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얻기 전엔, 앉은 채 안 일어난다
류영모의 50대는 공자의 지천명(知天命)을 실천하는 시기였다. 몸나를 얼나로 거듭나게 하는 '준비된 결행'이었다. 식색의 단단(斷斷, 끊고 끊음)으로 단단히 시작한 뒤, 그는 눕고 앉는 자리에 '단단한 죽음'을 깔았다. 그 뒤에 할 일은 칠성판 위에 꼿꼿이 앉는 일이었다.
부처는 가부좌(跏趺坐)로 앉았다. 가(跏)는 반대쪽 다리를 넓적다리 위에 올리는 것이고 부(趺)는 발등이란 의미다. 가부좌는 발등을 반대쪽의 허벅지에 얹어놓고 허리를 쭉 펴고 바르게 앉는 자세다. 가부좌를 한 까닭은 자세가 안정되어 호흡과 명상을 하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부처가 90일간 가부좌 상태에서 호흡과 명상을 하며 깨달은 것들을 남긴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 호흡)'과 '대념처경(大念處經, 명상)'과 같은 경전이 남아 있다. 안반(安般)은 들숨과 날숨을 말하며, 수의(守意)는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즉, 안반수의는 호흡법이다. 부처는 석달간의 호흡법을 통해 나와 남의 대립이 없는 자유로움을 얻었고, 그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솟아나는 무한한 사랑(자비)의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다.
류영모는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한다. "가부좌한 부처는 참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인도에서는 앉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참선은 앉아서 완전에 들어가려는 수행입니다. 부처는 6년 동안의 수행 마지막에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침내 구경(究竟, 궁극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가부좌는 몸을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어 단전(丹田, 배꼽 밑 9㎝ 부위)에 힘이 모여 저절로 중심이 잡히도록 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류영모는 부처와 같이 앉지 않고 궤좌(跪坐, 무릎 꿇고 앉음)로 앉았다. 무릎을 꿇고 앉는 일은 가부좌보다 훨씬 힘든 자세다. 다리가 아프고 무릎도 결릴 수밖에 없다.
무릎을 꿇는 건 고대의 양생법
예부터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는 양생(養生, 건강관리)의 비결로 알려져 있다. 궤좌는 허리를 세워 바른 자세로 앉는 것으로, 중화지기(中和之氣)와 정(正)을 시행할 수 있다고 여겼다. 무릎은 힘줄이 모여 있는 곳으로, 황제내경에서도 무릎을 꿇으면 간과 비장과 위의 막힌 곳을 뚫어주며 신체 순환을 도와준다고도 했다. 몸이 허약한 노인은 이 자세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또 30초 궤슬(跪膝, 무릎 꿇고 앉음)은 허리와 무릎의 건강에도 유익하다. 요통의 원인은 척추가 바르지 못해 혈액순환이 불량해져서 생긴다. 매일 아침 기상과 동시에 30초 동안 꿇어 앉기를 한달간 하면 허리통증이 가라앉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일본 재활전문가의 임상 리포트도 있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독비혈(犊鼻穴, 무릎 바깥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안마하고 지압해주면 무릎통증과 하지(下肢) 마비와 각기병을 완화시켜 준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궤좌는 경락을 통하게 하고 몸의 찬 기운을 흩어주며 기운을 바로잡아 붓기를 내려주기도 하는 '건강 자세'다.
한편 이 자세는 가부좌에 비해 겸손하며 경건한 자세이기도 하다. 부처는 혼자 가부좌로 앉아 명상을 펼치면서 스스로의 숨과 마음을 찾아나서며 수행을 한 반면, 류영모는 세상살이에서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를 낮추며, 아울러 신을 향한 긴장과 지성(至誠)을 그 자세로 드러내고 있었다. 류영모의 궤좌는 퇴계 집안이 전통으로 삼고 있는 '궤좌 접빈객(接賓客)'을 떠올리게 한다. 퇴계의 경(敬)과 류영모의 구도(求道)가 닮았다는 건, 궁극의 추구는 통한다는 의미일까.
