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 과학의 시선]
등나무를 자르고 왔다. 내가 사는 서울 북한산 산동네에서 등나무는 숲의 악당이다. 집 주변이 온통 등나무 밭이 되어 있다. 몇년 전 도심을 피해 이사 왔을 때, 은행나무들이 집 주변에 병풍을 이루고 있어 좋아 보였다. 그 은행나무들을 등나무가 뒤덮고 있어 나무들은 거대한 벽처럼 보였다, 여름철 집에 들어오는 직사광을 무성한 잎들이 가려줘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사 와서 정신 차리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등나무가 쇠사슬을 칭칭 감고 은행나무들의 몸을 조이고 있었다. 은행나무들은 가지가 휘어지고, 부러지고, 죽어가고 있었다. 톱을 샀다. 등나무 가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숲의 무법자를 응징했다. 그러면서 궁금한 게 있었다. 등나무는 왜 이렇게 이기적인 전략을 선택했을까? 다른 나무와 공존할 수 있을 텐데, 왜 혼자만 잘 살겠다고 다른 나무를 결국 죽이는 것일까?
은행나무는 운이 좋았다. 냄새는 고약하나, 가을철 노란색으로 물든 잎이 아름다워 지구의 사회적 지배자가 된 인간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불운한 종이 많았다. 멸종되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과 식물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멸종 동물 이야기는 많이 들었기에 우리는 대체로 무덤덤하다. 나와 별반 상관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양쯔강돌고래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은 가장 최근에 접한 멸종동물 사례 중 하나다. 잠시 애도하고 기억에서 지웠다.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코뿔소가 몇 마리 안 남았다고 한다. 또 아프리카 대륙의 검은코뿔소는 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라는 옛 미국 대통령이 탄자니아의 항구 몸바사에 도착했을 때 그 넓은 땅에 100만 마리가 살았다. 그러나 지난 2000년에는 2400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에드워드 윌슨의 ‘생명의 미래’).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하고 우리는 생각한다.
가령, 서울에는 호랑이가 150년 전에도 살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5년(1868년) 9월 20일자는 “훈련 도감(訓鍊都監)이 ‘북악산(北岳山)의 윗봉우리에서 3마리의 호랑이를 사냥하여 잡았습니다.’라고 아뢰었고, 총융청(總戎廳)이 ‘수마동(水磨洞) 근처에서 2마리의 호랑이를 잡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라고 적고 있다. ‘북악산’은 청와대 바로 뒷산이고, ‘수마동’은 오늘날 서울 종로구 세검정이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다.
호랑이와 같이 살자는 얘기를 하려는 건가? 호환(虎患)마마를 한국인이 얼마나 두려워했 던가. 그런 건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야 할 게 있다. 다른 야생 동물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유일하게 잘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이 식용으로 먹을 닭과 소, 돼지만 지상에 남아 있는 지구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은 낯선 미생물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야생 동물 멸종 급증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미생물학자에 따르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간의 몸에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이란 그들에게는 낯선 땅이다. 인간 신체에 침투했다가 살아남을지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미지의 땅이다. 그런데 인간 몸에 진입하는 건,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데이비드 콰먼의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갈 데가 없는 건 우리 인간이 지구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돌아보면 안다. 지구 표면은 인간에 의해 완전히 재편되었다. 수도권을 보자. 서울과 인천, 수원은 하나의 거대한 생활공간이다.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자연이 없고, 서울과 수원 사이에 빈 공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 말고 다른 동물을 위한 공간은 없다.
예컨대 내 집 옆의 숲에는 청설모 두 마리가 가끔 보인다. 이들에게 필요한 일정한 공간 크기가 있다. 이게 크기가 되지 않으면 청설모는 살 수 없다. 번식을 하지 못하고 후손을 낳지 못하면 대가 끊긴다. 이 숲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청설모가 몇달 보이지 않으면, 숲을 떠났나 해서 안쓰럽다. 서울에 살고 있는 동물 수가 꾸준히 줄어드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넘쳐난다. 지구는 만원이라는 얘기가 나온 지는 오래 됐다. 현재 인구는 75억명이다. 이 인구는 2100년이면 100억명에 접근한다는 예측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입장에서 보면 인류 규모는 지구 역사상 처음 보는 현상이다. 오래된 삶의 터전인 동물들이 사라지는 대신 나타난 새로운 동물이다. 이들은 지구 모든 곳에 따닥따닥 밀집해 살고 있다. 신천지 교회의 행사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그들이 비좁은 장소에서 붙어 앉아 종교행사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러니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바이러스 입장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신천지다. 인간이란 존재가 바이러스에게는 신천지이다. 신천지 교회가 코로나19를 대량 확산 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손가락질했지만, 우리 스스로도 그 손가락질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국립공원 제도는 19세기 후반 미국이 떠올린 위대한 아이디어다. 국립공원은 ‘미제(美製)’다. 1872년에 생긴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자연 생태계를 그나마 보존할 수 있었던 건 국립공원 제도의 기여가 작지 않다. 각국이 이 제도를 도입했고, 서울 도심 북쪽의 북한산도 바로 국립공원이다. TV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아프리카 사파리도 국립공원 내부다. TV 속에 나오는 코끼리, 사자, 치타, 하이에나, 누 떼를 보고 자연생태계가 말짱한 거 아니냐고 생각했다면 그건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세렝게티와 같은 국립공원 제도는 자연생태계 보호에 일정한 기여를 했으나, 충분하지 않은 걸로 드러났다. 코로나19 때문이기도 하고, 그전부터 진행되어온 급속한 대량멸종 경고 신호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는 지구역사상 6번째 ‘대멸종’을 향해 우리는 가고 있다고 한다. 이를 뒤집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19세기 후반의 국립공원 발상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제안이 생각난다. 윌슨은 “지구의 절반을 비우자”라고 말한다. 지구의 절반에는 인간이 살지 말고, 자연생태계를 위해 온전히 비워두자고 한다. 그의 생각은 ‘지구의 절반’이라는 책으로 2016년에 한국에도 소개돼 있다. 참으로 담대한 발상이다. 실현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담대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에 이처럼 담대한 전지구적 발상을 한 사람이 있는가? 없다.
‘지구의 절반을 비우자’는 아이디어를 실현할 방도가 없을까를 생각해 보자. 지구 땅의 절반을 뚝 잘라 유라시아 대륙을 모두 비우자 라는 식으로는 일을 할 수 없다. 국가들 단위에서 할 일을 생각하면 방법은 있다. 각 국가가 영토의 절반을 자연생태계를 위해 비워가는 쪽으로 정책을 밀고 나가면 된다. 이게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의 구체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윌슨의 ‘지구의 절반’은 한국의 그린벨트와 같은 맥락에 있다. 그린벨트는 한국이 자랑하는 자연생태계 보호 정책이다. 그린벨트 정책 강화는 그 ‘지구의 절반을 비우자’ 길로 가는 출발점일 수 있다.
궁극적인 대책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 코로나19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이미 선택한 방법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핵심은 인간 활동의 감소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거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는 없다. 생태계를 무차별 착취해온 인간의 행동은 감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등나무와 다름없다. 생태계를 무차별 약탈만 한다면, 누군가가 톱으로 인간을 잘라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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