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후 1시 베이징 한인촌인 왕징(望京)의 한 교민 식당에서 한국 정부가 긴급 지원한 구호 물품 배포가 시작됐다.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우한 폐렴)가 확산일로인 가운데 방역 마스크 등을 구하지 못해 안전에 위협을 받고 있는 교민들을 위한 지원책이다.
이날 배포된 것은 마스크 1만5000개로 1인당 3개씩 총 5000명분이다. 베이징 교민 수가 어림잡아 5만명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량이다.
마스크 배포 업무를 맡은 북경한국인회 관계자는 "교민 수에 비해 구호 물품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겨울 방학과 설 연휴에 신종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귀국한 교민이 많아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는 정도"라고 전했다.
바이러스의 급습에 베이징은 인적을 찾기 힘든 유령 도시로 변했고 왕징 한인촌도 예외는 아니다.
배포 장소 앞에 줄을 선 교민들은 별다른 대화 없이 차례로 마스크를 받아 갔다. 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교민은 "마스크를 나눠준다는 말을 듣고 닷새 만에 집밖으로 나왔다"며 "여권만 가져오면 한 명이 가족 수만큼 받아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교민은 "식재료와 생필품을 사러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한인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것 외에는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며 "아이들이 너무 답답해 해 안쓰럽다"고 거들었다.
왕징 내 교민 자영업자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한식당 '순천집'을 운영하는 손경찬씨(58)는 "춘제 연휴를 맞아 지난달 21일부터 휴무 중인데 신종 코로나까지 덮치는 바람에 식당 문을 열 상황이 아니다"라며 "2월 중순까지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한 달 가까이 개점휴업 상태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다른 업소도 상황은 비슷하다.
배달 위주로 영업을 하던 곳들도 대부분의 아파트 단지가 바이러스 전염을 막기 위해 배달원 출입을 금지하는 바람에 매출이 급감하고 있다.
손씨는 "2003년 사스 당시에는 건물주들이 1개월치 임대료를 면제해 줬는데 최근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며 "조기에 실현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베이징 교민들은 한국에서 신종 코로나가 퍼지고 있는 데 우려를 표하면서도 중국에서 일시 귀국한 교민들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분위기에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기자와 안면이 있는 한 교민은 "아내와 딸을 일부러 귀국시키지 않았다"며 "한국에서 바이러스 취급을 받을 바에야 그냥 베이징에서 조용히 숨어 있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국에 가도 2주일 정도 자가 격리가 필요해 외출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라며 "베이징에서 건너가도 이 정도인데 우한 교민들은 귀국 후 얼마나 힘들겠나"라고 반문했다.
중국 정부는 바이러스 잠복기(최대 2주)에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춘제(春節·중국 설) 연휴(기존 24~30일)를 다음달 2일까지로 연장했다.
하지만 연휴가 끝나도 왕징 한인촌이 종전의 활력을 되찾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전망이다.
시민들에게 전염된 공포감이 상당한 탓이다. 이날도 마스크 배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가 관리업체 직원들이 찾아와 항의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인원이 모여 정부 지침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지나던 중국인들도 "전염병이 도는 때에 한국인들은 왜 중국 정부의 말을 듣지 않고 이렇게 많이 모였냐"라며 수근거렸다.
업체 직원들과 교민들 간의 말다툼이 격해지자 한 직원은 큰 소리로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때문에 마스크 배포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중국에 진출한 많은 한국 기업과 정부 기관들은 연휴 뒤에도 최소 1주일 가량 재택 근무를 실시하기로 했다.
베이징 주재 한 정부 기관 관계자는 "재택 근무 실시를 유력하게 검토 중"이라며 "동료들끼리 영상 통화로 업무를 진행해야 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이미 한국에 건너갔던 교민들의 복귀도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 등은 주재원 가족의 안전을 위해 귀국 지침을 내렸다.
국제학교 개학일인 2월 17일 전까지 한국에 머물도록 했지만, 신종 코로나의 확산세가 꺾이지 않을 경우 개학 후에도 베이징에 돌아오기 어려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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