죽기 좋은 날이구나
사실 궤좌로는 오래 앉아 있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위태로운 자세(危坐)라고도 한다. 흔히 무릎을 꿇고 앉으면 엉덩이를 두 발 위에 올리는 자세가 된다. 그러나 그의 궤좌는 앞무릎을 붙인 채 뒤쪽의 두 다리를 벌려 엉덩이가 땅에 닿도록 하는 자세다. 가부좌의 다리 모양은 역삼각형이지만 그의 궤좌는 정삼각형을 이룬다. 이 자세는 졸음이 올 수가 없다. 하지만 처음에 그 자세로 앉아 보면 고통이 만만치 않다. 아픈 고비를 넘겼을 류영모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류영모의 궤좌가 퇴계와 다른 점은 단순히 세상에 대한 예절의 차원에서 그 자세를 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신을 만나기 위해 꿇어앉았다. 진정한 것은 시대를 넘어, 사상을 초월해 통하는가. 놀랍게도 최근에 한 시인이 쓴 '무릎꿇다'(김사인, 2015년)라는 시는 마치 류영모의 궤좌를 읊은 것처럼 정확하게 그 내면을 포착하고 있다.
뭔가 잃은 듯 허전한 계절입니다.
나무와 흙과 바람이 잘 말라 까슬합니다.
죽기 좋은 날이구나
예어른들처럼 찬탄하고 싶습니다.
방천에 넌 광목처럼
못다 한 욕망들도 잘 바래겠습니다.
고요한 곳으로 가
무릎 꿇고 싶습니다.
흘러온 철부지의 삶을 뉘우치고
마른 나뭇잎 곁에서
죄 되지 않는 무엇으로 있고 싶습니다
저무는 일의 저 무욕
고개 숙이는 능선과 풀잎들 곁에서.
김사인의 시 '무릎꿇다'(2015)
'죽기 좋은 날'이라는 화두를 잡고, 허전함과 욕망을 내려놓고 고요함에 들어 무릎을 꿇고 싶다는 그 고백은 류영모가 시작한 단호한 수행의 풍경을 살짝 비춘다. 뉘우침과 죄 되지 않는 무엇, 그리고 무욕과 고개 숙임으로 표현된 그 간절한 뜻이 바로 이후 평생 육신을 극한 불편의 집에 기거하게 한 궤좌의 진의가 아닐까 싶다.
하느님 시하(侍下)에 무릎 꿇은 것
류영모는 석가처럼 배숨쉬기(단전호흡)를 일상적으로 했다. 그는 "숨쉴 식(息) 자는 코(自=鼻)에 심장(心=心臟)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곧이 곧장 가려면 숨이 성해야 합니다. 세상 모르고 잠에 들 때도 숨은 더 힘차게 쉽니다. 건강하려면 식불식(息不息)을 해야 합니다." 들숨과 날숨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이 한결같이 지속되게 하면 호흡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나아가서는 무의식 속에서도 올바른 호흡이 이뤄질 수 있다는 말이다.
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이여, 들숨과 날숨을 생각하는 것을 잘 익혀야 한다. 그러면 몸이 피로하지 않게 되고 눈이 아프지 않으며 진리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움에 머물 수가 있고 애착에 물들지 않게 되리라. 이와 같이 들숨과 날숨을 닦으면 좋은 결실과 큰 복리를 얻게 되리라. 이리하여 깊은 선정(禪定, 삼매경)에 들면 드디어는 자비심을 얻을 것이며 미혹을 떠나 깨달음에 들어갈 것이다."
가슴속에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을, 류영모는 '성불'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는 꿇어앉은 참선을 통해 이런 체험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기도와 찬송, 성경 해석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참선기도를 합니다." 교회식의 예배 대신 홀로 참선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그리스도가 태어나야 하고 부처가 찾아와야 합니다. 성탄과 성불이 이뤄져야 합니다. 가슴속에 그리스도가 나지 않고 마음속에 부처가 오지 않았다면 그 기도나 참선은 쭉정이일 뿐입니다." 그의 말이다.
