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흑사병이 낳은 르네상스…코로나19 뒤엔 '스마트 르네상스' ?

대규모 전염병 창궐 때마다 문명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계기로

[죽음의 춤] ]

[김세원의 천방지축] 세계보건기구(WHO)가 11일(현지시간) 마침내 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pandemic·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세계보건기구가 그간 주저해온 팬데믹을 선언하면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최악의 경우 향후 전 세계 성인의 40~70%를 감염시킬 정도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이날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팬데믹은 가볍게 혹은 무심하게 쓰는 단어가 아니다. 자칫 잘못 사용하면 비이성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거나 불필요한 고통을 낳는다”고 선언배경을 설명했다.

같은 날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 본부장은 충북 오송 질병관리본부에서 열린 정례브리핑에서 "확진자의 80.1%는 집단 발생과의 연관성이 확인됐고, 60.9%는 신천지 관련으로 분석되며 지역별로는 대구와 경북지역의 환자 수가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나 구로구 콜센터에서 100명에 육박하는 확진자가 확인되면서 수도권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 각국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바이러스에 확실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빗장을 걸어 잠그는 데에만 급급하다. 코로나19가 세계 각국에 미칠 경제 사회 정치적 파급력과 효과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가 힘들다. 2월말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에 대해 “‘블랙스완’이 떼지어 날고, ‘회색코뿔소’가 사납게 날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진단했다. 블랙스완(black swan)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혼란을 몰고 오는 위험을 말하고 회색코뿔소(grey rhino)는 일어날 개연성이 높고 파급력이 상당하지만 이를 간과함으로써 발생하는 위험이나 사건을 가리킨다.

◇코로나 블루스(Corona Blues)

‘코로나19’는 개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지하철,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겁난다. 낯선 사람과의 접촉이 두려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 안에만 갇혀 지내거나 집과 직장만을 오간다. 어쩌다 잔 기침이라도 나면 혹시 감염된 게 아닐까 싶어 불안하다. 크고 작은 각종 모임과 공식 행사가 줄줄이 취소돼 TV 앞에만 머물러 있다보니 무기력하다. 스타디움과 실내 경기장에서는 보기에도 낯선 무관중 경기가 펼쳐진다. 생필품 1순위가 된 마스크를 구하러 수백 미터씩 줄을 서거나 이 약국 저 약국을 유목민처럼 떠돌아야 한다. 너도나도 비상식량을 대량 구매하는 바람에 마트 생필품 코너가 동이 나고 언론은 코로나 관련 뉴스로 도배가 됐다. 음악회, 패키지여행, 공연 영화관람 같은 취미 생활을 마음놓고 즐길 수가 없게 됐다. 시도 때도 없이 이웃에 확진자가 있다는 재난 문자가 울려대고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거나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웬만한 상가와 식당은 텅 비어 정적만이 감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중·고교가 22일까지 문을 닫게 돼 전국 맘카페에는 아이들하고 집에만 있고 사람도 못 만나다 보니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힘들다는 글이 수도 없이 올라온다.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세계 곳곳의 공항에서 한국인들이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왕따를 당하고 있다. 해외 허니문 관광지로 신혼여행을 떠난 부부들이 추방되고 부부가 감염됐는데 남편을 잃은 아내는 격리중이어서 배우자의 마지막 길을 배웅조차 할 수 없게 됐다. 무엇보다도 문재인 대통령이 ‘운명 공동체’라고 떠받들던 중국 사람들은 한국인 입국을 거부하고 우리 교민의 집 대문에 대못을 박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악의 방역 실패에 사과 한마디 없이 “사태가 안정되면 한국은 방역 모범사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되레 자찬한다.

11일 오후 현재 코로나19 감염증 확진자는 총 7755명, 사망자는 66명이다. 이들과 접촉한 자가 격리자는 3만명을 넘어섰다. 이들의 가족까지 포함하면 최소 10만명 이상이 세상과 격리된 셈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회적 활동을 줄이는 '사회적 거리 두기'의 확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과 불안감을 겪고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도 나왔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19’와 우울을 뜻하는 영어단어 ‘블루’가 합쳐진 말로 환자와 의료진, 담당 공무원, 자가 격리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 이러한 우울감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어쩌면 이미 ‘코로나 블루’ 단계를 넘어서 대한민국 전체가 ‘코로나 블루스(우울증)'를 앓고 있는 건 아닌가 염려스럽다.

