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7) 위대한 생각을 깨운 놀라운 그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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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02-0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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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식·조만식·우치무라, 일본 유학시절의 인연

[다석 류영모]



오산학교를 나온 뒤, 일본 동경물리학교로

1912년 오산학교를 나온  22세의 류영모는 길 위에 서서 학교 건물을 돌아보았다. 늦가을 오후 교사로 2년을 근무했던 교정엔 마른 잎들이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서슴없이 제 나무를 버린 저 잎들은 다시 시작될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거름이 되리라. 그에게 지난 2년은 다양한 동서양 학문을 접하는 기간이기도 했지만 이승훈, 여준, 이광수, 안창호, 신채호, 윤기섭 등 당대의 지식인-교육자-독립운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열정과 지식과 신념에 감화를 받던 때였다.

오산학교 교사 시절은 그에게 사상적인 격동기이기도 했다. 이 학교에 교리 기독교를 전파했던 류영모는 톨스토이와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앙적 성찰을 심화한다. 성서와 톨스토이 저서, 불경과 도덕경을 숙독하면서 그의 기독교 사상은 이미 시스템화되어 있는 교회와 교리의 종교체계에 대한 깊은 의문을 키워 갔다.

이 의문은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되었고, 불교와 유교·노장사상과 같은 동양적 신념체계들과의 뿌리 깊은 공통점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오산학교에 머문 지 1년이 되었을 때 두 살 아래 동생 류영묵의 죽음을 겪었고, 생사관(生死觀)에 대해 고심참담했기에 그의 사상은 더욱 집요하게 진실을 탐문해 가고 있었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풀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학교를 떠났지만, 그의 마음속엔 학문과 사상의 갈증이 깊을 대로 깊어져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국내엔 대학이 없었기에 일본 유학을 택했다. 류영모는 지식을 더 다져 다시 오산학교에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학교사가 필요한 그곳을 생각하며, 대학의 전초단계 과정(예비학교)이라 할 수 있는 동경물리학교에 들어간다. 1912년 9월의 일이다. 그런데 그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대학 입시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국내로  돌아온다.

깊어진 사상의 갈증, 그리고 세 사람

갑작스럽게 대학에 가지 않기로 한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류영모는 이 무렵(일본 재학)이 인생에서 가장 고민스러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 고민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학문을 계속하는 일이 그의 사상과 신앙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물리학자가 되는 일보다, 당시의 그에겐 신학사상가가 되어 식민지 조국의 정신성(精神性)을 일신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데에는 일본 체류 시절 느꼈던 도쿄의 어떤 '공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류영모는 도쿄에서 그의 생에 큰 영감을 준 세 사람을 만난다. 김정식과 조만식, 그리고 우치무라 간조다.

삼성(三醒) 김정식(1862~1937)은 황해도 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류영모에게 예수를 알게 해준 일생일대의 은사이다. 1905년 15세의 류영모는 연동교회에서 김정식을 만났고 그를 통해 성경을 읽게 됐다.

김정식은 대한제국 시절 경무관을 지냈는데, 독립협회 사건에 연루되어 1902년 국사범(國事犯)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이때 선교사 게일이 감방에 넣어준 신약성서를 읽는다. 4대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의 생애를 돌아보며 큰 위로를 받았다. 몹시 억울한 상황에서 예수가 취한 의연한 태도는 성스럽게 여겨졌다. 김정식은 성서를 7번 읽었고 8번째 읽는 가운데 1904년 무죄 석방이 된다. 

김정식의 옥중 신앙고백서는 절절하여,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일부만 옮겨보자.

"나는 육신의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내 불쌍한 사정을 고할 곳이 없으되,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지극히 친절하시고 지극히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 형님께 고하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 앵사는 나이 10살도 안 되었을 때 두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로마교황(가톨릭) 양육원에 보냈으니, 때때로 부모를 찾아 부르짖을 생각을 하면 뼈가 저리고 오장이 녹는 듯합니다. 이 세상에는 나 같은 악한 죄인도 없었고 지금 이 같은 깨끗한 마음을 얻은 사람도 나 혼자뿐입니다. 차후 어떤 지경에 처할지라도 이 은혜를 잊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전날에 지은 죄로 오늘 이 같은 긍휼(矜恤, 가엾이 여김)을 받기는 진실로 뜻밖입니다. 이 몸이 옥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찌 이런 은혜를 얻었으리오."

류영모, '믿음 은사' 김정식과의 재회

감옥에서 나온 김정식은 게일 선교사의 권유를 받고 연동교회와 YMCA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연지동, 지금의 연동교회 자리에 있었던 애린당(愛隣堂, 이웃사랑의 집)에 살았다. 감옥에서 출발해 신앙 입문 3년차에 이른 43세 김정식은 15세 류영모에게 자신을 그토록 놀랍게 바꾼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류영모는 예배시간이 아닌 때에도 애린당에 찾아가 여러 가지 일을 도우며 가르침을 받았다. 이렇게 함께 지냈던 분을, 류영모는 7년 뒤에 도쿄 한복판에서 만난 것이다. 식민지의 척박한 삶 속에서 살아 있는 것만도 반갑던 시절에, 이국땅에서 '믿음의 은사'를 만난 일은 그야말로 축복 받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정식은 류영모의 손을 잡고 가족에게로 데려갔고 사진도 찍었다. 