류영모의 궤좌는 천부시하(天父侍下)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맘이 풀어지고 몸이 놀아나는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늘 가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늘 가는 것을 구합니다. 사람이 한때는 지성을 할 수 있지만 늘 끊기지 않게는 잘 안 됩니다. 지성과 열성이 우리 속에 조금씩은 있습니다. 그러나 곧 없어져 이완돼 버립니다. 맘이 이완되기에 무엇에 끌려갑니다. 한가로움을 잘못 쓰면 죄악이지만 한가로움을 팽팽하게 쓰면 영구히 후회하지 않습니다. 게으르게 멍청하게 있다가 어디 가서 말을 하려 해도 머리가 멍해져 말 한마디 못하는 그런 지경에 가서는 안 됩니다."
류영모의 시 '좌망'에 담긴 하루 일과
그는 이 좌법을 '하나(一)'를 찾는 일좌(一坐)법이라고 했다. 그의 삶은 두루 통하는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일식, 일인(一仁), 일좌, 일언(一言)으로 꿰뚫어진 삶이었다. 그의 궤좌는 복성침은 지성좌망(複性寢恩 至誠坐忘)이었다. 1955년 10월 28일 다석일지에 쓴 한시 절구 '좌망(坐忘)'에 나오는 말들이다.
坐忘消息晝 複性不息課(좌망소식주 복성불식과)
寢恩安息宵 至誠成言曉(침은안식소 지성성언효)
앉아서 잊으니 숨을 쉬는 낮이요
다시 얼나에 드니 쉬지 않는 저녁 일과라
잠자리에 은총을 입으니 편안하게 쉬는 밤이요
지극한 정성으로 말씀을 이루는 새벽이 오는구나
이 시는 류영모답게 '식(息, 쉰다, 숨을 쉰다)'이란 말의 묘미를 한껏 살린 것이다. 제목에 나오는 '좌망'은 장자가 말한 수행법으로 '심재좌망(心齋坐忘)'이라고도 한다. 마음의 제단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심재'이고, 앉은 채 마음이 육체를 벗어나고 세속의 지식을 잊어버려 하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좌망'이다. 류영모는 무릎을 꿇고 앉아 몸나(육신)를 벗고 제나(자아, '나'라는 의식)를 잊으며, 참나(내 안의 성령)를 찾아 얼나(성령인 나)로 나아갔다. 저 시는 궤좌와 호흡으로 줄기차게 수행한 하루 일과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나하나 풀어서 읽어보자.
'앉아서 잊으니' - 장자가 말한 좌망의 상태에 이르니
'숨을 쉬는 낮이요' - 소식(消息)은 '숨을 꺼버린다'는 말로 숨을 쉬지 않는다(숨을 쉬지 않을 만큼 몰입한다)는 말이 되지만 '쉼(휴식)을 꺼버린다'로 보면, 쉬는 일이 없다는 뜻이 된다. 거기에다 '소식'은 우리 말로 하늘에서 오는 뉴스이다. 즉, 깨달음이다. 류영모는 '소식'이라는 말 한 마디로, 숨소리도 꺼버린 듯한 몰입과 쉼없이 정진하는 수행과 하늘의 한 소식을 듣기 위해 치열하게 궁신하는 장면을 절묘한 중의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다시 얼나에 드니' - 복성(複性)은 '성(性, 천성이며 성령이며 얼나를 말한다)'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복성(復性)과 같다. 이 또한 장자의 수양론에 나오는 말이다. 신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은 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우리의 전통사상인 복본(復本)사상과도 통한다. 참나는 신에게서 온 것이며 지금 나에게 있다가 다시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로 시작되었으나 사실은 시작된 게 없으며 끝까지 남는 하나라는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묘리에 닿아 있는 말이기도 하다.
