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경쟁사인 포드와 GM은 3년 3만6000마일, 도요타는 5년 6만마일을 보장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현대차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단순히 가격이 저렴한 차에서 '품질'에 자신 있는 차로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위기에서 생존"··· 독창적 마케팅 전개
글로벌 금융위기로 자동차 수요가 급감하며 자동차 메이커들이 휘청거렸던 2008~2009년에도 정 회장은 '역발상' 전략을 앞세워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었다. 당시 정 회장은 '위기에서의 생존'을 경영화두로 제시하고, 글로벌 판매확대를 강조하며 증산에 나섰다. 자동차 수요 감소로 글로벌 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2009년에는 '어슈어런스 프로그램'이란 파격적인 카드를 다시 한번 꺼내들었다. 이는 구매 후 1년 내 실직하게 되면 차를 되사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덕분에 2008년 5.4%였던 현대차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2010년 7.7%까지 반등했다.
이 같은 전략적 역발상으로 현대차는 금융위기 이후 급성장했다. 차량 자체 품질을 끌어올린 덕에 미국·일본차의 점유율을 가져왔고, 판매량이 늘며 미국 앨라배마 공장 규모가 확대됐다. 마침내 2010년 포드를 제치고 글로벌 완성차 업계 5위에 올라섰다. 2000년 그가 내세운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글로벌 메이커로 도약하겠다"는 일성이 실현된 것이다.
2010년 유럽 경제위기 당시에도 정 회장은 "글로벌 자동차 시장 위축은 위기의 진원지인 유럽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지시했다. 유럽 업체들이 감산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품질과 가격 경쟁력, 맞춤형 마케팅을 앞세워 위기에 정면으로 맞섰다.
◆'기아차 인수' 1년 만에 정상화
동반 부실을 우려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1998년 기아차를 인수한 것도 정 회장의 강력한 위기 대응 전략이 기반됐다. 당시 현대차는 기아차 부채를 7조1700억원 탕감 받는 조건에 기아차 주식 51%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인수했다.
정 회장은 기아차 인수 후 회사 정상화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1년 만에 기아차를 흑자로 만들었다. 당시 시장에서는 "현대차가 기아차를 살려낸다 하더라도 최소 5년 이상은 걸린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1998년 48만889대에 그쳤던 기아차 판매대수는 1999년 85만5700대로 두배 가까운 성장을 기록했고, 불과 1년 사이 자본잠식 상태에서 1357억원의 순이익을 남기는 흑자 체제로 전환됐다.
정 회장의 '뚝심경영'과 '품질경영' 덕이었다. 정 회장은 생산·판매 점검, 품질관리, 본부별 사업 목표 실적 점검 등 경영 전반을 꼼꼼하게 살폈다. 문제가 발견될 때마다 곧바로 전략회의를 여는 등 하루에도 기아차 회생을 위한 회의가 여러 차례 반복됐다.
또 그는 품질을 최우선으로 차종 재편에도 나섰다. 2000년 경쟁력이 떨어지는 크레도스, 프라이드, 아벨라, 세피아 등을 차례로 생산중단했다. 카니발 등 대표 차종은 문제점을 파악하고 품질 강화에 나섰다. 그 결과 2001년에는 카니발이 13만대 이상 팔리면서 기아차 판매 순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정 회장의 이 같은 경영성과는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정 회장은 오는 7월 세계 자동차산업 최고 권위인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한국인 최초로 헌액된다. 자동차 명예의 전당 측은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을 성공의 반열에 올린 업계의 리더"라며 "기아차의 성공적 회생, 글로벌 생산기지 확대, 고효율 사업구조 구축 등 정 회장의 수많은 성과는 자동차산업의 전설적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전했다.
역대 주요 수상자로는 1967년 포드 창립자 헨리 포드, 1969년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1984년 벤츠 창립자 칼 벤츠, 1989년 혼다 창립자 소이치로 혼다, 2018년 도요타 창립자 기이치로 도요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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