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란 무엇인가' 묻는 영화
넷플릭스 영화 '메시아' 시즌1 10편을 본 뒤, 무엇인가 기록을 남기고 싶었으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금 신문(아주경제)에 연재하고 있는 '다석 류영모 시리즈'의 주제들과 메시지가 겹치면서,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것들이 복잡한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20세기 벽두의 동서양 문명충돌 속에서 1800년된 기독교의 급속한 동방 전파가 이뤄졌고,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와 조선의 다석 류영모,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는 동양적인 지혜와 안목으로 기독교의 심각한 변질을 읽어냈다. 톨스토이의 통일복음서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류영모는, 우치무라의 동양적(일본적) 기독교의 실천에서 영감을 받으면서, 이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면서 신성에 대한 심오한 확장을 이뤄낸다. 동양적 성찰과 예지가 서양기독교를 거듭나게 한 것이다.
허구의 내용이라고 밝힌 영화가 이렇듯 종교국가의 난색을 불러일으킨 것은, 영화가 내놓고 있는 질문인 '종교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메시아'처럼 행동하는 이란 출신의 남자 '알마시히(메흐디 데흐비 역, 알마시히는 메시아란 뜻으로 그를 따르는 대중이 붙인 별칭이다)'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긴장을 자아낸다. 그는 과연 메시아인가.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이가 있고, 부정하는 이가 있다.
물위를 걷는 기적, 예수를 떠올리다
영화 속의 군중들이 바라보는 관점들이 있지만, 영화 밖에서 그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관점도 있다. 영화 밖의 관객이라면, 영화 감독이나 작가의 생각을 기웃거리려 하거나 영화의 시나리오나 영화가 추구하는 의미를 짐작해보려할 것이다. 처음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던 알마시히가 갈수록 메시아의 심증을 높이는 건, 곳곳에서 보여준 초인적인 능력 때문이다.
우선 미사일 폭격을 앞둔 시리아에서 군중들에게 겁없이 설교를 펼치며 기적의 모래폭풍으로 전쟁을 물리치는 이적이 이뤄졌고, 군중이 모인 한복판에서 총을 맞은 아이가 되살아나는 기적이 있었고, 중동에서 미국으로 순간을 이동을 했고, 토네이도 속에서 교회 하나와 소녀를 구했으며, 사람들 앞에서 물 위를 걸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과 행적을 알고 있었으며, 격추된 비행기 속에서도 멀쩡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이미 추락사한 사람도 살려냈다.
영화는 이런 기적들을 섣불리 믿지 못하도록, 그를 추적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다. 그가 마술을 터득한 사람으로 자신을 메시아로 착각하는 정신적 '장애'를 겪어온 과거가 그의 형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그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기적을 흉내내서 사회혼란을 꾀하려는 '신종 영성 테러리스트'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흘린다. 그의 '테러'의 최종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높여놓기도 한다.
신은 인간에게 기적을 보여 설득할 이유가 없다?
알마시히의 기적들을 눈으로 보며, 사람들은 메시아의 재림을 확신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대목은, 현재의 대중이 '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예수 시대의 기독교가 어떻게 전파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톨스토이와 류영모는, 신이 '기적(초자연적인, 초인간적인 행위나 사건)'을 통해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기적은, 후세의 인간들이 신의 힘과 존재를 좀더 강력하게 믿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삽입한 '특수장치'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예수는 결코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고, 기적으로 신앙을 끌어모으려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신은 자신의 '초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없는 존재다. 오직 인간에게 자신의 메시지인 '극기와 사랑'을 전파하기만 했으며, 그 자연스럽고 순수한 메시지로만 인간은 신을 따라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의 뜻이었다.
신이 인간을 놀라게 하기 위해 '초능력'을 보이는 일은, 극히 인간적인 발상들이 조잡하게 '가필'된 결과라는 것이다. 류영모는 신은 '절대적 세계'의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세계에 숨쉬고 있는 인간이 동일한 '존재'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허황된 것이라는 입장에 선다. 하느님은 '없이 계시는' 존재라고 그는 표현한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것은 절대세계에 들어서는 그 순간이라고도 한다. 깨달음 또한 그 지점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영성'을 무기로 삼는 테러리스트가 될 때 더 끔찍
영화 '메시아'는 성서에 기록된 기적들을 연상케 하는 초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이 오랫동안 잘못 지녀온 절대자에 대한 왜곡된 믿음들을 재현해 보여준다. 인간이 지니고 있지 않은 초능력을 가진 존재는 신이 되는가. 신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까지 덩달아 던진다. 기적을 보여준 존재라도 인간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또다른 확인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영화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영성'을 무기로 한 더 끔찍한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있다.
알마시히는 예수의 풍자인가 조롱인가 재림인가. 영화 속의, '믿음에 대한 혼란'들은 이 수상하고 대단한 남자가 신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알마시히의 능력이 눈속임이나 가짜여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메시아가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기적을 품고 왔느냐, 그 사랑의 힘으로 영성의 파탄지경에 이른 인간들을 다시 일으켜 새로운 믿음으로 거듭 나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가 전직 사기꾼으로 밝혀졌다 하더라도, 그 내면에 성서의 산상수훈에서 말했던 신의 메시지들이 흘러나온다면 그는 메시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알마시히가 진짜 예수로 재림할 수 있는)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박홍규 옮김, 2016. 들녘출판사) 고 말한 이는 톨스토이다. 그가 가장 이 영화의 본질과 결말을 잘 알고 있는 사상가인지 모른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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