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재벌이냐?’ 196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필자가 딱지치기나 구슬놀이를 하며 많다고 자랑하던 동무에게 흔히 하던 말이다. 당시에 이병철씨가 삼성물산이나 제일모직 등의 기업에 성공하며 한국에도 재벌이 생기던 시절이었다. 재벌이라는 어휘는 지금도 한국의 경제와 사회를 말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이다.
재벌의 한자는 財閥이다. 財는 재물을 가리키며, 閥은 힘이 있는 가문이다. 벌자는 門과 정벌(征伐)하다는 어휘 伐의 합성어이다. 그렇다며 이 어휘의 국적은 어디인가? 한자로 되어 있어 중국어로 생각하기 쉽지만, 중국어사전을 보면 일본어라고 되어 있다. 재벌가문을 가리키는 중국어휘는 대반(大班)으로 광둥어 발음으로 타이판(taipan)이라고 한다. 재벌을 가리키는 영어는 타이쿤(tycoon)인데, 이 또한 중국어가 아니라 일본어휘 대군(大君)의 영어식 발음이다.
재벌이라는 말 그 자체가 일본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전후로 전해진다. 그러나 한 가문이 출자하여 이룬 큰 기업집단이라는 의미에서의 일본재벌 원형은 소위 ‘3대 재벌’인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이다. 이들 가문이 사업을 시작한 시점은 1868년에 있었던 메이지(明治)유신 전후이다. 사무라이들이 지배하던 에도 시대가 끝나고 근대화를 추구하는 메이지정부가 탄생하던 시기의 시대적인 분위기와 메이지정부의 식산흥업(殖産興業)이라는 산업진흥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에서 삼성, 현대와 같은 재벌이 5·16군사정변 후의 산업화 흐름 속에서 발흥한 것과 유사한 이치이다.
일본재벌의 대표는 뭐니뭐니해도 미쓰이를 먼저 들어야 할 것이다. 미쓰이재벌은 에도 시대의 상인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라는 사람이 지금의 도쿄 한복판에 에치고야(越後屋)라는 직물상회를 연 것이 시작이었다. 이 상호가 나중에 미쓰코시(三越)로 바뀌게 된다(지금의 미쓰코시백화점).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미쓰이재벌의 시작은 상업과 금융업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1876년에 미쓰이은행와 미쓰이물산으로 발전하게 된다.
미쓰이가 제조업이나 중공업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는 메이지정부가 관영공장이나 광산 등의 산업시설을 민간에 팔어 넘기는 불하(払下げ) 덕분이었다. 이 불하를 받은 기업들이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에 다수의 새로운 산업에 진출하고 기업 흡수합병을 통하여 일본 최대의 재벌로 발전하게 된다. 일본이 제2차 대전에 패배하고 도쿄에 진주한 연합군사령부가 재벌 해체를 단행했을 당시에 미쓰이재벌의 경우에 278개의 계열회사를 가지고 있었다.
미쓰이와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중요한 개념의 하나는 정치상인, 즉 정상(政商)이다. 새롭게 일어난 메이지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와준 미쓰이는 정권과 비즈니스를 연결하는 정상들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 그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이다. 메이지시대의 주요 정치가의 한 사람이었던 이노우에는 1873년에 미쓰이재벌로 하여금 제1국립은행을 설립하게 하였다. 이 국립은행은 1902년에는 제일은행이라는 민간은행이 되어 당시 식민통치 아래에 있었던 조선의 경성에서 화폐를 발행하는 은행으로 기능하게 된다. 그 자리에 설립된 건물이 현재의 한국은행의 본관이다.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쉽게 접하게 되는 것은 미쓰코시(三越)와 이세탄(伊勢丹)이라는 백화점일 것이다. 이 백화점들이 주는 이미지는 미쓰이가 상업과 금융에만 치중하는 재벌이라는 편견을 심어주기 쉽다. 그러나 미쓰이그룹에는 조선과 중공업으로 유명한 이시카와지마하리마(IHI), 도시바와 같은 중공업, 중전기 회사가 있었으며, 최근에는 항공기소재 섬유 생산으로 유명한 도레이, 그리고 도요타자동차 등의 기업들이 속하고 있었다.
<미쓰비시 재벌>
미쓰이 재벌이 상업과 금융업으로 기초를 닦은 데 비하여, 미쓰비시는 처음부터 정부와의 사업에서 성공한 기업이다. 미쓰비시를 창업한 사람은 지금의 고치현 출신의 이와사키 야타로라는 사람이다. 그는 1873년에 도사번(지금의 고치현)의 운송선을 대신 운영하는 해상운송업을 시작하여 1875년에 우편기선회사를 만든다. 이 회사는 메이지정부의 정책에 부응하여 미쓰비시상사(1875년에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라고 개칭)로 개칭, 이후 메이지정부의 보호를 받고 1874년에 있었던 대만 정벌, 그리고 1877년의 서남전쟁에 병력을 나르는 등 관영해운업에서 독점적 지위를 구축하였다. 1886년에는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운송업인 해운에 이어 무역은행, 보험, 광업 등에 걸치는 재벌의 지위를 구축한다. 그리고 1887년에 관영 나가사키조선소를 불하 받아 중공업에 진출하게 된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연합국사령부가 실시한 재벌 해체 당시, 미쓰비시그룹에 속하던 회사는 189개였다.
