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노보다 더 심한 어른
류영모는 김교신의 성서조선 집필 부탁을 거절했고, 함께 모임에 참여해서도 별로 말이 없었다. 우치무라의 가르침으로 기독교의 관(觀)을 세운 김교신은 사도신경에 입각한 정통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기에, '괜히 충돌하여 남의 잘 믿는 신앙을 흔들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에서 류영모는 논쟁적일 수 있는 대목에서 입을 다문 것이었다. 이것을 알 리 없는 김교신이 소극적인 류영모 스승에 대해 서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1935년 2월 3일 성서조선에 쓴 김교신의 글이 그런 정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내가 사상에 관해서는 류영모 선생을 사사(師事·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음)한 바 적지 않았음을 감출 수 없다. 고귀한 사상을 품고도 좀처럼 말도 안 하고 글도 쓰지 않는다. 실상인즉, 물질적인 수전노(守錢奴·구두쇠)보다 더 심한 어른이라는 원망이 가슴에 사무치는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류영모는 그러나 김교신을 알게 된 지 4년쯤 되었을 때인 1931년, 성서연구 모임에서 조금씩 입을 열었던 것 같다. 김교신의 일기에 이런 글이 보인다. "산상수훈(마태복음) 7장 1~15절을 공부. 류영모 선생이 내참(來參)하여 금일 공부에 대하여 독특한 해석을 첨가하여 우리에게 계발(啓發·일깨워줌)을 더하심이 심대하셨다. 동양 사람이 가장 심원하게 기독교를 이해하리라는 추측은 필경 적중할 듯하다."
몹시 말을 아끼던 류영모가 이날 성경에 대해 해석을 한 것은 김교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예수의 직접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는 대목)이 그에게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인 점도 있었을 것이다. 마태복음 5~7장은 기독교 복음의 정점이다. 그중에서 7장 1~15절은 '비판'에 대한 내용과 '상대에 대한 대접'을 다루고 있으며 거짓선지자를 언급하는 장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外飾)하는 자(위선자·hypocrite)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 7:1~6)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 7:7~1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 7:13~15)
류영모가 이 대목에 대해 어떤 독특한 해석을 첨가했는지 김교신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동양인이 기독교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 비춰보면, 공자의 '서(恕·용서함)'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제자가 평생동안 수행에 쓸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공자는 '서(恕)' 한 글자를 말해준다('논어' 위령공편). 저 말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 사람의 마음(心)이 같아지는(如) 상태'를 말하며 곧 용서를 일컫는다. 그러면서 유명한 한 마디를 한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
이 말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과 정확히 맥락을 같이한다. 이렇게 동양의 사유체계로 성서를 다시 읽음으로써 인간인식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면모를, 류영모가 제자들에게 살짝 보여주었을 것이다. 비판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은 함부로 이단을 핍박하고 이견을 제압하는 행위들에 대한 충고이다. 제자들은 이런 '해석'을 듣고 나서, 이것을 어떻게 생활화할 것인지 밤길을 걸으며 논의했다고 김교신은 적어놓았다.
요한복음 3장 16절 강연 사건
김교신은 이듬해 1월 1일 저녁에 류영모가 경영하던 '경성제면소'에 새해 문안인사를 하러 갈 정도로 스승에 대한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류영모는 그에게 신앙사상에 대해서만은 '한계'를 넘는 말은 하지 않았고, 성경 대신 노자나 논어를 언급하며 의미를 확장해서 설명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다가 1937년 1월 3일 서울 오류동에서 열렸던 성서연구회 모임에서 류영모는 김교신의 간청에 못이겨 요한복음 3장 16절을 풀이한다. 좌중이 모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날 김교신의 일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류영모 선생의 독특한 요한복음관을 듣고 일동의 논의가 분분하였다. 류 선생은 특이한 해석을 갖고 계시다. 남의 신앙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자기의 성서관을 쉽게 공표하지 않는 터인데, 수년 동안의 간청에 의하여 금일 요한복음 제3장 16절을 설명하시니 처음 듣는 이들이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날 참석자였던 송두용은 이렇게 말한다.