'쉬지 않는 저녁 일과라' - 과(課)는 하루 일과를 수행한 저녁 무렵을 함의한다. 낮에는 좌망으로 하늘과 닿았고, 저녁에는 참나로 돌아가는 일을 쉬지 않는다는 얘기다. 낮에는 '진행'하는 수행이고, 저녁에는 반성하는 수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잠자리에 은총을 입으니' - 침은(寢恩)은 왕조시대에 궁녀가 잠자리를 찾은 왕의 성은을 입는 것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굳이 그렇게 속된 해석을 할 필요도 없다. 잠을 자는 은총은 신이 인간에게 베푼 휴식이다. 그러나 잠을 자면서 나는 내 '몸'과 내 '의식'은 놓지만, 놓지 않는 게 있다. 그것이 신과 연결된 참나의 '얼줄'이다. 잘 때 몸을 건드리면 잠을 깨고 의식이 돌아오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는 것은 바로 참나라는 얘기다.
'편안하게 쉬는 밤이요' - 얼나이자 하느님이 나를 지켜주니 '안식소(安息宵)'가 된다. 안식은 편안하게 휴식한다는 뜻도 되지만, 숨을 편히 쉰다는 뜻도 된다. 몸과 의식이 없어도 숨을 편히 쉴 수 있는 까닭은 그 또한 참나와 만나고 있는 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쩌면 잠 속에서는 순수하게 신의 은총 아래서 평안한 상태를 지닐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극한 정성으로' - 편안하게 쉬는 밤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얼줄을 유지하는 그 지극함이 있다. 굳이 생각하고 의식하고 행위함으로써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정성으로 '참나'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이루는 새벽이 오는구나' - 낮에는 좌망과 복성으로 수행했다면, 밤에는 하늘의 은총을 느끼는 것과 복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그 수행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그가 무릎을 꿇고 낮과 저녁을 보내며, 다시 칠성판 위에서 고요히 잠들며 죽음과 대면했던 까닭이 여기 '하나의 동영상' 같은 시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지 않은가.
그는 손님을 맞을 때나 책을 읽을 때나 식사를 할 때나 언제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스승이 무릎을 꿇고 말씀을 하니 제자들이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30분이 지나면 모두들 다리가 아파서 쩔쩔 매게 된다. 함석헌을 비롯한 몇 명의 제자는 몇 시간을 버텼다. 류영모는 제자들에게 꿇어앉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숨을 깊게 쉬면서 단전에 중심을 두면 좀 나을 것이라고 했다.
88세부터 그는 기억력이 흐려졌는데, 무릎 꿇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잣나무 널판 위에 무릎 꿇고 오뚝이 인형처럼 앉은 모습이 곧 쓰러질 것 같아 편히 앉으시든지 누우시라고 하면 "괜찮아요"하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석어록 - 성령을 호흡하라, 원기식(元氣息)
우리의 기도는 정신적인 호흡,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호흡인 원기식을 두텁게 조심하여 깊이 숨쉬는 것이다. 나는 찬송할 줄 모른다. 그러나 찬미는 표한다. 찬미는 좋은 것을 좋다고 하는 것이다. 맥박이 뚝딱뚝딱 건강하게 뛰는 소리가 참 찬송이다. 다른 것은 부러워하지 않는다. 세례라고 해서 물 한 방울 어디에다 뿌려주는 것이 세례가 아니다. 날마다 낯 씻고 몸 닦는 세례이다. 우리는 몸의 먼지를 떼어버리는 데 열심히 해야 한다. 이 세상을 지나가는데 자꾸 먼지가 우리에게 날아온다. 그러므로 자꾸 씻고 닦는 일을 해야 한다. 단식하는 것도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고생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보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나 간디의 피와 살은 먹을 수 없으니까 제 몸을 고생시키면 제 살, 제 피를 좀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이런 점을 인도에서는 알고 있었다. 아니 전 인류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다른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데, 유교에서는 기도를 수신이라고 한다. 입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다. 그러면 마침내 머지않아서 한얼님께 다시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한얼님의 아들이 되도록 참나를 길러 가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쉬지 않는 저녁 일과라' - 과(課)는 하루 일과를 수행한 저녁 무렵을 함의한다. 낮에는 좌망으로 하늘과 닿았고, 저녁에는 참나로 돌아가는 일을 쉬지 않는다는 얘기다. 낮에는 '진행'하는 수행이고, 저녁에는 반성하는 수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잠자리에 은총을 입으니' - 침은(寢恩)은 왕조시대에 궁녀가 잠자리를 찾은 왕의 성은을 입는 것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굳이 그렇게 속된 해석을 할 필요도 없다. 잠을 자는 은총은 신이 인간에게 베푼 휴식이다. 그러나 잠을 자면서 나는 내 '몸'과 내 '의식'은 놓지만, 놓지 않는 게 있다. 그것이 신과 연결된 참나의 '얼줄'이다. 잘 때 몸을 건드리면 잠을 깨고 의식이 돌아오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는 것은 바로 참나라는 얘기다.
