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모 공공기관의 기자실을 찾은 어떤 이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뜨린 말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기사가 잘못됐다며 제대로 고쳐줄 것과 오보에 대한 사과를 해줄 것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사를 썼던 기자는 이런저런 변명을 하던 끝에 줄행랑을 놓았고 황급히 빠져나가는 기자의 차를 보면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작 사태를 수습해야 할 당사자가 사라졌지만, 그는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아직 다하지 못한 말이라도 있다는 듯 기자실 문 앞을 맴돌았는데,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빛이나 떨리는 손을 보자니 누구라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벌일 것 같았다. 결국 그곳에서 가장 연차가 낮았던 필자가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임무를 맡게 됐다.
지금도 그의 주장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두서도 없었을 뿐 아니라 울다가 웃다가 화를 내는 등 급변하는 심리상태 때문에 말귀를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생전에 공적인 직위라고는 맡아본 적이 없는 그가 아무런 소명의 기회 없이 일방적으로 대중 앞에 노출됐다는 점과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지 않지만 충분히 억울함을 느낄 정도의 ‘오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 억울함이 너무도 컸기 때문일까? 보통 누군가가 하소연을 들어주면 점점 화가 풀리고 진정이 되기 마련인데, 그의 목소리는 말을 할수록 오히려 더 커졌다. 나중에는 울음인지 고함인지 구분이 안 되는 괴성을 지르더니 급기야는 꺼이꺼이 통곡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한참을 땅을 치며 통곡하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바로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쏴 죽여 버렸으면 좋겠어”였다.
필자는 그의 말에서 날 선 살기를 느꼈다. 그 대상이 내가 아니기에 망정이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20여년 전 일이다. 너무도 섬뜩했기 때문이었는지, 필자는 그때의 일을 잊고 지냈다. 아니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소개 받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책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독일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들 앞에 마치 자백을 하듯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 책은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의 작품이다. 하인리히 뵐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겪은 일들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971년 독일인 최초로 국제펜클럽 회장이 됐고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약자들의 편에서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데 앞장섰던 그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수사기관과 유착한 언론의 민낯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성실하게 살아온 선량한 시민이 우연하게 용의자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공범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고 심지어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과정이 담겼다.
작품 속에서 검찰은 언론에 설익은 수사상황을 유출하고 언론은 그것을 자극적으로 묘사해 보도하는데, 급기야는 주인공이 ‘테러범의 내연녀’로 매도되기에 이른다. 그녀의 아파트에서 발견된 약간의 돈은 은닉된 범죄수익금이 됐고 주변에서 추근대던 남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인공을 성매매 여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암치료를 받고 있는 주인공의 모친을 찾아가 ‘딸이 테러범의 내연녀로 사는 걸 알게 됐는데 어떤 기분이냐’라고 인터뷰를 시도하는 기자까지 나온다. 그 일로 인해 주인공의 모친은 사망하게 되는데, 언론은 “모친이 위독한데 병문안도 오지 않았다”며 오히려 주인공을 비난하는 기사를 싣는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검사를 찾아가서 항의도 한다. 하지만 “누가 그런 정보를 흘리는지 모른다. 억울하면 손해배상을 청구하라”는 대답만 듣고 만다.
결국 이 이야기는 기자가 총을 맞아 죽으면서 끝이 난다. 신문을 팔기 위해 자극적인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던 자의 마지막이 그렇다.
가짜뉴스를 만들어 내던 기자의 가슴에 총알이 박히는 대목에서 필자는 풋내기 기자 시절 기자실 앞에서 짐승의 울음 같은 통곡을 쏟아내던 그의 얼굴과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쏴 버리겠다’는 고함이 생각났다.
뒤이어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장면이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른바 ‘제목장사’라고 불리는,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을 제목에 내거는 언론의 모습이 오버랩된 것 같기도 했고, 남의 기사를 베끼고 짜깁기해 마치 제 것인양 내걸던 어떤 후배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얼마 전 정경심 교수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사람이 법정에서 가슴을 치면서 억울해하던 모습도 떠올랐고, 기자들이 들이댄 마이크를 향해 “제대로 취재는 하고 묻는 거냐”라고 되묻던 국회의원 당선자도 떠올랐다.
"취재에 협조하면 가족은 처벌대상에서 빼주겠다"고 말하는 어느 기자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소설이다.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심지어 50년 전에 사망한 작가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기시감을 지우지 못하는 건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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