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은 단비와 같다. 도무지 웃을 일 없었던 국민들은 모처럼 활짝 웃었다. 영화 한 편, 노래 한 곡이 선사하는 감동은 이토록 짜릿하다. ‘기생충’ 수상을 접하고 삼성 이건희 회장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 당시 정치권은 고깝게 여기고 불편해 했다. 하지만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정치 현실이 그렇다. 이제는 이렇게 수정돼야 맞을 듯하다. “문화·예술·스포츠는 1류,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
정치는 밑바닥이지만 ‘기생충’이 보여준 성취는 놀랍다. 한국 영화 100년이 쌓아올린 기념비다. ‘기생충’은 지난해부터 각종 영화제를 휩쓸었다. 해외 57개 시상식에서 174개 상을 쓸어 담으며 역사를 썼다. 제92회 아카데미에서는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 동시 수상은 역대 두 번째다. 세계 언론도 앞 다퉈 찬사를 쏟아냈다. 북미 상영관은 2,300개로 두 배 늘었고, 해외 수입도 이미 2,000억 원에 육박한다.
이에 비하면 한국 정치는 초라하다. 4.15총선을 앞두고 있지만 변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말꼬리 잡기는 여전하고 인재영입 결과 또한 민망하다. 생산적인 정치 담론은 실종된 지 오래다. 서울 종로에 출마한 이낙연과 황교안은 서로를 ‘서민 코스프레’라며 손가락질해댔다. 국민들 보기엔 둘 다 다르지 않다. 인재영입 또한 4년마다 돌아오는 이벤트로 전락했다. 장기적인 인재육성 시스템이 실종된 결과다. 국민들은 ‘인재영입 드라마’에 더 이상 관심도 기대도 없다.
법조 출신 정치인이 과다 대표되고 있다는 비판도 흘려듣고 있다. 여야 모두 법조인 영입에 급급하다. 엊그제까지 판사, 검사하던 이들이 정치권으로 향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불편하다. 저마다 명분을 앞세우지만 옹색하다. 추상같다는 판결문, 공소장, 결기는 무색하다. 반면 당내에선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인재영입만 있고 인재육성은 없다는 것이다. 인재를 키우는 대신 일회성 인재영입 쇼에만 매달린다는 비판이다. 정치도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야 모두 진영논리에 갇혀 국민을 우습게 안다. 민주당은 너른 품을 잃었다. 아집과 독선으로 일관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배척하고 단죄하는 일에만 능하다는 쓴 소리를 귀담을 필요가 있다. 한국당 또한 대의정치를 포기한 채 광장과 거리로만 떠돌았다. 집회와 단식, 삭발, 고발을 일삼으며 동원 정치에 골몰했다. 제1 야당으로서 역할도, 품위도 잃었다. 이러니 국민들은 민주당도 한국당도 싫다며 고개 돌린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 마음은 오래 전부터 콩밭에 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모든 법과 제도, 기득권 장벽을 들어내야 한다”며 과감한 규제개혁을 호소했다. 입법 미비와 소극적 행정, 신산업과 기득권 집단 간 갈등이 우리 경제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춘지 ‘글로벌 기업’ 순위에서 미국은 지난 10년간 10대 기업 중 7개 기업이 바뀌었다. 우리는 2개뿐이다. 역동성이 떨어지고 장벽은 높다는 반증이다. 진입장벽을 넘지 못한 ‘타다’가 대표적이다. 낡은 규제, 발목 잡는 규제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열어줄 책무가 정치권에 있다.
민주주의 역사가 오랜 미국은 부러운 전통을 지니고 있다. 정파를 떠나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고, 상대 정치인에게 덕담을 건네는 모습은 자연스럽다. 부시는 대선에서 패한 뒤 클린턴에게 “당신의 성공이 우리의 성공이다. 성공을 응원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공화당, 민주당을 떠나 진심을 담은 글이다. 밥 돌 상원의원 역시 성숙한 풍모를 보여줬다. 그는 부시와 앙숙이었음에도 부시가 재선에 패하자 그를 초대해 위로할 만큼 넉넉한 품을 보여줬다.
레이건 대통령 탄생 100주년 때도 마찬가지다. 미국 전역은 추모 열기로 달아올랐다. 슈퍼볼 결승전이 열린 알링턴 스타디움 전광판에 레이건을 기리는 추모 글과 영상이 올라왔다. 당시 시청자는 1억1,000만 명. 그러나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공화당원이든 민주당원이든 한마음으로 전직 대통령을 기렸다. 만일 잠실구장에 노무현 대통령 추모 영상이 올라왔다면 어땠을까. 아마 보수언론과 야당은 물 만난 고기처럼 공세를 퍼부었을 것이다.
우루과이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은 존경받는 정치인이다. 그는 취임할 때보다 높은 지지를 받고 국민들 품으로 돌아갔다. 우리 국민들도 1류 정치, 정치인을 보고 싶다. 한국 영화처럼, K팝처럼, 여자 골프처럼, 발레처럼 희망과 감동을 주는 그런 정치를 기대한다. 우루과이 인구는 350만 명 정도다. 무히카는 노벨 평화상 후보 2차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세계를 움직이는 100인’에 선정됐다. 국력은 땅 덩어리, 인구, 경제력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좋은 사례다. 한국 정치가 1류로 인정받는 날은 언제일까. 쿨한 정치, 엣지 있는 정치인을 기다리는 4.15총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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