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文 대통령 “이명박·박근혜 정부, 5·18 기념식 폄하에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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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철 기자
입력 2020-05-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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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광주MBC 인터뷰

  • “유족들 따로 기념식…민망·부끄러운 심정”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 (5·18)기념식에 대통령들이 참석하지도 않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못하게 해 유족들이 따로 기념행사를 갖는 식으로 5·18기념식이 폄하되는 데 대해 참으로 분노스러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광주MBC를 통해 공개된 5·18 40주년 특별기획 ‘문재인 대통령의 오일팔’ 인터뷰 영상에서 “실제로 제가 야당 대표를 할 때 공식 기념식에 정식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5년과 2016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자격으로 각각 박근혜 정부 주최의 제35주년과 제3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바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정부 주관 공식 기념식으로 처음 지정된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제창됐지만, 이명박 정부 2년 차인 2009년부터 합창 방식만 허용해왔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당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을 거부, 공식 식순에서 제창을 불허했지만 당시 문 대표를 비롯한 일부 여당 지도부에서는 식순 도중 일어서 제창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 광주지방보훈청장의 경과보고, 국무총리의 기념사를 들으면서 그 속에 정말 5·18민주화운동 정신에 대한 존중과 진심이 거의 담겨져 있지 않은 사실들과 유족들이 따로 기념식을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문 대통령은 “그때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5·18민주화운동을 광주지역의 하나의 기념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대한민국 전체의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로 승화시키고, 또 대통령으로서도 해마다 참석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두 해에 한 번 정도씩은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도 허용하고 그래서 조금 제대로 기념식을 치러야겠다는 각오를 갖고 있었다”면서 “그런 제 각오와 약속을 실천할 수 있게 돼 아주 뿌듯하게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광주MBC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다음은 문 대통령의 인터뷰 전문.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지 40년이 됐습니다. 저는 그때 굉장히 어려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면 기억이 없는데요. 대통령께서는 그때 어디에 계셨고, 5·18 소식을 언제 처음 접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5·18 전날인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확대되고, 그날 바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이 되었던 중에 저를 조사하던 경찰관들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그 경찰관들은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된 그(것)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광주 시민들이 사상을 당한 사실, 그리고 또 경찰은 발포 명령을 거부해서 시 진압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 또는 시민군들이 예비군이나 경찰 무기고를 열어서 무기를 들고 맞서고 있다는 사실, 이런 경찰정보망을 통해서 올라오는 소식들을 저에게 매일 매일 전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런 얘기들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들이 당연히 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석방되고 난 이후에 보니까 그런 사실들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폭도들의 폭동인 양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광주 바깥에서는 어떻게 보면 가장 먼저 광주의 진실, 그런 것을 접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들에게 진압된 이후에 1987년 6월항쟁까지 수많은 국민들이 광주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서 민주화운동을 펼쳤습니다. 대통령께서도 그때의 국민들, 시민들과 같은 마음이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대통령께 있어서 광주 시민과 오월 영령들은 어떤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제가 광주 5·18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민주화의 아주 중요한 그 길목에 다시 군이 나와서 군사독재를 연장하려고 한다, 그 사실에 굉장히 비통한 심정이었고, 한편으로 광주 시민들이 겪는 엄청난 고통을 들으면서 굉장히 큰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1980년 5월 초부터 매일같이 서울역에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 시위를 열었는데, 그게 날이 갈수록 숫자가 불어서 5월 15일에는 무려 20만명이 서울역에 운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쫙 퍼졌는데, 그러자 당시 그 집회를 이끌고 있던 서울지역 각 대학 총학생의 회장단들이 말하자면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그게 이른바 ‘서울역 대회군’이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군이 투입될 수 있는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라는 명분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군이 투입되면 아주 희생이 클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고 난 이후에 다시 모여야 한다 그런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 그 결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경희대 복학생 대표였는데, 나뿐만 아니라 대체로 복학생 그룹들은 말하자면 민주화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군과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군이 투입되더라도 사즉생의 각오로 맞서야 한다, 그 고비를 넘어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주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지역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아주 가혹한 진압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때 총학생 회장단들의 결정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일 서울역에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결국은 군이 투입되는 빌미를 만들어 주고는 결국 결정적인 시기에는 퇴각하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정말 외롭게 계엄군하고 맞서게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사실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고, 저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 바깥에 있던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들 모두가 이 광주에 대한 어떤 부채의식, 그것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 부채의식이 그 이후 민주화운동을 더욱 확산시키고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광주 오월 영령들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은 우리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었죠.”

