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영조대왕의 통곡이 들릴듯한 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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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0-03-1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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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길옹주의 궁집과 만석꾼 동관댁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평내동 화길옹주 궁집
영조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오랜 기간(52년) 재위했고 세손(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줘 태평성대를 열게 했다. 화길옹주(和吉翁主)는 영조가 환갑을 맞은 해에 숙의 문씨와의 사이에 얻은 늦둥이다. 열두 딸 중 막내인 화길옹주가 11살 때 남양주 평내리로 시집을 가게 되자 영조는 궁궐의 대목장과 건축자재를 보내 집을 지어줬다.
화길옹주의 남편은 무인집안 출신의 구민화(具敏和)였다. 정조 때 중국에 가던 정사(正使)가 도중에 사망해 대체할 인물을 선정할 때 정조의 인물평에 “외모가 건장하다”는 말이 들어 있다. 옹주는 그와 7년 동안 살며 1남 2녀를 두고 18살에 죽었다. 영조의 상심이 컸다. 옹주의 장례에 호조에서 무려 10만냥을 지출해 정조 때 조정에서 논란이 됐을 정도다. 정조는 조부 때 일이라 거론되는 게 싫었던지 “이는 오로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폐단에 연유된 것"이라고 말하며 넘어갔다.

영조는 막내딸 화길옹주가 시집갈 때 궁궐의 대목들을 보내 궁집을 지어주었으나 옹주는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사진=문화재청]


화길옹주가 죽었을 때 영조는 우리 나이 79세로 팔순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이였다. 영조의 팔순은 조선왕실의 큰 경사였다. 그러나 새해를 맞아 팔순이 됐는데도 영조가 막내딸의 죽음을 슬퍼해 진연(進宴)을 베풀 생각을 하지 않자 세손인 정조가 상소를 올렸다. “50년을 재위(在位)하시고 팔순을 맞는 경사는 천년에나 한 번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기회이니만큼 잔치를 베풀고 잔을 올리는 것이 온 나라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신은 크게 바라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그지없어 삼가 재배하고 상소하여 아룁니다.”

늦둥이 화길옹주 18세 요절에
팔순잔치도 미루며 넋나간 왕   


이 글을 읽고 영조가 “너의 글을 보니 마음 씀이 가상하구나”라며 소청을 윤허했다. 왕세손 정조와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엎드려 절하며 오래 살기를 축수하는 뜻에서 천세(千歲)를 외쳤다.
평내동 일대는 능성 구씨 집성촌이었다. 화길옹주가 살던 집은 나라에서 지어주었다 하여 궁(宮)집으로 불리었고 1984년 대한민국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세월이 흐르며 궁집의 소유주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러다 1960년대 후반 궁집이 요정으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다. 이 소식을 들은 권옥연(화백) 이병복(무대미술가) 부부가 아파트를 판 돈으로 낙찰받아 한옥박물관을 겸한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었다.

궁집은 사방이 막힌 'ㅁ' 자 집으로 보온 효과가 높다. [경기문화재단]


궁집은 ‘ㅁ’ 자(字) 집이다. 북부 산간지방에는 궁집처럼 추위와 바람으로부터 보온(保溫)을 위한 ‘ㅁ’ 자 집이 많다. 축대와 계단을 쌓은 석재는 궁궐에서 가져와 일반 사가(私家)와 달리 크고 네모 반듯하다. 기둥에는 두 줄의 실 모양인 쌍사(雙絲)가 돋을새김으로 나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마루로 연결돼 신발을 신지 않고 옮겨 다닐 수 있다. 사랑채 뒤편에 있는 우물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석재 배수로를 따라 흐르다가 사랑채 뒤쪽으로 흘러나간다.

궁집의 사랑채는 창덕궁 낙선재와 외양이 비슷한데 80년 먼저 지어졌다. 사랑채를 누대로 만들어 낙선재보다 규모는 작다.  [사진=김세구]


사랑채 누대(樓臺)의 문을 열면 뜰의 나무들과 앞산 풍경이 들어온다. 누대 규모가 작지만 조형미가 있다. 창덕궁 낙선재와 생김새가 유사한데 궁집이 80년 먼저 지어졌다. 궁집 공간에서 유일한 초가는 튼튼하게 지었다. 궁집의 일을 거들던 아랫사람들이 거처하던 공간이다.
화길옹주는 궁집에서 50m가량 떨어진 언덕에 묻혔다. 사랑채 누대에서 가족들이 문을 열면 바라다보이는 곳이다. 남편도 화길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28년 뒤에 아내 곁에 잠들었다.
평내동에 2000년대 택지개발이 이뤄지면서 후손들이 화길옹주와 구민화 부부의 묘를 음성군 생극면 공원묘원으로 이장했다. 문화재청이 이장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남양주시에 알려왔다고 한다. 평내마을 아파트 단지 근린공원에는 ‘1772년 화길옹주 이 터에서 잠들다’고 적힌 작은 묘터비가 남아 있다. 궁집과 옛주인의 묘가 같은 자리에 남아 있었더라면 스토리가 어우러지는 공간이 됐을 터인데 이장을 방치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2021년 궁집 공식 개관에 맞추어 후손들과 협의해 화길옹주 부부의 묘를 다시 옮겨오는 사업을 추진하면 좋을 것 같다.
권옥연 이병복 부부는 각종 개발로 사라져가는 한옥들을 9채 구입해 궁집 옆에 배치했다. 신태악(辛泰嶽) 변호사 집은 서울 무교동에서 옮겨왔다. 일진회 총재를 했던 송병준(宋秉畯)이 살던 ‘용인집’은 영동고속도로 양재인터체인지 공사로 해체될 운명이었던 것을 매입했다. 일제강점기 세도가의 집이어서 궁집보다 칸수는 많으나 부재의 크기는 작다. ‘군산집’은 군산상고 야구연습장이 들어서 없어질 위기에서 사들였다. 집 두개가 이어진 군산집은 마당이 넓어 각종 예술 공연이 열렸다. 다실(茶室)은 낙성대에 있던 강감찬 장군 유적을 매입해 옮겨온 것이다.

