이 아니다. 건설노동자이거나 공장노동자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이 화자는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말을 쓰고 있다. 농민은 대개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노동을 하지만, 노동자들은 집단으로 일을 한다. 하루 종일 노동에서 썼던 삽을 저마다 들고 나와 강에서 그것을 씻는 일은, 퇴근 직전의 마무리 일이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우리'도 물과 같다고 생각한 까닭은, 시간이라는 흐름에 따라 정해진 노동을 어김없이 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흘러들어오는 물이며 저녁에는 흘러나가는 물이다. 삽을 씻고 있지만 사실은 삽에 묻은 노동의 슬픔을 퍼내는 중이다. 어둠이 올수록 강은 더 깊어지고 그처럼 강에 선 자신들은 강 깊숙이 주저앉는 듯한 착시가 있다. 일을 하는 것은 집단이지만, 퇴근 직전 제각각 쭈그려앉아 담배를 피우는 것은 더욱 왜소해진 개인이다.
# 노동자의 삽은, 흐르는 하루의 밥벌이 무기
농사를 짓는 인간은 삽이 요긴하긴 하지만, 삽만 붙들고 있진 않는다. 하지만 노동자는 업무를 분업하는지라 하루 종일 삽자루만 쥐고 있으며 몇년째 삽자루만 쥐고 있기도 하다. 농민은 삽을 이용하는 주체였지만, 노동자는 삽자루에 자신의 삶을 맡긴 노예이다. 하루하루 쌓이는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흘러가는 삶인지라 저 저물어가는 강물이 스스로의 운명같아 보이는 것이다. 삽을 씻지만, 이 무기력감과 허탈감, 박탈감 같은 것은 씻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썩은 샛강바닥 물결에 문득 달이 떴다. 강물이 썩은 것은 산업화의 자취다. 자신들 또한 저 강물처럼 썩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책하려는데, 그 강물 위에 맑고 환한 달이 떠서 출렁거리는 것이다. 썩은 물에 뜬 달이, 시인을 화들짝 놀라게 한다. 노동자인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리가 노동을 하는 뜻이, 나 편하고자 하고 나 대접받고자 한 게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저토록 밝고 맑은 달이기 때문이 아니던가. 내 아내, 내 새끼, 내 어머니. 나를 기다리는 그 달맞이같은 얼굴들.
문득 정신을 차려, 섣부른 애상을 씻어내듯 서둘러 삽을 씻는다. 더 저물기 전에 배고픈 녀석들을 위해 뭐라도 사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내며 말이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가족의 '달'인 내가 달려가야 한다. 이 반전이 대견하거나 정상적이라는 기분을 낳았더라면, 시는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읽혔을지 모른다.
# 삽자루에 기댄 아버지의 강에 뜬 달
서둘러 삽을 씻는 노동자들의 풍경이 어두운 강물 속에 파묻히면서 긴 출렁임을 낳는 여운이 까닭도 없이 짙다. 이 시는 삽자루에 기댄 고단한 전시대 산업화의 초상으로 걸려있다. 이미 오래전에 흘러간 아버지들의 얼굴로.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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