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튀니지에 머물러 있었지요. 오늘은 튀니지를 떠나 시칠리아로 건너가겠습니다. 튀니지에서 200여㎞ 떨어진 시칠리아는 밤 페리를 타고 한숨 자고 나면 닿습니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입니다. 제주도의 열네 배나 됩니다. 높은 산과 그 사이에 펼쳐진 구릉과 평원이 바다와 어우러져 만들어낸 풍광이 기막히다고 합니다. 여러 날을 머물며 시칠리아를 돌아본 후 <이탈리아 여행>(안인희 역, 지식의 향연)에 시칠리아의 아름다움과 역사와 전설에서 문학적 영감을 받았다고 토로한 괴테는 이런 감상도 남겼습니다. “이제 남쪽에는 내 그리움의 대상이 더는 없어요. 바다와 섬들은 내게 즐거움과 고통을 주었고, 나는 만족하여 돌아갑니다.” 시칠리아를 봤으니 더 볼 것이 없다는 괴테의 길고 아름다운 여행기를 더 많이 옮기지 못하는 건 나의 고통입니다.
시칠리아를 상상하자니 피에트로 마스카니(1863~1945)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합창곡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의 풍성한 연주가 머릿속에서 울립니다. 괴테가 묘사한 시칠리아의 구릉과 그 사이에 펼쳐진 아름다운 평원에 부활절 아침 교회 종소리로 시작되는 이 합창이 그득 퍼져나갑니다. 이 곡을 들으면 언제나 봄날 훈풍 속에 있게 됩니다. 기분 좋은 그 바람에는 꿀 내음 같은 달콤함과 미소를 띠게 하는 향기가 살짝살짝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오페라는 질투와 복수, 결투와 살인으로 이어지는 멜로극이자 치정극입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우리말로 ‘시골 기사(騎士)’쯤으로 번역될 터인데, 19세기 시칠리아의 농촌이 무대인 이 오페라에 말 탄 기사는 안 나옵니다. 시골 마부는 나옵니다. 주인공은 군에 간 사이 애인 롤라가 마부 알피오와 결혼해버린 ‘불행한’ 청년 투리두입니다. 제대한 투리도는 새로운 애인 산투차와 사귀지만 롤라를 잊지 못합니다. 옛 애인과 그의 밀회는 새 애인에게 들통 나고, 새 애인은 알피오에게 이를 일러바칩니다. 두 남자는 결투를 벌이고, 투리두는 결투 끝에 알피오의 칼에 찔려 죽습니다. 둘 다 기사와는 거리가 먼 존재이나 ‘사랑’에 목숨을 거는 ‘사나이’들의 모습을 이미 사라진 ‘기사도’에 빗대어 찬양했다나, 비꼬았다나 라고 한 해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곡은 당시 로마의 한 부자가 이탈리아의 청년 음악가들을 상대로 주최한 단막극 오페라 현상 공모 당선작입니다. 마감 두 달 전에야 공모가 있는 걸 안 마스카니는 서둘러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시칠리아에서 널리 알려진 같은 이름의 원작 소설을 친구인 대본작가에게 주고는 하루하루 ‘쪽대본’을 받아가며 간신히 마감 날에 완성해 접수시켰습니다. 같은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가 두 곡 더 출품됐으나 심사위원들은 마스카니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았습니다.
1890년 로마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는 즉시 전 이탈리아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만 마스카니가 죽을 때까지 14,000회나 무대에 올랐으며, 세계 최대 공연시장인 미국에서도 흥행에 대성공했습니다. 이 오페라는 보통 루지에로 레온카발로(1857~1919)의 ‘팔리아치’와 함께 공연됩니다. 1892년 초연된 ‘팔리아치’도 서커스단에서 피에로 역할을 맡은 남자 주인공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은 아내의 사랑을 되찾으려다 실패, 아내를 찔러 죽인다는 치정극입니다.
요즘 들어 시칠리아의 역사와 문화, 풍광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한국인에게 시칠리아는 먼저 ‘마피아’로 다가왔을 겁니다. 1960년대의 대표적 ‘필름 느와르’로 꼽히는 장 가방과 알랑 드롱 주연의 ‘시실리안’에 이어 1970년대의 명화 ‘대부(代父, 갓파더)’ 시리즈는 우리에게 마피아라는 범죄조직이 시칠리아에서 태동됐고 시칠리아는 마피아의 손에 움직여왔다고, 시칠리아 주민들은 공적 사법체계보다는 마피아의 판단에 삶을 의지해 왔다고 알려줬습니다.
