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11) 좌고우면 하지 않는 베트남의 코로나-19 대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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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전) 조선대 교수, 한국베트남학회 회장
입력 2020-04-1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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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느 나라든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지난 4월 11일 본토 50개주 전역을 재난 지역으로 지정했다. 전염병으로 미국 50개주 모두가 재난 지역으로 지정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베트남 정부는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해 외국인 입국 금지, 비자 발급 중단, 하노이 도착 한국 국적기의 사전 통보 없는 회항 조치, 무기한 휴교령, 식료품과 의약품 판매업을 제외한 서비스업 중지 행정명령 등의 강력한 조치를 발표하여 확산을 막았다. 이로 인해 베트남 투자업체의 임직원들, 격리 수용된 여행자들을 비롯한 현지 교민들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불편함을 초래하였다. SNS상에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이 올린 예기치 못한 글이 두 나라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베트남과의 우호관계에 금이 가게한 일도 발생했었다. 다행히 주 베트남 한국대사관, 한베경제문화협회(KOVECA), 현지 교민회가 협력하여 적기에 소화전을 열고 살수함으로써 진화되었다. 베트남 정부의 행정조치는 가히 전투적이었다. 베트남 문화와 베트남의 의료체계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베트남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몽골의 침략을 3번이나 막아낸 저력이 있는 민족으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지 않는 실용주의적이고 현실적인 민족이다. 몽골의 베트남 침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6사(六事)’ 요구와 이를 거부한 베트남의 역사를 살펴보면, 베트남 정부의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집에 있는 것이 애국이다 포스터] 




◼ 세계 최초의 무혈 쿠데타

세계 역사상 최초의 무혈 쿠데타가 13세기 초에 베트남에서 발생했다. 무혈 쿠데타로 리(李) 왕조(1009~1225)의 왕권을 찬탈하고 쩐(陳) 왕조(1225~1400)가 탄생한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몽골 침략을 3차례나 막아낸 쩐 왕조는 베트남 역사의 자존심이 되었다. 쩐 왕조 개국 공신인 쩐투도(陳守度)는 리 왕조의 종친들을 학살했고, 리(李)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응우옌(阮)씨로 개명토록 하여, 현재 베트남에서 응우옌씨가 가장 많은 성씨 분포를 갖게 만든 장본인이다. 타이똥(太宗:1225~1258)은 리 왕조 마지막 9대 왕 찌에우호앙(昭皇)의 남편으로, 7살 때 동갑나기 여왕과 국혼을 하였다. 찌에우호앙은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리(李) 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쩐 왕조 타이똥의 왕비가 된 특이한 역사의 주인공이다. 국혼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쩐투도는 찌에우호앙에게 왕위를 남편인 쩐까인(陳煚)에게 양위하도록 하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남편이 부인으로부터 왕권을 양도받은 것이다. 쩐까인은 쩐투도의 당질로, 쩐투도 사촌 형의 아들이다. 한편, 타이똥이 제위 12년이 지나도록 후사를 이을 자녀가 없자, 쩐투도는 이미 출가한 찌에우호앙의 언니인 투언티엔(順天) 공주를 왕비로 맞아드리게 하였다. 투언티엔 공주는 이미 출가하여 타이똥의 친형인 쩐리에우(陳柳)의 부인이었고, 임신 3개월째였다. 타이똥(太宗)은 중전의 친언니이자, 처형이자 형수를 왕비로 맞이한 것이다. 부인을 동생에게 빼앗긴 쩐리에우는 난을 일으켜 건국 초에 정국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몽골 침략을 막아낸 베트남의 구국 영웅 쩐흥다오(陳興道:1228~1300) 장군은 쩐리에우의 셋째 아들이다.

