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인 선거에서는 ‘바람’이 중요하다. 그 어떤 프레임이나 구호, 시대정신을 외치고 내걸어도 유권자들의 표심, 마음을 흔드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어렵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대통령 선거 등 과거 큰 선거에서는 이런 바람을 억지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없던 것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공작(工作)이다. 이른바 ‘○○풍(風)’, 다시 말해 유권자들의 불안 혹은 기대심리를 이용하는 일종의 여론 조작.
1997년 15대 대선에선 보수진영 이회창 후보 측 인사가 비밀리에 북한에 휴전선에서 총과 대포를 쏘는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상대인 김대중 후보를 괴롭혔던 북한 관련 공작을 북풍(北風)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북풍의 변종으로 총풍(銃風)이란 신조어를 낳았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도 ‘○○풍’은 이미 지난해부터 그 싹이 보였다. 지난해 8월 여당은 “한·일 갈등이 내년 총선에 긍정적”이라는 보고서를 내 ‘일풍(日風)’이라는 비난을 샀다. 그 얼마 뒤 당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미국을 방문,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를 만나 “총선 전까지 북·미 정상회담을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미풍(美風)을 넘어서 '트풍'이란 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이번 21대 총선은 바람, 태풍도 아닌 코로나19라는 ‘쓰나미’가 덮친 와중에 치러진다. 그럼에도 선거일을 불과 4~5일을 앞두고 불순한 공작, ‘n풍’이 불 모양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선거에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움직임이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박사’ 조주빈, 갓갓 등 주범들이 아동·미성년자를 포함한 성(性) 착취 동영상을 만들어 유포한 사건이다. ‘호기심으로 야동을 본’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악질적인 성범죄다.
요즘 여야 가리지 않고 정치권은 공격과 반격에 서로 n풍을 불어대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5일 ‘디지털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연루된 당내 인사가 적발될 경우 정치권에서 퇴출시키겠다고 했다. 또 “형법, 성폭력처벌법, 청소년보호법 개정을 통해 불법영상 제작 및 운영자뿐만 아니라 제작·유포·구매자까지 강력히 처벌하겠다”고 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뜬금없이 이런 브리핑을 했다.
하지만 통합당은 “선거운동을 하루 멈추고 n번방 사건 재발방지 법안 처리를 위한 원포인트 국회를 열자”는 정의당의 지난 6일 침묵시위 요구에는 묵묵부답.
통합당은 7일에는 여권을 겨냥하며 n풍의 확산을 노렸다. 2018년 불거졌던 ‘버닝썬’ 사건(승리·정준영 등 일부 연예인의 성관계 영상 유포 등)을 정부·여당이 철저히 수사했다면 n번방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논리를 폈다.
여권은 ‘정치 공작’ 의혹을 제기하며 n풍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었다. 친여 방송인 김어준씨는 6일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통합당의 ‘완전 퇴출’ 언급은 정반대로 민주당에서 n번방 연루자가 나올테니 정계에서 완전 퇴출시키라는 이야기”라며 음모론을 지폈다. 정치 공작의 냄새가 난다고도 했다. 이 프로그램 게시판에 ‘#검찰n번방공작’ 검색어가 등장했고, 이후 친여 네티즌들은 이걸 퍼나르기 바쁘다. 10일 검찰이 조주빈을 기소하면서 뭔가 터뜨릴 거란 소문이 퍼졌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더했다. 이 대표는 7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에서 “대응 시간을 주지 않고 선거까지 몰고 가려고 정치공작을 준비하는 것 같다. 이번 주말 터뜨리려 하는 것 같다”며 시기까지 언급했다. 이 대표는 ‘누구’에 대해 말은 하지 않았다. 집권여당 대표가 근거도 없이 ‘n번방 정치 공작’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통합당 이진복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8일 한 극우 인터넷매체 인터뷰에서 "많은 제보를 점검했는데 상당한 수준에 와 있다. 주말쯤 국민들이 (여권을) 가증스럽게 볼 것"이라고 예고까지 했다.
정의당, 국민의당처럼 n번방 사건을 총선 공약과 재발방지 대책 등 법 개정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거대 정당들이 이 사건을 네거티브 공세에 활용하고 정치 공작 운운하며 본질과 벗어난 언행을 계속한다면 조주빈만 도와주는 셈이다.
미성년자 성 착취범 조주빈은 지난달 26일 얼굴이 공개되는 첫 자리에서 본인이 미리 준비한 말을 했다.
“손석희 사장님, 윤장현 시장님, 김웅 기자님을 비롯해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딱 두 문장이 전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이 말만 하고 입을 닫았다. 조주빈은 국민과 언론을 우롱했다. 자신의 범행 중 성 착취와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사건 당사자들, 특히 유명 인사의 실명을 언급했다. 국민과 언론을 농락했다.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범행을 감추고, 관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치밀한 계산.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도 조주빈은 계속해서 범죄의 본질을 가리기 위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슈, 인물을 꺼낼 가능성이 높다.
총선에서 n풍이 분다면, 이는 다시 조주빈에게 당하는 거다. 서울구치소에서 부재자 투표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주빈과 그 공범들은 요즘 정치권 n풍 논란에 ‘씩’ 웃고 있을 게 틀림없다. 반면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n번방 피해자들은 지금도 울고 있다. 10~11일 사전투표, 15일 본투표에서 n풍에 흔들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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