-특히나 대통령께서는 5·18의 헌법적 가치에 대해서 누구보다 큰 관심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대선 공약에서부터 시작해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까지도 헌법 전문에 5.18의 가치가 수록되어야 된다라고 얘기를 하셨는데요. 앞으로 개정될 헌법 전문에 5·18의 가치가 들어가야 한다면 여러 가지 광주 정신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들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선 제가 그런 주장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제가 개헌안 발의를 했습니다. 비록 국회를 통과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가 발의한 개헌안 그 전문에 5·18 민주화운동의 이념 계승, 이것이 담겨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우리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에 의해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4·19민주운동의 이념을 계승하는 것으로만 헌법 전문에 표현되어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발전시켜온 민주주의가 실제로 문안화돼서 집약돼 있는 것이 우리의 헌법이거든요. 그런데 4·19 혁명만으로 민주 이념의 계승을 말하기에는 4·19혁명 이후에 아주 장기간에 어찌 보면 더 본격적인 군사독재가 있었기 때문에 4·19운동만 가지고는 민주화운동의 이념 계승을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다시 지역적으로 강력하게 표출된 것이 시기 순서로 보면 부마민주항쟁이었고, 5·18민주화운동이었고, 그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 6월 민주항쟁이었고, 드디어 그 미완된 부분이 다시 촛불혁명으로 표출되면서 오늘의 정부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촛불혁명은 시기상으로 아주 가깝기 때문에 정치적 논란의 소지가 있어서 아직 헌법 전문에 담는 것이 이르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5·18민주운동과 6월항쟁의 이념만큼은 우리가 지향하고 계승해야 될 하나의 민주 이념으로서 우리 헌법에 담아야 우리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표현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5·18이나 또 6월항쟁의 성격을 놓고 국민들 간에 동의가 이루어지면서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헌법안 개헌이 좌절되었지만 앞으로 언젠가 또 개헌이 논의가 된다면 헌법 전문에서 그 취지가 반드시 되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시기를 3년 전으로 좀 돌려보겠습니다. 5·18 37주년 기념식인데요. 그때 대통령에 당선되신 지 채 열흘도 안 돼서 직접 기념식에 참석을 하셨었죠. 여러 가지 장면들이 광주 시민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감동을 줬던 것 같습니다. 특히 5·18 유족인 김소형씨를 직접 안아 주시는 장면은 제가 듣기로 예정에 없던 장면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 기억을 한번 되살려 보신다면 어떻습니까?

“우선은 5·18 기념식이 제가 대통령 취임하고 난 이후에 처음으로 치른 국가기념식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뜻깊게 생각하고요. 우선 5·18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에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 그 기념식에 대통령들이 참석하지도 않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못하게 해서 유족들이 따로 기념행사를 가지는”

-그렇습니다.

“그런 식으로 5·18 기념식이 조금 폄하된다할까 하는 것이 참으로 분노스러웠습니다. 실제로 제가 야당 대표를 할 때 그 공식 기념식에 정식으로 초청받아서 참석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광주지방보훈청장의 경과보고, 그리고 국무총리의 기념사, 그것을 들으면서 그 속에 정말 5·18 민주화운동 정신에 대한 존중, 진심, 이런 부분이 거의 담겨져 있지 않은 사실들, 또 유족들이 따로 기념식을 치르고 있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굉장히 좀 민망하고 부끄러운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념식을 마치고 저와 우리 일행들은 따로 묘역을 방문해서 거기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기도 했었는데, 어쨌든 그때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5·18민주화운동을 광주지역의 하나의 기념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말하자면 대한민국 전체의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로 승화시키고, 또 대통령으로서도 해마다 참석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두 해의 한 번 정도씩은 참석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허용하고, 그래서 좀 제대로 기념식을 치러야겠다는 식의 각오를 갖고 있었는데, 그런 제 각오와 약속을 실천할 수 있게 되어서 아주 뿌듯하게 생각을 했고요. 그때 김소형 그 분은 저는 처음 보는 분이고 사연도 처음 들었는데, 그분이 5·18 당일 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5·18을 생일로 가지고 있는 분이었어요. 그 아버지가 전남 완도에서 일하시던 분인데,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왔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서 사망하게 된 거였거든요. 그래서 김소형씨가 추도사를 하면서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었다면 엄마 아빠가 지금도 행복하게 잘살고 있지 않을까 이런 사연을 추도사에 담았는데, 그 추도사를 들으면서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죠. 저도 눈물이 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요. 그래서 그분 추도사 마치고 난 이후에 그냥 위로하는 말이라도 조금 건네겠다 생각하고 무대로 나섰는데, 그게 전혀 예정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 처음 그 열린 공간에서 그 많은 분들이 참석한 행사에서 대통령이 갑자기 예정에 없이 무대 쪽으로 나가니까 우리 경호하는 사람들도 아주 당황했다고 하고, 김소형씨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무대를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한참을 뒤에서 부르면서 쫓아가서 안아드렸는데, 이분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냥 막 펑펑 흐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좀 진정하기를 기다렸었는데, 아마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유족들의 슬픔, 또 광주 시민들의 아픔, 이런 부분에 대해서 광주 시민들이나 또 전 국민들이 함께 공감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37주년 기념식 때 특별한 이름들을 호명하셨습니다. 표정두 열사, 박관현, 조성만, 박래전 이런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시면서 오월 영령들뿐만 아니라 이들 민주열사들의 이름도 함께 기억해 줄 것을 주문하셨는데요. 어떤 취지이셨을까요?