◼ 몽골 침략을 막아낸 쩐흥다오(陳興道) 장군

몽골이 남방으로의 팽창 정책을 펼치면서 3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침략했다. 쩐흥다오 장군은 백성들의 단결력에 호소해 물리쳤다. 1257년 몽골의 장수 올량합태(兀良合台)는 베트남을 침공해 탕롱(현 하노이)을 함락시켰고, 1283년 50만 대군으로 베트남을 공격해 1285년 초 재차 탕롱을 함락시켰다. 당시 년똥(仁宗:1273~1293년)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몽골에 항복하자고 했으나, 쩐흥다오 장군은, ‘항복하시려면 저의 목을 먼저 베어 달라’며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전쟁의 총 지휘를 맡은 쩐흥다오 장군은 탕롱을 탈환하고 몽골군을 물리쳤다. 이미 베트남과 2차례 패전한 몽골은 1287년 수륙(水陸) 양군 30만 대군으로 제3차 베트남을 침략했으나, 쩐흥다오 장군은 하이퐁 근처 바익당 강의 바닥에 용치(龍齒)를 박고, 만조 때 몽골의 전함을 유인하여 간조 때 용치에 걸려 꼼짝 못하는 몽골 수군을 대파했다. 패퇴해 도주하는 몽골의 육군마저도 미리 매복시킨 복병을 통해 괴멸시켜 국가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했다. 몽골의 3차례 침략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여 승리를 거둔 유일한 나라가 베트남이다. 년똥은 1289년 쩐흥다오 장군을 대왕으로 봉해서 ‘흥다오다이브엉(興道大王)’이라고 한다. 베트남 해군은 바익당 강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쩐흥다오 장군을 ‘베트남 해군의 아버지’라고 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과 같은 구국영웅이다. 그는 1300년 음력 8월 20일 사망하여 그날은 베트남 민족 기념일이다.

◼몽골의 정복활동과 ‘6사(六事)’

몽골은 동남아로의 진출을 위해 일찍부터 남송(南宋) 정복을 계획하고 있었다. 남송을 정복하고 나면 동남아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나라가 베트남이다. 몽골에게 있어서 베트남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몽골은 몽케 시기에 1차례(1257년), 쿠빌라이 시기에 2차례(1285, 1287년), 총 3차례 베트남을 침략했다. 몽골 입장에서는 남송을 병합하는 과정에 발생할지 모르는 베트남으로부터의 위협을 사전에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몽골은 쩐 왕조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과 항복을 종용했고, 쩐 왕조는 몽골 사신을 억류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고, 몽골에 조공사절단을 보내는 유화책을 쓰기도 했다. 베트남도 사신을 보내 몽골의 의도를 사전에 파악하는 한편, 방위력을 강화하면서 몽골에 강온 양면정책을 구사하였다. 몽골은 적을 공략할 때 항복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공포 전략’을 구사했다. 1279년 남송을 병합한 후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복속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쿠빌라이는 복속국에 대해 ‘6사’의 요구했다. ‘6사’는 몽골이 정복 국가에 강요한 요구 사항으로, 입조(入朝), 납질(納質), 조군(助軍), 납공(納貢), 역참설치와 호구조사를 말한다. 입조는 칭기즈칸(1167~1227) 때부터 정복지에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고, 자제 입질은 1206년 몽골초원을 통일한 후 몽골인 만, 천, 백, 십호장의 자제를 입시(入侍)하도록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조군이나 납공은 다른 왕조에서도 요구해왔던 것이나, 호구조사는 몽골제국의 확대와 함께 인적 물적 자원 확보를 위해 호구조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역참설치는 교통, 통신 및 물자 수송을 위해서 역참이 필요하게 되자 정복국가에 설치를 요구한 것이다. 쿠빌라이 시기까지 체계를 갖춘 ‘6사’ 요구는 정복국가에 대하여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완전한 복속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6사’의 내용은 내정간섭, 군사적인 압박, 경제적인 수탈과 관련된 것으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6사’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몽골의 종속국이 되는 것이고, 거부하면 전쟁을 감수해야 했기에 약소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난제였다.

