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류는 동에서 흐르고, 문명은 서로 흘렀다
스페인 이슬람 유지됐다면 현대도 일찍 열렸을 것
“입구인가, 출구인가?” 지중해의 서쪽 끝 지브롤터 지도를 보면서 물어봅니다. 동쪽 끝 이스탄불은 흑해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곧 막힙니다. 좁게나마 대서양으로 열려 있는 지브롤터가 출구 같습니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해류의 흐름으로 보면 지브롤터는 지중해의 입구입니다.
“흑해는 수분 증발이 더뎌서 급류가 형성되고 그 물이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 지중해에 들어오지만 4%에 지나지 않는다. 증발한 지중해 물은 대서양이 보충한다. 대서양의 물길은 지브롤터에서 동쪽의 아프리카 해안선을 끼고 이스라엘과 레바논을 거쳐 키프로스 섬, 에게해, 아드리아해, 티레니아해를 돌아 프랑스와 에스파냐 해안선을 따라 다시 지브롤터로 돌아왔다.” <위대한 바다(데이비드 아블라피아, 이순호 역, 책과 함께)>
지중해의 문명은 해류와는 반대로 흘렀습니다. 그리스 문명은 지중해를 따라 서진(西進)했습니다. 훨씬 나중에 시작된 이슬람 문명도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리스 문명은 지중해 북쪽 해안선을 따라, 이슬람 문명은 남쪽의 아프리카 해안선을 따라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를 거쳐 지브롤터를 통해 북쪽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차이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중해는 입구일 겁니다. 어머니들의 자궁을 연상케 하는 지중해의 모양 때문에 지브롤터를 입구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이분들은 지중해에서 문명이 싹튼 점을 들어 지중해를 ‘문명의 자궁’으로 비유합니다.
서기 711년 봄 아프리카 모로코의 북쪽 해안에서 날렵한 한 사내가 훗날 ‘지브롤터의 바위’라고 불릴, 바다 건너편에 우뚝 솟은 바위를 쳐다본 후 부하들과 함께 전선(戰船)에 오릅니다.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이슬람제국이 모로코에 설치한 총독부의 장군 타리크(Tarik)였습니다. 610년 ‘예언자 모하메드’가 창시한 이슬람은 100년이 채 지나기 전에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 일부까지 점령하고, 서쪽으로는 이집트에서 모로코까지 여러 곳에 총독을 두어 북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변모했습니다. 이슬람이라는 신흥 종교를 중심으로 결속한 사막의 유목민(베두인족)들은 잃을 것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에 용맹하고 잔인했습니다. 이겨서 전리품을 챙겨야만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슬람은 당시 지중해의 대제국 동로마와 페르시아가 싸우는 틈을 타 세력을 키웠습니다. 먼저 페르시아를 몰락시켰고,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압박하면서 북아프리카 일대로 뻗어나갔습니다.
지브롤터 앞 바다는 넓은 곳이 58㎞, 좁은 곳은 고작 8㎞입니다. 군인이 아니어도 모험심과 정복욕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매일 빤히 보이는 건너편에 가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기 힘든 거리입니다. “저 좁은 바다를 건너 이슬람을 포교하라”라는 총독의 지시에 따라 바다를 건너온 타리크는 그 바위 부근에서 내려 내륙 안쪽으로 전진했습니다. 저항이 없진 않았지만 아라비아에서 모로코까지 진군하면서 전쟁 기술을 익힌 타리크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어려운 적을 만났을 때는 운 좋게도 적군에서 배신자가 나와 도와줬습니다. 타리크가 앞장선 이슬람군은 불과 3년 만에 세비야 코르도바 톨레도 사라고사 등등 스페인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스페인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된 아랍 사람들은 높이 426m인 그 바위를 ‘타리크의 바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타리크의 바위’는 아랍어로 ‘자발타리크(Jabal Ṭāriq)’로 발음되는데, 이 발음이 ‘지브랄타르’로 변했고, ‘Glbraltar’라고 쓰게 됐습니다. 이 이름이 붙기 전에 이 바위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양떼를 몰고 가다 앞에 나타난 높은 산을 오르기 싫어 산을 양쪽으로 찢었는데 한 쪽이 ‘지브롤터의 바위’, 다른 한 쪽은 모로코의 ‘에벨 무사’라는 고지가 되었다는 게 그리스 신화입니다.
타리크가 스페인에 첫 발을 디딘 후 40년이 채 지나지 않은 750년, 이슬람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 왕조가 바뀝니다. 타리크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가 근거지였던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이었으나 이 왕조가 오늘날의 바그다드를 근거로 한 압바스 왕조에 의해 멸망한 겁니다.
압바스 왕조 때 이슬람 문명은 만개했습니다. 특히 이 왕조 7대 칼리프 알 마문의 치하에서 이슬람 문명은 가장 빛났습니다. 전사이면서 학문을 좋아했던 알 마문은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이라는 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기관을 세우고 그리스 고전을 번역시켰습니다. 그리스 고전은 수 세기 동안 사라졌던 학문이었습니다. 한 신(야훼)만 믿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다양성이 특징인 그리스 고전을 파괴시켰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그리스 고전들이 삭아서 훼손되거나 찢어져 버려지고 불태워졌습니다.