태평양전쟁에 동원되었던 항공모함, 제로전투기는 물론, 전후 일본이 발사한 로켓과 인공위성 등은 모두 미쓰비시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미쓰비시의 기업문화는 매우 독특하다. 즉, 민간이면서도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풍토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세개의 다이아몬드(三菱)'라는 의미의 사명을 가진 계열사들의 본사는 거의 모두가 도쿄역 서편의 요충지인 마루노우치(丸の内)에 몰려 있는데, 그 연유는 그 땅을 메이지정부로부터 싸게 불하받았던 것이다.
초창기부터 “미쓰비시는 이와사키가문의 것이 아니라 국가사회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깊이 침투해 있었고, 전후의 시기에도 “미쓰비시는 국가다(三菱は国家なり)"라는 풍토가 남아 있다. 따라서, 다른 기업보다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풍토가 강한 미쓰비시의 구성원들은 결속력이 강하다. 그 예로, 미쓰비시의 모든 행사에서는 오직 계열사인 기린맥주가 만드는 주류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스미토모그룹>
스미토모 그룹의 시원은 구리광산업이다. 일찍이 1690년에, 지금의 시코쿠의 에히메현에 있는 벳시구리광산(別子銅山)을 개발하여 1973년까지 무려 280년 동안 매년 70만t의 구리를 채굴하여 부를 형성한 것이다. 역사로 본다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재벌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스미토모 마사토모(住友政友)라는 사람이 교토에서 책이나 약을 취급하던 상점에서 시작하여 광산업 그리고 무역으로 확장한 스미토모재벌은 지금도 일본 간사이(関西)의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쇼와(昭和)시대로 접어 들어 화학, 금속광산, 전기공업, 시멘트 등으로 확장한 스미토모그룹의 계열사로 해외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기업은 일본전기(NEC)라고 할 수 있다.
스미토모는 여러 면에서 정권과 가까웠던 미쓰이나 미쓰비시에 비하여 정권과 비교적 소원한 재벌이었다. 우선은 에도시대의 하류무사였던 창업자 스미토모 마사토모가 승려로 변신하였다가 다시 책방 겸 약방 사업으로 비즈니스에 투신한 사람이라는 역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후에 더 중요한 계기로, 메이지유신으로 나타난 새로운 세력이 막부가 가지고 있던 특권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토지소유권과 광산채굴권을 몰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때 위기를 극복한 것이 스미토모가문이 아니라 반토(고용 CEO)를 맡고 있던 히로세 사이헤이(広瀬宰平)였다. 전문경영자의 수완으로 위기를 넘긴 스미토모재벌은 이때부터 매뉴얼에 따른 경영에 힘쓰게 된다.
히로세가 내놓은 제사경신(諸事更新)이라는 방침서는 그후에 스미토모가법(住友家法)이 된다. 지금의 말로 한다면 경영방침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가법의 1조와 2조에는 “영업은 신용을 중시하며, 사업은 정세변화에 신속히 대응하여 이윤을 추구하고··· 필요하면 사업의 확장흥폐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되 일시적인 이익 (浮利)을 추구하여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를 놓고, 미쓰이의 경영이 외부경영자정치(番頭政治)이고, 미쓰비시의 경영이 독재정치(独裁政治)인데 비하여, 스미토모의 경영은 법치주의(法治主義)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 재벌의 구조>
위에서 설명한 세 재벌을 포함하여 일본에는 다양한 재벌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른 편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이 3대 재벌이 일본의 태평양전쟁과 패전, 그리고 전후 부흥 과정을 거치며 확대, 조직화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재벌그룹은 수십개의 계열사와 각 계열사에 매달린 관계회사라는 일종의 행성계와 같은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 조직의 중심은 주요 계열사 사장들로 구성되는 ‘사장회’였고, 다시 그 안에서 핵심에 위치하는 것이 고산케(御三家)라고 불리는 중핵회사였다.
한국의 재벌이 일본의 재벌을 본뜬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재벌의 형성과정,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 그리고 기업문화 등 여러 면에서 대칭적인 면이 많다. 그중에 하나 재미있는 것이 기업문화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3대 재벌인 삼성, 현대, LG를 놓고 ‘관리의 삼성, 불도저 현대, 인화(人和)의 LG’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는 일본에서 유행했던 표현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재의 미쓰이, 조직의 미쓰비시, 결속의 스미토모(組織の三菱, 人の三井, 結束の住友)'라는 표현이 바로 그 원형이다. 이는 특히 대외 접촉이 가장 많은 종합상사가 외부에 비친 이미지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미쓰이그룹의 미쓰이물산(物産)은 인재 발탁에 힘을 기울이며, 사원 개개인의 능력과 재량이 중시되는 풍토이다. 이에 비하여, 정부사업 등 대형 프로젝트를 많이 하는 미쓰비시상사(商事)는 팀워크와 계열사 간의 협업이 중요하다.
미쓰이와 미쓰비시에 비하여 계열사 수가 적고 도쿄보다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간사이지역을 대표한다는 분위기가 강한 스미토모그룹은 계열사 간의 결속력이 강한 편이었다. 앞에서 설명한 사장회를 운영함에 있어서도 스미토모그룹의 사장회(白水会)는 구성과 운영에 있어‘순혈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국에서 재벌의 공과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어 왔다. 재벌의 역사, 숫자, 규모 등에 있어서 한국을 훨씬 능가하는 일본의 경험을 보는 것은 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근대화가 시작하는 시기에 발흥하여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의 ‘신흥재벌’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노다니엘>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MIT에서 비교정치경제학을 전공하며 일본전문가로 교육받았다.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시작되던 1989년 3월에 도쿄에서 연구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다. 학자로서 홍콩과기대, 중국인민은행 등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컨설팅업에 종사하며 미국과 일본의 회사에서 일본과 관련한 일을 하고, 현재는 서울에서 아시아리스크모니터(주)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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