◼베트남, 남송, 몽골의 삼각관계

쩐 왕조는 몽골의 6사 요구에 대해 일부는 이행을 하고, 일부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몽골의 2차, 3차 침략은 6사의 요구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무혈 쿠데타로 왕권을 잡은 쩐 왕조는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대내적으로 리(李) 왕조 말에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고, 대외적으로는 남송과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몽골을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 체재를 강화하고, 군대를 재정비하여 내부적으로 안정이 되자, 쩐 왕조는 1229년 남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관계를 맺었다. 이에, 몽골은 남송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는 베트남에 대해서 간섭하였다. 1257년 몽골이 탕롱을 공략하면서 남송과의 조공관계가 막히기도 했지만, 쩐 왕조 초기에 남송과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했다. 남송과의 조공과 책봉관계 수립은 쩐 왕조의 존립과 직결되어 있는 국가 안보의 문제였다. 만약, 남송이 몽골에 의해 멸망하면 베트남은 바로 몽골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남송은 그야말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였다. 때문에 몽골과 전쟁 이후에도 베트남과 남송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베트남과 남송과의 관계는 남송과 몽골의 관계가 악화될수록 더욱 긴밀해졌다. 몽골과 베트남의 본격적인 조공관계는 1257년부터 1258년까지 있었던 몽골과의 전쟁 이후 시작되었다. 1260년 쿠빌라이 즉위 이후부터 몽골은 베트남에 대하여 6사의 이행을 강력히 촉구해 왔다. 이에, 베트남은 수용과 거절의 줄타기 외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6사 요구의 거절은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지는 국가의 명운이 달려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 1차 베트남 침략 구실 - 올양합태의 정송가도(征宋假道)

몽골이 1253년 운남의 대리국을 공략하며 남송 정복의 기회를 노리던 올양합태는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1257년 베트남에 사신을 파견하여 남송 정복의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쩐 왕조는 몽골의 요구를 거절하고, 사신을 억류하면서 1차 전쟁이 발발하였다. 탕롱에 입성한 몽골군은 더위에 약해 고전하다가 쩐 왕조의 대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1258년에 즉위한 타인똥은 몽골에 사신을 파견하여 3년에 1회 조공을 바치는 3년1공의 약속과 함께 화약을 맺었다. 몽골의 ‘6사’ 요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쿠빌라이 즉위와 함께 몽골의 강압적인 ‘6사’ 요구에, 쩐 왕조는 강무당을 설치하여 왕실 자제들에게 병법을 가르치고, 군사조직을 정비하며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쿠빌라이 즉위 이후부터 베트남에 대한 압박은 더욱 강해졌다. 쩐 왕조는 몽골의 기본적인 요구는 수용하지만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거절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특히, ‘입조’는 끝까지 거절하였다. ‘입조’를 거절하자 몽골의 요구는 더욱 압박을 가했다. ‘6사’의 이행, 특히 자제 입질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쩐 왕조는 당시몽골이 이미 남송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이 남송을 정복하고 나면 바로 베트남을 침략해 올 것임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 상황을 염탐하기 위하여 쩐 왕조는 몽골에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쿠빌라이는 쩐 왕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타인똥이 임의로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입조하여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쩐 왕조에서는 왕이 친히 입조를 하는 대신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이를 불쾌히 여긴 몽골에서는 사신을 억류해 버렸다. 이에, 쩐 왕조에서는 약재를 공물로 바치고 1년에 2차례의 조공을 바쳐가며, 친 몽골 외교정책으로 시간을 벌면서 전쟁에 대비하였다.

