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 속에서 왜소해진 자아감
코로나 이후로, 적어도 한국 내부에서 국가 열등감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확실한 것 같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침탈과 서구화를 앞질러간 일본의 식민지배, 한국전쟁과 분단을 겪으면서 우리는 부단히 국가와 겨레를 외쳐왔으나 실은 자기 모멸과 열패감에 시달려 왔던 게 사실이다.
최근 경제성장과 사회성숙, 그리고 글로벌 문화 진출, 스포츠의 활약과 같이 한국민들이 스스로를 정상적으로 평가할 기회가 있었으나, 오래된 패배의식과 소국의식, 상대적 열등감 같은 것들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우리 마음 속의 오랜 더께같은 것이, 우연히(혹은 필연적으로) 일순간 벗겨지는 상황을 맞았다. 많은 국가들이 공통적인 재난을 맞은 2020년 글로벌 사회에서, 유난히 냉철하고 차분하게 서로를 도와 실질적인 방역을 성공시켜 가고 있는 대한민국이 다른 국가들의 주목을 넘어 찬탄을 받을 만큼 돋보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최고라고?
국가 관리의 문제나 국민성의 측면이나 혹은 우리 사회 내부의 다양한 시스템들(의료보험, 의료이용 체계, 정보통신 체계)이, 많은 다른 나라들과 달랐다. 의료진들의 희생정신, 타인을 배려하는 마스크 착용, 혼란이 없이 유지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감수하는 자가격리는 다른 국가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위기와 고난에 대응하는 많은 사람들이 민주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원칙들을 지켜 공동체의 목표를 이뤄나가는 것에 대해, 그렇지 못했던 많은 선진국, 강대국들이 괄목상대하는 상황들이 생겨났다.
현재상황으로 아직까지는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으며 또 작은 국가여서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감안하더라도, 글로벌사회의 저런 시선과 저런 탄성은 우리가 우리를 다시 보게 되고 우리의 가능성과 우리의 근본적인 장점들을 살펴보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게 사실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우리 국가와 국민의 특징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자는 이것을, 우리의 '이타적 DNA'라고도 하고, 다른 이는 높은 '영성 수준'이 발현된 것이라고도 한다. '선한 심성(인성, 仁性)'을 기반으로 한 도덕적 내면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뭐라고 말하든 다 기분 좋은 말들이지만, 나는 이런 우리 마음의 형질을 농경사회에서 오랫동안 내면화해왔던 '두레' 정신이라고 생각해본다. 큰 일이 닥쳤을 때 두 팔을 걷고 나서서 서로 도우며 뭔가를 이뤄내는 힘. 우리에겐 이런 에너지가 있었다.
우리에겐 '두레정신'이 있었다
고난과 전쟁과 갈등으로 분열되어 지금은 많이 위축되고 잠복했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지혜로운 두레정신을 코로나가 끄집어내어 준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이기려 다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조금씩 손해보고 희생하며 큰 목표를 이뤄가는 거국적인 배려, 작은 차이가 있더라도 큰 같음으로 서로 힘을 합치는 지혜. 옛사람들은 이 두레의 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두레정신 이외에도, 이 겨레가 지니고 있는 남다른 솜씨와 무엇인가를 익혀서 더 훌륭한 것을 내놓는 응용력과 집중해서 뭔가를 해결해내는 실력과 지혜, 승부에 강한 건전한 경쟁심, 홍익인간의 큰 배려정신과 맹렬한 끈기까지. 그리고 확실히 '위기지능'이 높다. 코로나 대응을 설명할 수 있는 한국의 미덕은 적지 않다. 스포츠에서 양궁이나 쇼트트랙이 그랬고, 월드컵 4강이 그랬고 골프나 야구, 축구선수들이 그랬다. BTS나 영화 '기생충'이 그랬다. 우리의 경제 도약이나 삼성같은 기업의 글로벌화에도 그런 점이 있다. 우리 내면의 많은 긍정적 가능성을 두레정신으로 서로 북돋워 이 나라가 글로벌 무대에 제대로 도약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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