◇르네상스를 촉발한 팬데믹의 원조 흑사병

세계보건기구는 전염병의 위험도를 총 6단계로 나누는데 ’팬데믹‘은 최고 경고단계인 6단계에 해당한다. 팬데믹의 원조는 페스트균에 의한 14세기 ‘흑사병(black death)’이다. 남유럽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유럽 전역을 휩쓸며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500만명의 목숨을 불과 6년 만에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 기록에 따르면 1347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하루에 500명, 프랑스 파리에서는 800명,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600명씩 죽어나갔다. 감염되면 피부가 검게 썩어 들어가면서 3~4일 내에 사망하는 끔찍한 전염병을 막기위해 중세인들은 교회로 달려가 기도를 하고 도시 한복판에 성모마리아상을 세웠지만 소용이 없었다.

흑사병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유럽을 침략한 몽골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흑사병의 발원은 중앙아시아 대평원에 살고있는 들쥐에 기생하는 쥐벼룩이었다. 당시 킵차크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은 크림반도까지 진격했다. 몽골군은 흑해의 도시를 공격하면서 페스트로 죽은 시신을 투석기로 성 안에 던져 보내는 세균전을 시도했다. 이렇게 시작된 흑사병은 흑해를 출발한 선박들과 지중해 해운망을 통해 빠른 속도로 번지기 시작해 불과 몇 년 새 유럽 전역을 공포와 죽음의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흑사병은 당시 유럽의 크고 작은 전쟁을 종식시키며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공포와 죽음의 사신이었던 흑사병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인구의 급격한 감소였다.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임금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농촌을 버리고 떠나는 농노들이 급증했다. 영주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중세 농노제도가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흑사병의 직격탄을 맞은 것은 사회지배층인 지방 영주와 정신적 지주였던 교회다. 봉건제도가 몰락하고 도시자본가가 나타나면서 자본주의가 배태되었다. 전염병 창궐에 무기력했던 교회의 권위가 흔들리며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몽골군은 스스로 몰고 온 흑사병 때문에 막바지 유럽 정벌이 좌절되었지만, 유럽은 몽골의 말발굽보다 더 혹독한 흑사병 쓰나미에 무너져내렸다.민족의 개념이 싹트고 인간 중심의 사상이 출현했다. 노동력 부족이 임금 상승과 농민 폭동으로 이어지며 사회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코로나19 이후의 풍경은···

전염병은 줄곧 인류와 함께 진화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인류와 병원체 간의 진화적 경쟁관계는 인류가 1만년 전 수렵 및 채집. 유목생활을 끝내면서부터 시작됐다. 농경과 정주에 따른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집단생활은 바이러스에게도 개체 수를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까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로마제국 시대, 세균과 바이러스도 그 길을 따라 세계로 퍼져나갔다.

보건위생 개념이 부족했던 전근대사회에선 대규모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했다. 스페인 군대와 함께 아메리카대륙에 상륙한 천연두는 아즈텍과 잉카 문명을 멸망시켰고, 의학계에선 로마제국의 멸망과 십자군의 패배도 말라리아, 장티푸스, 이질 같은 역병에서 원인을 찾는다. 나폴레옹의 이집트·러시아 원정 실패도 군내 내 퍼진 페스트와 발진티푸스 때문이었다. 전염병에 대한 대응의 성패는 정권의 흥망을 좌우하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중국발 ‘코로나19’의 팬데믹이 지나간 뒤, 세상이 아주 많이 바뀔 것이라는 점이다. 전염병은 치명적인 재앙이지만 개인과 사회의 잘못된 관행과 부조리를 일신하며 인류 문명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비대면(Untacting) 사회의 충격적 경험은, 향후 업무·쇼핑·놀이 등 혁신적 스마트라이프를 앞당기는 촉매가 될 가능성도 있다. 코로나19는 21세기 인류에게 다가올 디지털 문명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 르네상스'의 전주곡이 아닐까. 다만 '빗나간 학습효과'가 살짝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마스크 약국 배급제’와 일상화된 줄서기가 중국식 유사 전체주의 시스템을 이 땅에 이식하기 위한 예행연습이 아니기를. <건국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