◼ 2,3차 베트남 침략 구실: 6사(六事) 불이행

쩐 왕조의 외교정책으로의 선회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남방 공략을 위해 꾸준히 베트남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쩐 왕조에서도 이러한 몽골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었다. 1282년 8월, 몽골이 50만군을 이끌고 짬빠(중부베트남에 있던 국가)로 가는 길을 빌려줄 것과 식량과 병력 지원을 쩐 왕조에 강요했다. 쩐 왕조는 이를 완강하게 거절함으로써 몽골의 짬빠국 정벌을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남송이 이미 무너진 상황에서 짬빠국까지 몽골에 점령된다면, 쩐 왕조가 몽골의 속국이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계속된 베트남의 ‘6사’의 이행 거절은 몽골로 하여금 2차 침략을 단행하게 하였다. 쩐 왕조에서는 군을 재정비하고, 쩐흥다오를 국공으로 삼아 모둔 군을 통제하게 하였다. 몽골의 침략으로 1285년 초에 탕롱이 함락되었다. 전쟁 중에도 쩐 왕조는 계속해서 사신을 파견하며 사태를 진정시켜보려고 했다. 그럼에도 몽골의 ‘입조’ 요구는 계속적으로 이행을 거부하였다. 전투가 본격화되어 몽골군이 내지로 들어오면서 후방으로부터의 보급로가 길어지고, 지세가 험하여, 전투식량 보급에 문제가 생겨났다. 아울러 무더위와 풍토병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온 백성이 대 몽골 항쟁에 합세하여 쩐 왕조의 병력은 갈수록 증가하는 반면, 몽골군은 사상자가 늘어만 갔다. 결국, 몽골의 2차 침략도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쩐 왕조 군에는 남송 출신의 망명자가 많았던 점, 평지에서 유리한 기마병 중심의 몽골군에 비해 베트남 북부는 지세가 험준하여 반격에 유리하였던 점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2차 침입의 실패 후 몽골은 대대적인 3차 침략을 준비하였다. 몽골의 3차 침입은 앞의 1,2차의 패배를 설욕한다는 의미가 강했다. 쿠빌라이는 고려군의 지원을 받아 추진했던 일본 원정도 중단하고 베트남 침략에 전력을 다했다. 마침내 1287년 쿠빌라이는 베트남 침략을 시작하여 탕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3차 침략도 보급이 끊기고, 무더위에 약한 몽골군이 전의를 잃고 퇴각하려하자, 바익당 강 전투에서 베트남 전사에 유례없는 대승을 거두었다. 패전으로 격분한 쿠빌라이는 4차 침략을 준비하였으나, 1294년 사망하면서 베트남 공략은 마침표를 찍었다.

◼ ‘입조’ 거부는 베트남의 기상

몽골은 남방지역의 모든 국가를 복속시켜 해상 무역을 확장하려고 3차례나 베트남을 침략하였으나, 쩐 왕조의 완강한 저항과 전투식량 보급 문제, 무더위와 풍토병이 번져 실패하였다. 쩐 왕조는 몽골의 ‘6사’요구에 ‘입조’만은 끝내 거절하였다. ‘입조’ 거부는 바로 몽골과의 전쟁을 의미했다. 13세기 중반에 발생한 베트남-몽골 전쟁은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3차 침입의 실패로 몽골은 일본정벌을 포기해야 했고, 베트남 중부 지역에 있었던 짬빠국은 몽골의 지배를 면했다. 베트남이 몽골의 침략 전쟁에서 3번이나 승리한 것은 베트남 민족에게 커다란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내부적으로는 민족적 단결력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계속 이어진 전쟁으로 베트남 측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쩐 왕조 군은 후퇴하면서 몽골군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소각해버려 적군을 지치게 하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구사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온 백성들의 식량부족으로 이어져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전후복구를 위한 과중한 세금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전공이 있는 공신들에게 나눠준 공전(功田)으로 인해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토지가 부족해 생활이 궁핍해졌다. 또한, 몽골과의 전쟁 이후 귀족 세력이 강화되면서 쩐 왕조의 중앙집권체제가 약화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쩐 왕조를 쇠퇴하게 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침략에 대한 쩐 왕조의 외교적인 대응, 특히 몽골의 계속된 압박 속에서도, 전쟁도 불사하면서 ‘입조’를 하지 않고 버틴 것은 베트남 민족의 자존심이자 민족성의 표상이다. 과거 몽골의 전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입조를 거부한 베트남이 코로나-19의 국내 확산 방지를 위해 좌고우면 하지 않고, 이번에 베트남 정부가 취한 강력한 행정 조치는 가장 베트남적인 현명한 조치였다. 4월 13일 기준 확진 환자 262명에 사망자는 0명이었다. 사전에 가장 강력한 행정 명령으로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가장 우수한 결과를 얻은 것이다. 베트남은 호미로 막을 것은 호미로 막는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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