'편안하게 쉬는 밤이요' - 얼나이자 하느님이 나를 지켜주니 '안식소(安息宵)'가 된다. 안식은 편안하게 휴식한다는 뜻도 되지만, 숨을 편히 쉰다는 뜻도 된다. 몸과 의식이 없어도 숨을 편히 쉴 수 있는 까닭은 그 또한 참나와 만나고 있는 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쩌면 잠 속에서는 순수하게 신의 은총 아래서 평안한 상태를 지닐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극한 정성으로' - 편안하게 쉬는 밤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얼줄을 유지하는 그 지극함이 있다. 굳이 생각하고 의식하고 행위함으로써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정성으로 '참나'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이루는 새벽이 오는구나' - 낮에는 좌망과 복성으로 수행했다면, 밤에는 하늘의 은총을 느끼는 것과 복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그 수행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그가 무릎을 꿇고 낮과 저녁을 보내며, 다시 칠성판 위에서 고요히 잠들며 죽음과 대면했던 까닭이 여기 '하나의 동영상' 같은 시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지 않은가.
그는 손님을 맞을 때나 책을 읽을 때나 식사를 할 때나 언제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스승이 무릎을 꿇고 말씀을 하니 제자들이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30분이 지나면 모두들 다리가 아파서 쩔쩔 매게 된다. 함석헌을 비롯한 몇 명의 제자는 몇 시간을 버텼다. 류영모는 제자들에게 꿇어앉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숨을 깊게 쉬면서 단전에 중심을 두면 좀 나을 것이라고 했다.
88세부터 그는 기억력이 흐려졌는데, 무릎 꿇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잣나무 널판 위에 무릎 꿇고 오뚝이 인형처럼 앉은 모습이 곧 쓰러질 것 같아 편히 앉으시든지 누우시라고 하면 "괜찮아요"하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석어록 - 성령을 호흡하라, 원기식(元氣息)
우리의 기도는 정신적인 호흡,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호흡인 원기식을 두텁게 조심하여 깊이 숨쉬는 것이다. 나는 찬송할 줄 모른다. 그러나 찬미는 표한다. 찬미는 좋은 것을 좋다고 하는 것이다. 맥박이 뚝딱뚝딱 건강하게 뛰는 소리가 참 찬송이다. 다른 것은 부러워하지 않는다. 세례라고 해서 물 한 방울 어디에다 뿌려주는 것이 세례가 아니다. 날마다 낯 씻고 몸 닦는 세례이다. 우리는 몸의 먼지를 떼어버리는 데 열심히 해야 한다. 이 세상을 지나가는데 자꾸 먼지가 우리에게 날아온다. 그러므로 자꾸 씻고 닦는 일을 해야 한다. 단식하는 것도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고생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보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나 간디의 피와 살은 먹을 수 없으니까 제 몸을 고생시키면 제 살, 제 피를 좀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이런 점을 인도에서는 알고 있었다. 아니 전 인류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다른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데, 유교에서는 기도를 수신이라고 한다. 입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다. 그러면 마침내 머지않아서 한얼님께 다시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한얼님의 아들이 되도록 참나를 길러 가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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