이슬람도 유일신을 믿지만 쿠란에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알 마문은 이 명령에 따라 모든 종족과 종교를 포용하는 관용 정책을 썼습니다. 관용 정책은 그에게 현실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나라가 넓어지면서 이슬람 제국의 종족은 무척 다양해졌습니다. 자신의 뿌리인 베두인인, 유대인, 그리스인, 이집트인, 흑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심지어는 중국인까지 다양한 종족을 한 울타리에 담으려면 관용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이 자기네 고유의 종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세금을 감면해줬습니다. 베두인 내부를 다스리는 데에도 관용 정책이 필요했습니다. 원래부터 가문 사이의 적대감과 투쟁심이 강했던 이슬람 최상위 계층은 왕조 전쟁으로 심하게 분열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알 마문 시대에 번역된 그리스 고전은 다양했습니다. 과학서적은 실용적이었고, 인문서적은 관용 정책을 밀고 나갈 뒷받침이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고전이 새로 번역되면 상금까지 받을 수 있었기에 사라진 줄 알았던 책들이 햇볕 아래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인문학 천문학 수학 의학 약학 동물학 …. 오늘날 우리가 아는 수많은 그리스 고전은 이때 번역됐습니다. 알 마문 시대에 그리스 고전 번역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까지도 잊힌 이름이었을 겁니다.
이슬람 사람들은 새로 얻은 땅을 ‘알 안달루스’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이곳을 다스리던 ‘고트족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알 안달루스에서도 이슬람 문명이 발전했습니다. 처음엔 바그다드의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엔 자체적으로 학문과 예술,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바그다드 압바스 왕조는 코르도바에 총독을 두고 알 안달루스를 통치했으나 756년 이후에는 알 안달루스에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됐습니다.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왕자가 알 안달루스의 지배자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압바스 왕조의 병사들이 다마스쿠스에서 우마이야의 왕족들을 도륙할 때 간신히 살아남아 멀리 모로코로 달아났다가 스페인까지 올라왔습니다. 모략과 무력, 우마이야 왕조에 충성하는 장군들의 도움으로 알 안달루스를 지배하게 된 그는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임명한 사람을 몰아내고 코르도바 총독이 됩니다. 스물다섯 살 때입니다.
명칭은 총독이었으나 사실상 알 안달루스의 왕이었던 그에게는 곧 ‘쿠라이시의 매’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우마이야 왕조를 일으킨 선조들의 가문 이름인 ‘쿠라이시’에 날카롭고 민첩한 ‘매(鷹)’를 붙인 별명입니다. 쿠라이시의 매는 날카롭고 민첩하게, 또 단호하게 군사를 부려 알 안달루스를 넓히는 한편, 상업에 화폐를 도입해 경제를 일으켰습니다. 쿠라이시의 매도 통합을 위한 관용정책을 채택했습니다. 계급과 지위보다는 개인의 지성을 존중했습니다. 왕자였지만 목숨을 잃을 뻔했던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을 겁니다. 타종교를 허용하고 이민족 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중용했습니다. 나라는 풍요해지고 사람들에게는 여유가 넘쳤습니다.
쿠라이시의 매가 죽은 뒤 알 안달루스는 바그다드와 완전 분리됩니다. 그의 후손인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스스로 ‘알 안달루스의 칼리프’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슬람 세계가 바그다드 중심인 압바스 이슬람과 코르도바 중심인 우마이야 이슬람으로 분리된 겁니다. 알 안달루스의 칼리프는 바그다드와 경쟁하듯 코르도바에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건축물인 이슬람 성전을 세웠습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로마제국 당시의 ‘대성당’들은 코르도바의 대성전에 비하면 오두막이었다고 합니다. 정밀한 수학과 역학 등 과학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지을 수 없는 건축물이라는 거지요. 이런 과학기술은 물론 바그다드에서 건너왔습니다. 코르도바에서도 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우대해준다는 소문이 그들을 코르도바로 불러온 겁니다. 이미 바그다드로부터 번역된 그리스 고전을 듬뿍 받아들였던 우마이야 이슬람도 코르도바에 번역기관을 설치해 독자적으로 그리스 고전 번역에 나섭니다. 학문이 꽃피고 과학과 기술이 발전합니다.
쿠라이시의 매와 그 후손들은 알 안달루스의 영역을 북쪽 피레네 산맥 아래까지 확장했습니다. 산맥 바로 뒤는 그 무렵 유럽의 기독교 세력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이었습니다. 두 세력은 숱하게 충돌했습니다. 이슬람은 산맥 너머로 진출, 콘스탄티노플까지 진군해 손에 넣고자 했고, 프랑크 왕국은 이슬람에게 빼앗긴 스페인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문명이 훨씬 뒤처졌지만 전쟁 경험은 풍부했습니다. 이슬람이 결정적 승기를 잡은 적도 있지만 프랑크가 피레네를 넘어와 바르셀로나 등 이슬람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알 안달루스의 우마이야 이슬람은 내분과 반란을 겪다가 1236년에 망했습니다. 이와 함께 알 안달루스의 찬란한 문명도 맥이 끊겼습니다. 기독교가 드리운 커튼으로 유럽의 암흑은 더 짙어졌습니다.
알 안달루스의 흥망성쇠를 다룬 역사서 <신의 용광로-유럽을 만든 이슬람 문명(이종인 역, 책과함께)> 저자인 뉴욕대 석좌교수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는 알 안달루스의 이슬람 멸망을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상실 중의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인류가 누리는 문명이 300년 이상 앞당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고전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 학자들이 다시 라틴어로 번역, 세상에 꺼내놓았습니다. 현대 서구 문명이 그때 출발한 겁니다. 알 안달루스의 이슬람이 망하지 않고 피레네를 넘어 유럽을 장악했더라면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타리크가 올라서서 멀리 스페인 땅과 뒤편의 모로코 땅을 내려다봤을 지브롤터의 바위에 올라서면 당연히 이 질문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타리크의 바위 아래에는 무려 55㎞나 되는 터널이 거미줄처럼 뚫려 있습니다. 전쟁에 대비한 것입니다. 지금 이곳을 지배하는 영국 군인들이 지난 200년간 뚫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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