궁집 문화공간 안에 있는 6층 석탑. 이곳에는 아름다운 나무와 석물이 많다. [사진=김세구]


궁집 터 안에는 권 화백 부부가 전국에서 수집한 불상, 석탑, 석양(石羊) 문인석을 곳곳에 배치했다. 아름다운 불상이 많다. 특히 6층 석탑의 조형미는 발군이다. 아스팔트 도로가 생기기 전에 평내리 사람들이 다니던 마을길과 수로도 그대로 살려 미술가적 안목으로 잘 다듬어놓았다.
두 부부는 궁집 주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면서 무의자(無衣子) 재단을 설립했다. 무의자는 권 화백의 아호. 옷이 없는 사람, 모든 욕심을 벗어던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의자 부부가 살아 있을 때는 이곳에서 연극 음악공연, 영화촬영, 학술모임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렸다.
궁집 문화공간을 가꾸던 권 화백이 2011년 88세로 작고했고 아내 이 대표는 2017년 91세로 세상을 떴다. 남양주시 고현수 학예사는 "궁집에 와볼 때마다 이병복 할머니가 혼자서 잡초를 뽑고 있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두 부부는 죽어서 궁집 뒤 언덕에 수목장을 했다. 1996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옆 자리다. 봉분은 없고 이들 부부의 생몰연도를 적은 비가 돌무더기에 둘러싸여 있다.
2019년 후손들과 무의자재단은 궁집과 부속건물 토지 전체를 남양주시에 기증했다. 권 화백 부부가 평생 가꾼 문화 자산을 시민들에게 남겨준 것이다. 몇해 전에는 절도범들이 고가구와 석물들을 차량을 이용해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현재는 비공개로 관리하고 있다. 도둑들이 빼어난 작품만 골라 트럭에 실어갔을 테니 무의자 부부의 마음이 더욱 아팠을 것이다. 
 

주인이 거주하는 사랑채는 높은 축대 위에 지어져 위계질서를 분명히 했다. 만석꾼 집이라 벼를 저장하는 고방이 많다. [사진=김세구]

내곡리 연안 이씨 동관댁
궁집에서 서북쪽으로 17㎞가량 달리면 진접읍 내곡리 연안 이씨(延安李氏) 동관댁이 나온다. 이 일대에는 남양주에서 가장 너른 들이 있고 들 가운데로 왕숙천이 흐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권농(勸農) 행사차 가끔 모를 심으러 왔던 들녘이다.
이 집은 대대로 만석꾼 집안이었다. 곡식을 보관하는 고방이 7개나 된다. 만석꾼의 후손인 이덕승씨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을 두었다. 이덕승은 노년에 250년 전 8대조가 지은 집을 떠나 서울 돈암동 큰딸 집에서 살다 세상을 떠났다. 얼마 전까지 이덕승씨 큰사위의 이름을 따 '여경구 가옥'이라고 불렸으나 내곡리에 사는 연안 이씨들이 꾸준히 민원을 제기해 안내판 등의 공식 명칭이 '연안이씨 동관댁(東官宅)'으로 바뀌었다. 연안이씨 집성촌의 자랑거리인 중요민속문화재(제129호)가 타성바지의 이름으로 돼 있는 것이 주민들은 마뜩지 않았을 것이다.

공조좌랑 이하조가 살았던 집일까
280년 전 지은 만석꾼 연안 이씨의 집


‘동관’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옛날부터 주민들 사이에서 '동관댁'으로 불렸다

동관댁의 꽃담이 소박하게 아름답다. [사진=김세구]


는 것이다. 조선시대 육조(六曹)의 하나인 공조(工曹)를 동관(冬官)이라고도 불렀다. 공조는 궁실과 관공서의 토목공사, 피혁, 공예품의 제작, 야금, 도기, 산림, 선박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속종 때 공조좌랑(정6품)을 지낸 이하조(李賀朝)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 동관댁이라고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조선시대에 東官이란 아문(衙門·관청)은 없었으니 冬官이 맞다.
 

동관집의 우물은 형형색색의 돌로 담장을 쌓아 멋을 부렸다. [사진=김세구]


진입로가 있는 서쪽으로부터 대문채 사랑채 곳간채가 차례로 들어서 있다. 사당은 사랑채 뒤 언덕에 있다. 사랑채는 높은 기단 위에 서있어 툇마루에 앉으면 안산인 천마산과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성들이 거주하는 안채에서는 바깥이 안 보이고 하늘만 보인다. 남녀의 공간을 분리하는 성리학의 남녀유별(男女有別)이 주택 구조에 반영돼 있다. 안채에는 사랑채나 솟을대문을 통하지 않고 아랫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이 있다. 소통의 숨구멍을 열어놓은 셈이다. 사랑채가 높은 축대 위에 앉아 행랑채를 내려다보는 것도 상하와 반상(班常)의 위계질서를 세우려는 뜻이다.
안채 측벽의 꽃담이 소박하게 아름답다. 우물의 돌 담장도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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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그룹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
2.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남양주를 거닐다, 남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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