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류영모] (30) 종교는 셀프다, 직접 신을 만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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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03-1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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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30)35년 '영성의 스승' 류영모와, 그를 모신 현동완

오른쪽부터 함석헌, 김흥호, 류영모, 현동완, 방수원.[사진=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이 땅에서 학력과 학벌은 한 인간의 평생능력을 보장하거나 해명하는 놀라운 증거능력을 지닌다. 이 뿌리 깊은 관행이 일정하게 한 사람의 이력을 쉽고도 명쾌하게 파악할 수 있는 효율을 제공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외국도 비슷한 현상들이 있지만, 유독 견고한 선입견이 형성되어 학교과정 졸업 이후의 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되어 있는 사회적 체계로는 이 나라가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다석 류영모는 예수와 같은 메시아를 자처하지도 않았거니와 스스로 개창한 교의를 바탕으로 한 교회를 만들어 사상의 리더가 되고자 한 적도 없다. 생시에도 오히려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거부했으며, 그런 집단적인 신앙행위가 도움이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은자처럼 단호한 확언을 내놓은 뒤 내내 깊고 견고한 침묵으로 고독한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시대의 필연적 요청이었겠지만, 학교에서 사도(師道)의 길을 걷는다. 1909년 19세 때 중학교 과정 재학생 신분으로 급한 권유를 받고 양평의 신설학교에서 교원직을 시작했던 그는 1910년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 2년간의 교직 생활을 한다. 이후 1921년 31세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고 1년을 근무한다. 오산학교 교사와 교장 생활을 합치면 3년여 동안의 기간이 된다. 이때의 교육활동은 그야말로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 가르치는 일을 통해 스스로도 지적이면서 영적인 성장을 했으며 또한 많은 후학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학벌 만능사회와 다석의 이력서가 뜻하는 것

당시는 민족학교를 위한 여건들이 갖춰져 있지 않았기에 교육자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은 때였다. 학생이던 류영모가 차출되어 갑자기 교육자로 바뀌는 건 그런 사정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력서'를 내밀었다면 교사 자격 요건이 한참 미비할 수밖에 없다.

류영모는 10세 때인 1900년부터 2년간 수하동소학교를 다녔고, 1903년부터 3년간 서당에서 맹자를 공부했으며, 1905년에 경성학당(한성일어학교)에 들어가 2년간 일본어를 공부했다. 1907년에 경신학교에 입학해 성경과 한문 공부를 한다. 경신학교 3학년 때 교사로 차출되었다. 그의 학력은 대략 중졸 정도로 볼 수 있다. 오산학교 교사직을 물러난 뒤 도일(渡日)해 유학준비를 위한 공부를 한 때도 있었지만, 도중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한 바 있다. 한편 신앙 이력을 보면, 1903년 YMCA에서 기독교를 접한 뒤, 1905년 연동교회에서 김정식을 통해 정식으로 기독교 신도가 된다. 1911년 오산학교를 나올 무렵, 그는 교리신앙을 탈피했다.

중간중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진행된 학력 자체가 물론 그의 지적 성취의 전부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얻어진 것도 있겠지만, 많은 지식과 성찰은 스스로의 학구열에서 증강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 점이 류영모의 위대한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학교가 그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가 학교를 만들었다. 스승들이 그를 이끌었던 점도 있지만, 그보다 그는 스스로 배움의 감관(感官)을 열어놓고 그에게 다가온 지식과 정보와 통찰들을 적극적으로 섭렵했기에 학문과 사상과 안목(眼目)에서 괄목할 만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35년간 'YMCA연경반의 스승'이 되다

류영모의 성취를 어떻게 학교 이력으로 견적 낼 수 있겠는가. 류영모의 수신(修身)을 어떻게 외형적인 증거들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학력과 학벌에 중독된 한국사회에 류영모의 배움과 가르침은 교육의 새로운 길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31세의 류영모가 오산학교로 들어왔을 때, 그가 딛고 있던 '경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당시 학생들도 짐작할 수 없었겠지만 후세의 우리 또한 가히 그 수심(水深)을 짚기 어렵다. 그는 단순한 교장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읽는 '성령의 선각자'였다.

오산학교 교장직을 벗어난 지 6년 뒤, 류영모에게 인생의 중대한 '미션'이 다가왔다. 1928년 YMCA 간사이던 현동완이 그의 적선동 집을 찾아와 종로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강의를 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 전해인 1927년, YMCA전국연합회장이자 언론인(조선일보 사장)이며 민족운동가이던 이상재(李商在)가 76세로 타계한 뒤, 정신적인 빈자리를 채워줄 명망 있는 인사가 필요하던 때였다. YMCA 초대 총무를 지낸 김정식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부터 시작한 류영모의 연경반 지도는 식민지배 시대를 넘어 35년간(1963년까지) 지속된다.