"류영모 선생의 말씀을 듣고 나서 아이스크림 통을 휘돌리는 것처럼 사람의 머리를 휘돌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것일까.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또 다른 성서연구회 회원인 류달영이 자세히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1937년 정초에는 경인선 오류역 근처에 있는 송두용 선생 집에서 겨울철 성서연구 모임을 가졌습니다. 다석 선생은 북한산록 구기리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선생은 모임에서 김교신의 간청으로 성경말씀을 설(說)하게 됐습니다. 말씀의 내용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해설이었죠. 선생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정통을 자처하는 교회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주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느님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는데, 다석 선생은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했습니다. 다석 선생은 '하느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을 사람의 맘 속에 넣어주었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씨)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무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요한1서 3장 9절) 사람은 제 맘 속에 하느님의 본성을 키워서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석가의 불성(佛性)과 공자의 인성(仁性), 예수의 영성(靈性)이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미소, 송두용은 당황, 류달영은 골똘
류영모의 말이 끝나고 난 다음의 상황에 대해서도 류달영은 생생히 증언했다.
"이제까지 그 모임에 나온 사람들은 무교회신앙이라 자처했지만 교회신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만이 하느님의 아들로 최고의 구세주이고 석가나 공자는 예수보다 훨씬 아래 사람으로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다석 선생이 예수, 석가, 공자가 모두 똑같다고 하자 좌중이 웅성거렸고 여기저기서 질문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김교신이 질문을 막았습니다. 김교신은 사람들에게 다석 선생의 성경풀이는 아주 높은 차원에서 보고 하는 말씀이므로 그 말씀을 알아들을 만한 귀를 따로 갖고 듣지 않으면 그 참뜻을 바로 깨닫기는 어려우니 각자 마음에 간직하고 돌아가서 오랫동안 되새겨 보라고 타일렀죠. 함석헌은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미소만 짓고 있었고, 송두용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는 김교신이 깊은 뜻이 있다고 하니 그렇게 믿고 두고두고 생각해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다석 선생은 그의 말을 듣고 의아해하는 여러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혼자서 특유의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류영모의 이 강의는 제자들을 어떻게 바꿨을까. 김교신의 말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돌아가 오랫동안 새긴 이들'은 누구였을까. 김교신 자신은 8년 뒤인 1945년 44세로 타계했기에 '오랫동안' 새길 시간을 갖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과 류달영은 류영모의 뜻을 헤아려 자신의 생각을 바꿔나갔다.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무교회주의 사람들은 내가 십자가 신앙을 떠났다고 합니다. 십자가 없이 어떤 그리스도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해석을 나에게 맞도록 제 나름대로 달리한 것뿐입니다. 나는 우러러보는 십자가보다는 내 등에 지자는 십자가 편에 섭니다. 그 점에서 나는 류영모 선생이나 간디 편에 가깝습니다." 교회의 속죄신앙을 벗어버렸다는 뜻이다.
류달영은 사도신경을 믿지 않는다는 언급까지 했다. "김교신의 정통신앙을 나는 그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서의 예수 탄생, 예수의 육체 부활, 예수의 재림 등을 나는 그대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김교신의 정통신앙은 과연 사도신경 그대로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김교신은 1936년 1월 일기에 부활의 진리처럼 고귀한 것은 없으나 부활론처럼 위험한 것도 없다고 썼습니다. 김교신이 나처럼 50세를 넘겨 살았다면 30세 전후의 정통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왔을 것인지 확언하기 어렵습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는 전체의 영원한 생명이지 어떤 시대 어떤 인물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고 그를 쳐다보는 것은 예수의 몸껍질(色身·물질적 존재로서 형체있는 몸)을 보고 따르자는 게 아니라 예수의 속알(얼나)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예수의 얼나만 말고 먼저 제 맘속의 얼나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의 육신도 껍질이지 별 수 없습니다. 예수의 피와 몸도 다른 사람과 똑 같은 피와 몸입니다. 속알이 하느님과 하나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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