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여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로부터 2개월이 채 안 된 10월 11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국군최고사령부(GHQ)는 일본의 ‘민주화’를 서두르게 된다. 전쟁을 일으키고 패망한 나라를 없애거나 처벌하기보다는 민주화를 통하여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민주화의 중심적인 기둥의 하나가 ‘경제민주화’였고, 그 핵심작업은 재벌의 해체였다.
맥아더사령관이 주도한 재벌 해체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능력의 중심에는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력의 집중’이 있었다고 GHQ는 판단하였다. 경제력이 일부의 기업에 집중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경계하는 미국인들의 생각(anti-trust)이 그 바탕에 있었다. 특히 재벌의 해체에 관해서는 "일본의 상업 및 생산의 대부분을 지배해 온 산업 및 금융결합세력을 해체한다"는 구체적인 방침을 미국정부가 발표하였고, 형식적으로는 연합국군이지만 실제로는 미군의 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휘하의 GHQ가 이를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해체의 우선적인 대상은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 고노이케(鴻池), 시부사와(渋沢) 등 여섯 개의 재벌이었다. 미군의 눈에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전쟁을 수행한 전범에 가까운 기업들이었다. GHQ가 주도한 다섯 번의 해체대상 지정은 위에서 말한 4대 재벌 이외에도 통신, 전력 등 기간산업을 포함한 수많은 기업이 포함되게 된다. 미군정의 이러한 노력은 전후의 일본법체계에서 독점금지법, 과도경제력집중배제법 등으로 연결된다.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게이레쓰
그러나 일본의 재계에는 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산세력이 부상하여 세계적인 차원에서 미국은 이 공산세력과 냉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중국이 공산화하고 소련이 부상하여 인도차이나, 중동, 한반도 등에서 이에 대항하는 미국은 적이었던 일본을 중요한 우방으로 삼게 된다. 적국이던 미국과 일본이 동맹관계에 들어가고, 이어 한국전쟁 시기에 일본은 특수경기에 힘입어 경제가 부활한다.
전전의 재벌이 ‘기업집단’ 또는 ‘기업계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상하게 되는 것은 냉전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커다란 변화는, 태평양전쟁 전에 지주회사를 가진 족벌이 통제하던 체제가 전후에는 은행·종합상사·사업회사를 중심으로 다수의 기업들이 서로 주식을 소유하여 하나의 ‘계열(게이레쓰)'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이 부상한 6대 기업집단이 전후 일본의 ‘경제기적’을 주도하게 된다. 경영학 문헌에서 한자의 계열(系列)의 일본식 발음을 그대로 채용한 'keiretsu'가 하나의 용어로서 정착할 정도로 일본의 6대 기업집단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후지, 산와, 제일권업 등 6개의 은행들이 주채권은행이 되어 종합상사, 철강, 조선, 자동차, 화학, 섬유, 식품 등의 다양한 산업을 풀세트로 갖추어 그룹을 형성한다. 이 그룹에 소속하는 회사들은 주식을 상호 보유해 강한 결속을 유지하였다. 나아가 각 계열사들이 다수의 하청 및 재하청기업들과 배타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결국, 하나의 게이레쓰에는 수백개의 기업이 소속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체제가 일본의 경쟁력을 세계적으로 높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위의 표는 일본경제가 전후에 피크에 도달했던 1989년 시점에서의 6대 기업집단 모습이다. 이들 기업집단의 핵심회사 사장들이 대개 매월 한번 모이는 ‘사장회’에 속하는 기업들만 추려도 184개사에 이른다. 미쓰이그룹의 이목회는 둘째 목요일에 만나고, 제일권업의 삼금회는 셋째 금요일에 만난다는 것이다. 이 184개사에는 각각 수 많은 하청회사, 재하청회사, 관련회사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회사는 대개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쓰비시그룹의 하청회사가 스미토모그룹과 비즈니스를 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버블의 붕괴
1989년 말에 도쿄증시의 평균주가가 3만8915엔이라는 피크에 도달하였다가 그때부터 급락하여 3년 후에는 일본증시의 주가총액이 60% 이하로 떨어지는 버블의 붕괴는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 버블의 붕괴 속에서 전후 세계시장을 주름잡던 6대 기업집단도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주가가 떨어지고 국가 전체에 금융 유동성이 축소되는 가운데 일본경제는 커다란 구조적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수십년 내지 100년 가까이 영업을 해오던 일본의 은행들이 이합집산하여 새로이 편성되는 것이다. 은행의 구조변화는 이 은행들을 ‘메인뱅크(주거래은행)'로 삼았던 사업회사들의 운명도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에서 영업을 할 수 있었던 ‘도시은행’(한국의 ‘시중은행’) 13개를 포함한 대표적 은행 20개가 분할·통합하여 오늘날에는 3대 ‘메가뱅크그룹’으로 재편하게 된다. 이 재편은 수십년을 경쟁 상대로 하던 은행들이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 관계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위 표는 6대 기업집단에 속하던 회사들 중에서 은행과 종합상사만을 추려서 정리한 것이다. 표에 있는 17개의 회사들은 일본이 전성기를 누리던 1970, 80년대에 각각 세계적인 기업들이었다. 게다가 그중에는 과거의 국책은행들이 들어 있다. 미쓰비시그룹에 속해 있는 도쿄은행은 과거에 ‘요코하마정금은행’이었는데, 이는 개화기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외환거래은행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민영화로 인하여 과거에 국책은행이던 외환은행이 오늘날 하나은행그룹에 들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흥업은행은 산업개발에 중요한 임무를 가진 국책은행으로서 한국의 산업은행과 유사하다. 일본흥업은행도 민영화로 미즈호그룹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중에 UFJ그룹과 합병함으로써 지금의 미즈호그룹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이합집산의 가장 극적인 광경은 미쓰이스미토모그룹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 비유한다면, 삼성그룹이 현대나 SK그룹과 합쳐지는 정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미쓰이와 스미토모가 각각 은행으로서 영업을 시작한 것은 1872년과 1875년이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두 은행이 하나가 된 것이다.
필자가 연구를 위하여 일본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89년 3월로, 쇼와가 끝나고 헤이세이(평성)시대가 막 시작된 시점이었다. 그때 거리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은행 간판들이었다. 그만큼 일본은 증권시장이 아니라 상업은행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간접금융’의 경제체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평성시대의 ‘잃어버린 30년’이 지나고, 최근의 도쿄 거리에서 은행을 찾으려면 한참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 시대의 변화가 은행의 변화에 가장 잘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노다니엘>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MIT에서 비교정치경제학을 전공하며 일본전문가로 교육받았다.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시작되던 1989년 3월에 도쿄에서 연구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다. 학자로서 홍콩과기대, 중국인민은행 등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컨설팅업에 종사하며 미국과 일본의 회사에서 일본과 관련한 일을 하고, 현재는 서울에서 아시아리스크모니터(주)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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