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에 사는 맞벌이 직장인 이모씨(35)는 지난달 말부터 이달 6일까지 1년치 연차를 모두 당겨 사용하기로 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8살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미뤄지면서 당장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양가 부모님은 일을 하시기 때문에 아이를 봐달라고 부탁드릴 수가 없는 형편"이라면서 "남아 있는 연차를 다 사용했기 때문에 올해 휴가는 고사하고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의 여파가 각 가정으로 스며들고 있다. 개학이 연기되고 학원·유치원·어린이집 등이 줄줄이 휴원하면서 맞벌이는 물론 외벌이 부부들의 육아 고충이 커지고 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부들은 당장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재택근무로 월급이 반토막 난 가정에서도 '텅장(빈 통장)'에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3일 본지가 30~60대까지 각 연령대를 대상으로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육아 애로사항을 취재한 결과 돌봄시설의 집단 공백으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개인연차나 재택근무 등으로 버티기도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가 감염병 사태에 대비한 중장기적 돌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금융권에 다니며 10살 아들을 키우고 있는 박모씨(43)는 최근 어린이집이 휴원하자 급하게 어머니에게 SOS를 요청했다. 박씨의 경우 아내는 간호사라 근무를 빼기 어렵고, 그가 근무하는 회사도 재택근무가 여의치 않다. 그는 "아이를 봐주시던 이모님이 손녀를 돌봐야 한다며 갑자기 그만두는 통에 부모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며 "다행히도 출근이 1시간 늦춰져 아이를 어머니 집에 맡기고 출근하는데, 최근에 허리수술을 받으셔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고 말했다.
전업주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학원·유치원·놀이방 등이 전부 문을 닫다 보니 아이들 끼니를 매번 챙겨주면서 집안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서울 문정동에서 7살·6살 형제를 키우고 있는 이모씨(35)는 "활동이 많은 아이들을 집에 가둬놓고 하루종일 씨름하다 보니 하루가 매우 지치고 피곤하다"면서 "매일 새로운 놀이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숙제지만, 제한된 환경과 도구로 놀아주다 보니 아이도, 부모도 서로 지쳐간다"고 토로했다.
육아만 고민해야 하는 부모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기업들이 재택근무와 공가를 장려하면서 월급이 반토막난 직장인들도 많기 때문이다.
서울 삼성동에서 9살·5살 남매를 키우고 있는 안모씨(42)는 "남편의 해외출장 일정이 코로나19로 단축되면서 독박육아에서는 벗어났지만 이달 월급이 지난달의 70%밖에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큰애가 다니던 발레와 영어수업이 중단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윤모씨(45)는 "남편이 재택근무한다고 해서 좋아했더니 월급이 20%나 줄었다"면서 "초등생 자녀의 수학 과외를 이달부터 3인 그룹과외로 바꿨다"고 말했다.
막상 아이를 돌보고 있는 조부모들도 비상이다. 강동구 고덕동에서 6살·4살 남매를 돌보는 전모씨(67)는 "학원, 놀이방 등이 전부 휴업이라 갈 데가 아무곳도 없다"면서 "너무 답답해해서 하루 30분 정도 마스크를 씌워 놀이터를 나가는데, 기구 잡는 것도 불안해서 장갑을 매일 삶아 빨고 있다"고 말했다. 천호동에 사는 박모씨(58)는 "딸을 대신해 다니던 일터에 급하게 연차를 내고 5살 손녀를 봐주고 있다"면서 "이틀 뒤 내가 다니던 일터에 복귀하면 딸이 다시 아이를 안고 출근해야 하는데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태 장기화에 대비해 범사회적인 돌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코로나19와 같이 감염병이 전국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경우 아이들의 근본적인 안전을 위해 '맞벌이 가정 휴가제'(가칭)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휴가사용이 용이하도록 각 기업의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대만의 경우 국가주도로 '코로나19 돌봄휴가'를 만들고 각 기업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윤인진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재택근무, 연차사용 등은 코로나19 같은 장기적인 감염병에 대비한 대책으로 적당하지 않다"면서 "메르스, 코로나19 사태를 겪은 만큼 정부가 이제 감염병에 대비한 총체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학교, 병원, 유치원, 양로원 등 단체시설에 '안전등급제' 등을 도입해 사람들이 감염병 위험성을 최소화하면서 지속적인 사회경제적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신경아 한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도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재택근무, 연차 등 기업의 선의와 개인의 희생으로는 육아가 더 이상 해결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여성의 경제활동, 맞벌이 문화의 정착 등 변화된 사회환경에 맞는 재난 상황의 돌봄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가족돌봄 휴가를 감염병이나 지진, 홍수 등 재난의 상황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변경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대안"이라며 "유연근무, 재택근무, 돌봄휴가 등 다양한 형태의 휴가를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권장하되 남녀가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여성의 사용 비중을 60%(예시)가 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좋은 활용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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