시대의 스승, 생각의 리더, 신앙의 사표(師表)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음 속에서 샘솟는 말들을 전하는 '소명'을 실천할 기회였다. 기독교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기존 지식을 전달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진정한 하느님의 메신저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가르침이란, 무엇인가를 머릿속에 넣어주는 일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깨닫는 방법과 방향을 일깨워주는 것임을 류영모는 알고 있었다.

은둔은 몸의 위치가 아니라 영혼의 위치다

종교는 자율(自律)이다. 누가 대신해줄 수 없기에 오로지 스스로 해야 하는, 신과의 대면이다. 밥을 먹어줄 수 없고 오줌을 누어줄 수 없듯이,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가장 절박하고 가장 긴급하며 오직 한번 뿐인 '할 일'이며 '볼 일'이다. 그는 이 하나를 진북의 별처럼 접한 뒤 마치 이미 '없는 세상'처럼 자기의 길로 걸어나갔다. 도시에 나와 있을 때도, 은처에 들어앉아 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 땅의 역사에서 거의 보지 못했던 '완전한 은둔자(隱遁者·Hermit)'였다. 은둔은 몸의 위치가 아니라 마음의 위치이며, 영혼의 위치다. 그가 세상에 나와서 했던 말도 은둔한 영혼의 말이었다. 굳이 사람을 피해 숨은 것이 아니라, 호젓한 어둠을 찾아 영성의 길을 낸 것이다.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며 수신(修身)과목을 맡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진정한 수신'은 인간이 만나야 할 확고한 진실에 대한 것이었다. 단호하게 그 길에 대해 역설하던 그는 일제의 압박으로 다시 교장 자리를 내려놓고 은거에 들어갔다. 그를 다시 불러낸  YMCA 총무 현동완(玄東完).

현동완은 그 스스로 풍운의 역사 속에서 성자의 삶을 보여주었지만, 평생 성자를 찾아 헤맨 사람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성자 이세종을 찾아 전라남도 화순(도암면 등광리)으로 찾아간 일화는 유명하다. 이세종은 이미 타계한 뒤였고, 제자 이현필을 만나 성인의 자취를 잠깐 느꼈을 뿐이다. 현동완 부부는 '이세종 기념사업'에 그동안 모았던 돈을 내놓았고, 제자 최흥종·정인세·이현필은 작은 예배당을 짓는다.

이 땅의 성자를 찾으려고 횃불을 든 사람, 그게 바로 현동완이었다. 1928년 그가 류영모를 YMCA연경반 강사로 모셨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은둔자를 찾아낸 그는 이 땅의 진정한 복음이 될 '영성의 언어'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류영모는 이런 말을 했다.

현동완의 죽음 이후 눈물을 흘린 류영모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은 그 가슴속에 생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을 찾는 이는 말을 뱉어내고 싶어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성령이 있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과의 연락에서 성령이 건네주는 것이 생각입니다. 성령이 건네주지 않으면 참된 생각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에 사로잡힌 사람은 못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잊어버리도록 하느님을 생각할 때 하느님이 오십니다. 생각이 성령인가. 나는 모릅니다. 나오는 것은 생각이고 오는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내가 낳았지만 나를 닮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성령의 씨는 하늘에서 옵니다. 내가 몇십 년 동안 인생에 참여해서 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동완이 타계했을 때 장례에서 조사(弔辭)를 쓰고 읽었던 사람은 류영모였다. 9살 아래인 현동완의 죽음 앞에서 그는 의연했지만, 나중에 구기동 자택에서 현동완의 얘기가 나왔을 때 눈물을 보였다. 고요한 은둔자에게도 깊이 마음으로 오간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류영모에게 '35년 종교강의'의 길을 내준 현동완의 삶에 대해 짚고 가는 게 예의일 것 같다.

현동완은 1899년 서울 마포구 현석동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서울중앙YMCA학관을 거쳐 이듬해 YMCA 체육부 간사로 취임한 뒤 평생을 YMCA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다. 그의 큰아버지 현흥택은 구한말 군인으로 전권대사 민영익을 수행해 미국과 유럽을 여행했다. 1896년 독립협회 창설에도 활약을 했고,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될 때 자문위원을 맡았다. 1907년 기독교회관을 지을 때 대지 400평을 기증했다.

