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에는 '페미니즘 입문서'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작품을 보니 이해가 됐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3명은 각자 여성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털어놨다.
오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콘텐츠그라운드에서 공연되는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여성 중심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를 연상시킨다. 작품을 쓴 한송희 작가는 "그리스 신화를 비롯해 전반적으로 남성 중심 이야기가 많았다"며 "여성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신화를 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2016년 3월 '산울림고전극장'으로 첫선을 보여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연장 공연을 했던 이 작품은 2017년 제4회 연극인대상에서 '극작상'을 수상했다. 작품성을 인정받아 2019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꼽는 공연예술 중장기창작지원사업에도 선정됐다. 신화 속 흥미로운 이야기를 현대인 삶에 절묘하게 녹여 낸 작품이다.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대학로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창작집단 라스(LAS)를 대표하는 연극 중 하나다. 라스는 불경을 기록한 소리글자 산스크리트어다. '반짝임·갑작스러운 나타남·활활 타오름·무엇에 몰두함'이라는 뜻을 가졌다.
반짝이는 작품은 관객들을 그리스 신화로 초대한다. 제우스 명으로 올림포스에 12신이 소집된 가운데 모임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가 이야기를 나눈다.
세 신은 같은 여성이지만 서로 다르다. 현명하고 아름답지만 제우스 바람기 때문에 질투의 화신으로 전락한 헤라, 진정한 사랑이 뭔지 혼란스러운 아프로디테, 오리온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가 더욱더 깊은 상처를 입은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자신들 삶과 일·사랑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놓는다.
무엇보다 대본이 가진 힘이 큰 작품이다. 아프로디테 역을 맡은 배우 이주희는 "내가 내뱉는 대사가 누군가에게는 칼날 같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대본은 처음 본다. 매번 너무 다르다"며 "관객들이 나와 비슷하리라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고 말했다.
배경은 그리스 신화이지만 작품은 현재를 이야기한다. 구조적인 남녀차별과 데이트 폭력 등 여러 여성 문제를 직시한다. '나와 당신이 겪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문구는 연극을 잘 설명해준다.
이기쁨 연출은 "입문서답게 쉽고 재미있게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 논하는 공연이 돼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며 "과거 무지했던 내가 변화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다"고 의미를 되새겼다. 그는 "누군가는 기초적인 이야기만을 다루고 있다고 말을 한다"며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다 틀어 바꿔서 깊이 있게 만들어야 할까. 그건 다른 공연에서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초연됐던 4년 전부터 되돌아보면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성폭행이나 성희롱을 고발한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연출은 "이번 시즌에는 대본을 크게 수정하지 않고 진행했다"며 "연습 과정에서 대본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했다는 것을 느꼈다. 똑같은 글자지만 그 안에서 의미가 재탄생하는 작업이 흥미로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2016년 8월 시작된 재공연을 마치고 한 작가는 '이 작품이 얼른 낡아빠진 얘기가 돼 다시는 공연을 안 하게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바람이 이뤄지려면 아직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한 작가는 "동시대 사람들이 사회를 바라보며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함께했던 것 같다"며 "사회적인 일들로 작품이 또 다른 의미를 얻으며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코로나19가 계속되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 공연되고 있다. 이 연출은 "힘든 상황에서 관객을 만나게 됐는데 걱정 반 감사한 마음 반이다"며 "안전하게 공연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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