김정식은 어떻게 도쿄에 와 있었을까.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잡는다'는 암암리의 공감대가 커지면서 한국인의 일본 유학이 늘어났다. YMCA는 한국 유학생들이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도쿄에 재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세운다. 1906년 8월 서울 YMCA에서 일하던 김정식이 파견되어 도쿄 총무직을 맞는다. 이 건물은 1919년 2월 8일에 그 유명한 재일유학생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던 그곳이다. 한국 유학생들은 거의 모두 김정식의 지원을 받았다. 조만식, 안재홍, 김규식, 송진우, 장덕수, 신익희, 김병로, 이광수 등 쟁쟁한 명사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조만식 선생]



메이지대 법대생 조만식과의 만남

김정식은 신앙제자 류영모에게 조만식(1882~1950)을 소개해준다. 재일본 유학생들은 종파를 초월한 연합교회를 만들어 함께 예배를 보았는데 거기에서 류영모는 조만식을 처음 보았다. 조만식은 같은 평안도 사람인 이승훈을 알고 있었기에 오산학교 교사로 지낸 류영모를 더욱 반가워했다. 그의 하숙집이 류영모가 기거하는 곳에서 가깝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류영모는 메이지대학 법과 졸업반이던 조만식을 자주 찾아가 얘기를 나눴다. 훗날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으로 남게 된 위대한 인물 조만식은 그때 눈빛이 형형한 청년에게 문득 이런 얘기를 꺼냈을지도 모른다.

"요강을 잘 닦으시오."

류영모가 무슨 뜻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어린 날 동네 부잣집 머슴이었소. 내가 할 일은 요강 닦는 일이었지요. 나는 매일 있는 힘을 다해 요강을 닦고 또 닦았소. 어느 날 주인이 나를 불러 공부를 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내게 학비를 대주었습니다. 작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을지 모른다. "애국애족하는 길에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내가 죽은 뒤에 누가 있어 비석을 세우려거든 거기에 비문은 쓰지 말라고 하고 싶소. 다만 큰 눈을 두 개 그려주면 좋겠습니다. 저승에 가서라도 한 눈으로 일본이 망하는 것을 지켜보고 한 눈으로 조국이 자주독립하는 것을 지켜보려 합니다." 조만식 어록에 있는 말들이다. 23세 류영모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깊은 울림으로 남았을 것이다.

인연은 오묘하다. 조만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을 때 옥중에 있던 이승훈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로버트 교장이 들어온 뒤 기독교 신앙통제가 심해진 오산학교를 민족정신의 성지로 바로잡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조만식은 뜻이 그러하니 석달만 맡아 수습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9년간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이 학교의 기풍을 제대로 갖춘 큰 교육인으로 길이 남았다. 그는 오산학교 기도회에서 이렇게 교장설교를 했다고 한다. "사람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겨레를 사랑합시다. 옳은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를 믿읍시다." 이런 조만식의 뒤를 이은 교장은 류영모였다.

다음은 일본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1861~1930)를 얘기할 차례다. 류영모가 일본에 갔던 1912년 우치무라는 51세였다. 그는 한 살 아래인 김정식(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과 친구처럼 지냈다. 우치무라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침에 신앙의 벗인 경성 김정식군의 방문이 있었다. 3년 만에 만나서 대단히 반가웠다. 그는 장로교회에서 일하지만 그 신앙에 물들지 않았음을 알고 기뻤다. 그가 고국의 일을 말할 때에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고 나도 따라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이 기도를 같이 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1919년 5월 19일)

김정식과 절친이었던 우치무라의 강연

"오래간만에 조선 김정식군이 찾아왔다. 변하지 않는 신앙의 빛으로 빛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기뻤다. 그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본과 조선의 합동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정치가나 군인이나 실업가는 모른다. 나는 일본인이고 김정식은 조선인이지만,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형제이다. 김군은 나의 신앙을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와 만날 수 있는 걸 감사한다."(1922년 11월 7일)

이 시절에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우치무라 간조는 대체 누구인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다(잡지 '성서의 연구', 1909년 12월호).

"나는 조선을 위해 이 일을 기뻐한다. 이 나라는 지금 실제적으로 국토를 잃고 정부를 잃고 독립을 잃고 참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다. 자비로운 하느님이 지상에서 이들 조선인의 손실에 대해 영적인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보상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인의 하느님은 또한 조선인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후하시고 그들에게는 박하실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가지고 조선인의 지상에서의 손실을 메워주실 것이다. 지상에서 저주를 받았으면 하늘에서 은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이 은혜로운 아버지에게 자비를 입을 것을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이 표방하는 평등과 사랑의 논리로 보자면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탄력을 받던 시기에 일본 지식인이 자국의 통감 피살 사건에 대해 이 같은 논평을 내놓는다는 것은 실로 용감한 일이 아닐 수 없어 보인다. 
 

[우치무라 간조]



주체적인 기독교 교리해석을 고민하다

김정식은 조선 유학생들을 위한 강연회에 우치무라를 강사로 자주 초빙했다. 류영모는 동경물리학교에 다니는 동안 몇 차례 우치무라의 강연을 들었다. 하지만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류영모는 우치무라가 서양에서 출발한 기독교를 그대로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 이식하는 것에 대해 갖는 문제의식은 공유했지만, 교회와 교리 문제, 일본 국가주의와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문제 등에선 일정한 이견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우치무라가 이 땅의 초기 기독교 정착 과정에서 주체적인 '교리 해석'에 눈뜨게 했고 독립운동과 같은 국가적 현실논리의 신앙적 구현을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의 종교사적 존재감은 지금도 상당해 보인다. 류영모가 우치무라의 신앙적 실천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청년시절 '영성(靈性)의 주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계기를 우치무라에게서 자양분처럼 섭취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일본인의 하느님(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따로 있다"고 주장한 우치무라의 삶과 사상에 관해선 다음회에 좀더 깊이 다뤄볼 예정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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