4년 미국생활에서 '경건주의' 신앙혁신을 접한 현동완

1916년 서울YMCA 실내체육관이 생겼고, 현동완은 YMCA농구팀 감독 겸 선수를 맡아 일본 원정경기를 펼쳤다. 이 경기에서 2승3패의 놀라운 전적을 남겼다. 1920년 그는 미국 클리블랜드YMCA에 파견되어 4년간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현동완은 퀘이커교도와 깊이 사귀었고 벽지의 수도원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이때 그는 경건주의(Pietism)를 접한다. 이 신앙운동은 17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으로 루터가 주창했던 '윤리주의적 신앙'의 재기를 추구했다. 즉, 교의(敎義·공인된 종교적 가르침)의 승인만이 아니라 성서를 체득하여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체험을 존중했다. 금욕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적 실천이 강조되었고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을 통한 인간변혁과 세상변혁을 꿈꾸었다. 경건주의는 교회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내의 자주적 집회인 '소교회'를 만들어 활동한 게 특징이다. 현동완은 1926년 귀국해 이 경건주의를 국내에서 실천하기 시작한다.

YMCA소년들로 구성된 '평화구락부(Peacemakers'club·PMC)'를 창설한 것이 그 첫걸음이다. 매주 금요일에 집회를 열고 수련과 사회봉사를 했다. 1차세계대전이 끝난 11월 11일에는 매년 평화를 기리는 대규모 행사를 개최했다. 연말에는 본관 로비에 "동지여, 빈민을 위하여 사흘간 길 위의 거지가 되자"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한 개에 5전하는 메달을 파는 이른바 '거지운동'이었다. 1930년의 기록에는 이 행사로 800여원을 모아 서울 인근의 극빈자 400여 가구에 전했다고 나온다.

전쟁 직후 난지도에 소년도시를 만들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평화봉사활동을 '참운동'이라는 사회운동으로 발전시킨 것도 현동완이다. 그가 간청해서 시작한 류영모의 '금요강화'는 이 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교육프로그램이었다. 1935년 현동완은 YMCA 총무를 맡으면서 참운동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일제 극성기의 경제적 침체와 다양한 곤경으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1937년 그는 YMCA를 떠나 함북지방에 은둔한다.

해방 후 현동완은 미군정청 교통부장 고문으로 일하다가 1948년 재건된 서울YMCA 총무로 취임한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2년 삼동부녀회관을 설립해 전란에 고통받는 여성들을 구호했고, 전쟁이 끝난 1953년엔 난지도 100만평을 사들여 삼동소년시(보이즈타운)를 지었다. 전후 거리를 떠도는 고아들을 데려와 양육하며 민주시민으로 육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
 

'오며 감사, 가며 감사, 있어 감사'라는 현동완의 글귀가 씌어진 강의장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류영모.

그는 소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며 '오며 감사, 가며 감사, 있어 감사'의 마음을 강조했다. 류영모의 강의실 뒤쪽에 붙어 있던 그 표어가 바로 현동완의 감사생활 신조이다. 그는 김삿갓처럼 한자어를 활용해 우리말을 함께 표현하는 데도 능했다. 교육생들에게 써준 '多白衣考見大慈(다백의고견대자)'는 "우리 민족이 흰옷을 많이 입는 점을 고려할 때 큰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라는 의미지만, "다들 배기고 (힘들지만) 견디자"라는 응원이 숨어 있다. 또 이런 7언절구도 썼다, '憂巨志國眼目高 建邦之計養淡輩(우거지국안목고 건방지계양담배)'는 "나라를 걱정하는 큰 뜻, 안목이 높구나/나라를 세울 뜻으로 맑은 후배를 키워내는구나" 이런 뜻으로 읽히지만, 소리나는 대로 읽어보면 "(이 나라 사람이) 우거지국 안 먹고 건방지게 양담배(나 피운단 말이냐?)"라고 힐난하는 시다. 현동완은 이렇게 뛰어난 언어감각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난지도 삼동소년시는 1969년 물난리 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현동완은 이 뜨거운 실천의 열정으로 '고아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는다.

서울YMCA 내부의 이념대립이 격화되던 1957년 그는 총무직을 사임했다. 1959년부터 4년간 삼동소년시의 단칸방에서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그는 1963년 눈을 감는다. 그와 함께 삼동소년시 활동을 했던 목사 황광은(黃光恩)은 이렇게 추모했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천당 속에 높이 앉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주님께 미친 것입니다. 그의 생애 40년은 오로지 청소년교육에 몸을 바친 것입니다. 그는 20세기 종로의 성자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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