대부 시리즈 3편 마지막 장면은 시칠리아의 포르자 다그로라는 곳에서 찍었습니다. 이곳의 유서 깊은 오페라 극장에서 가족과 함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보고 나오던 뉴욕 마피아의 대부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가 연기했습니다)가 반대파에게 잔인한 복수를 당하는 장면입니다. 뉴욕 암흑가를 평정하면서 수많은 적들을 죽여 온 그는 시칠리아까지 쫓아온 반대파의 저격으로 외동딸과 함께 총을 맞지만 그는 살아나고 사랑하는 딸은 죽습니다. 이때 배경 음악으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이 흐릅니다. 감미롭고 평화로운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와는 달리 어둡고 묵직한 곡입니다. 죽음의 분위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1980년에 개봉된 영화 ‘분노의 주먹’에도 이 음악이 흐릅니다. 대부 시리즈 2편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이 영화에서도 마피아가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이 때문에 나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없이는 시칠리아를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칠리아가 한때 지중해의 다양성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아름다운 섬 곳곳에 가득한 문화유산을 구경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시칠리아와 튀니지는 지각변동으로 지중해가 갈라놓기까지는 붙은 땅이었다고 합니다. 시칠리아 산꼭대기 동굴에서 아프리카 코끼리의 상아가 발견되기도 했으니까요. 이 때문에 튀니지와 시칠리아를 묶어서 여행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랜 세월 두 곳이 역사적(카르타고와 그리스 식민지 사이의 전쟁,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 노르만 족의 상륙, 아랍의 지배 등)으로, 종교적(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 등)으로, 인종적(라틴, 아랍, 노르만 족, 흑인, 그리스인 등등)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뒤엉켜 놀라운 다양성을 이뤘으니 이왕 나선 길에 두 지역을 비교해보려는 사람들입니다.
튀니지 여행 때처럼 이번에도 로버트 카플란의 여행기 <지중해 오디세이>(이상욱 역, 민음사)의 안내를 받아 시칠리아를 살펴볼 생각입니다. 그는 약 반 세기 전에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구에서 배를 타고 겨울 바다를 건너 튀니지를 여행하고 다시 배편으로 시칠리아-유럽으로 건너왔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일곱 곳이나 품은 시칠리아를 두루 다니며 이곳 역사와 문화의 다양성을 확인한 그는 특히 시칠리아의 수도 팔레르모의 팔라티네 성당(1140년 봉헌)을 그 결정체라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은 이 성당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보석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슬람풍의 종유석 천장 아래에는 비잔틴의 그리스 정교회 성화(聖畫)와 라틴어로 새겨진 비문이 줄지어 있었다. (중략) 성당을 봉헌할 그 당시는 무슬림 침모들이 노르만 왕이 입을 예복에다 아랍어 글씨로 된 기독교 텍스트를 수놓던 시절이요, 함대 사령관은 그리스인이고 (시칠리아 동남쪽) 시라쿠사의 주교는 영국인이며, (시칠리아 서쪽) 아그리젠토의 주교는 헝가리인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슬람 양식으로 된 튤립 모양의 돔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탑을 가진 팔레르모의 노르만 교회들은 절제와 관능의 놀라운 결합체이며, 그 도시의 과장된 바로크 양식 건물들 사이에 우뚝 서 있다. 산조반니델리에레미티(‘은둔자들의 성 요한’)라는 이름의 수도원 정원은 온통 아랍 풍 아치와 가느다란 로마네스크 풍 기둥으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마치 금방 떠나온 튀니지의 시디부사드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시칠리아와 튀니지 사이의 거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시디부사드는 튀니지의 옛 도시로 문화 유산이 모여 있는 관광지입니다.
카플란은 이런 역사적 사실과 문화 유산을 들어 “시칠리아의 역사에서, 혹은 중세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시기는 12세기였다. 당시 시칠리아 통치자 루지에로 2세가 더 오래 살고, 그 후손들이 왕통을 둘러싼 음모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21세기의 주요 화두인 다문화주의가 훨씬 이전에 (지구촌의)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합니다. 루지에로 왕가가 몰락한 후 시칠리아의 왕관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의 손을 거친 후 프랑스의 앙주 왕조로 돌아갔는데, 그들은 루지에로 2세와 그 후손들보다 훨씬 덜 개명된 권력자들이어서 자신들의 이익만 챙겼을 뿐 사회를 이루는 다른 인종, 다른 종교 다른 문화에는 관심을 돌리지 않아 그 빛나던 시칠리아의 다양성이 퇴색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들로부터 시작된 분열과 차별이 오늘날 유럽 전역에 퍼진 종교와 인종 간 갈등을 초래했다고 비판한 겁니다.
카플란은 마피아의 발생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루지에로 치하의 짧은 황금시대가 끝난 후 시칠리아는 수백 년간 외세의 점령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빈곤퇴치 제도나 민족의식의 발전이 저해됐으며, 범죄보다 더 위협적인 무질서 상태가 이어졌다. 그래서 비공식적인 보호 수단이 필요해졌고 범죄 조직(마피아)이 생겨나게 됐다.”
시칠리아는 ‘아메리카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2차 대전 말기에 패튼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시칠리아에 상륙, 독일군을 몰아냅니다. 해방된 시칠리아 사람들은 미군을 환영하면서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인 에스프레소를 대접합니다. 난생 처음 마셔본 에스프레소의 쓴 맛에 놀란 미군들은 여기에 물을 타서 마십니다. 그게 요즘 커피숍에서 파는 ‘아메리카노’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군들은 또 우유를 타서 부드러운 ‘카푸치노’에도 맛을 들였는데, 아침에만 카푸치노를 마시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벌건 대낮이나 한밤중에도, 즉 시도 때도 없이, 카푸치노를 주문하는 미국관광객들 덕분에 돈을 벌면서도 속으로는 그들을 커피를 마실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비웃는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습니다. 시칠리아 이야기는 한없이 계속할 분들이 많을 것 같아 오늘은 여기서 그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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