“아까 제가 1980년 이후에 광주 5·18이 우리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었다라고 말씀드렸었는데, 실제로 그 이후에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기억하라, 그리고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것이, 그것이 하나의 민주화운동, 그 자체가 바로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주에서도, 또 광주 바깥에서도 굉장히 많은 분들이 광주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또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목숨을 바친 그런 분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 많은 분들을 다 일일이 호명하지는 못하고 제가 대표적으로 그 네 분의 이름을 호명했는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5·18이 광주라는 특정한 지역으로 국한되는 운동이 아니다, 광주 밖에도 많은 5·18들이 있고, 그래서 광주의 정신이 우리 대한민국 전체의 민주화운동의 정신과 이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 사실을 우리 국민들도 기억해야 되고 광주 시민들도 그 사실을 기억하셔야 된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대통령께서 취임하신 이후 수많은 5·18의 과제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의 원형 복원이라든가 5·18 헬기 사격과 관련한 국방부 조사위원회 가동, 그리고 며칠 전에 조사를 개시한 5·18진상조사위원회 출범, 수많은 일들을 지시하고 또 그런 것들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그만큼 5·18에서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께서 생각하시기에 5·18의 여러 과제들 중에 가장 최우선적으로, 핵심적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과거의 그 아픔, 또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어야 되는 것이거든요. 치유되어야 화해가 있고, 또 국민 통합이 이루지는 것이죠. 그 출발은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 그 진실의 토대 위에서만 화해가 있고 통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도 진실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죠. 아직도 우리 광주 5·18에 대해서는 밝혀야 될 진실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침 오늘부터 5·18진상조사위원회가 본격적인 조사 활동이 시작됐는데, 이번에야말로 아직 남은 진실들이 전부 다 밝혀지기를 기대합니다. 원래 이런 과거사에 대한 진상 조사는 국회가 특별법에 의해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에 따라 조사되는 것이 관례인데, 저는 국회의 입법을 기다리는 그것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그렇게만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진상조사위원회가 출범하기 이전에 국방부 자체 내에 5·18 특조위 구성을 해서 스스로 진상 조사를 하도록 하고, 거기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진상조사위원회로 이관해 주기로 그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국방부 자체적인 5·18 특조위에서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헬기 사격 사실이라든지, 또 여성들에 대한 성추행, 성폭행, 심지어는 성고문 이런 사실들이 추가로 확인된 것은 나름대로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발포의 말하자면 명령자가 누구였는지, 발포에 대한 법적인 최종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부분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하고, 또 시신도 찾지 못해서 어딘가에는 아마 암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집단 학살자들, 그분들을 찾아내는 일들, 또 헬기 사격까지 하게 된 그 어떤 경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그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 공작의 실상들까지 다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규명의 목적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 책임자를 가려내서 꼭 법적인 처벌을 하자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그 진실의 토대 위에서 진정으로 화해하고 통합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그래서 꼭 필요한 그런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번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고, 정부도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작정입니다.”

-대통령께서 5·18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또 실제 많은 과제들이나 이런 것들을 해결해 나갈 의지를 보이고 계십니다만 아직도 5·18을 왜곡하거나 5·18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5·18을 전 국민이 기념하는 민주항쟁 혹은 민주기념일로 볼 수 없지 않느냐 이런 의견도 일부 있는데요. 5·18 왜곡과 폄훼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우선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주주의는 다양한 생각을 허용하고, 또 다른 생각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관용하는,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죠. 그러나 그 민주주의의 그 관용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여러 가지 폄훼에 대해서까지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5·18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한 대응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어쨌든 아까 말씀드린 이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내는 것도 그런 폄훼나 왜곡을 더 이상 없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는 좀 더 나아가서 정말 우리 정치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 그 추가적인 진실 규명이 없더라도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광주 5·18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말하자면 결정적인 상징으로서 그래서 존중받기에 충분하거든요. 이미 법적으로도 20 몇 년 전에 특별법이 만들어져서 그것이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고, 또 거기에 희생당한 분들이 민주화운동의 유공자로 인정받기도 하고, 거기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서 전 국가적으로 기념행사도 치르고, 이 정도면 국민적으로, 국가적으로는 이렇게 하나 정리하고 다음의 장으로 넘어가야 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일제 식민 지배는 불의한 것이었고, 그다음에 거기에 저항한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있는 것이고, 친일은 심판받아야 되는 것이고, 또 해방 이후에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도 국가 발전 과정에서 독재가 있었고, 그 독재에 맞서서 치열하게 항쟁하고 희생당한 그런 숭고한 민주화운동들이 있었고, 그런 운동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만큼 발전시켰고, 또 그와 함께 우리 경제 발전도 이만큼 이루었고 하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이제는 역사적 평가가 사실은 끝난 것입니다. 평가를 넘기고 이제 앞으로 우리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풍부하게, 더 크게, 넓게 발전시켜 나가느냐, 또 우리 경제를 얼마나 더 세계에서 선도적인 경제로 발전시켜 나가느냐, 이렇게 우리의 논의가 발전되어 나가야 하는데, 법적으로 다 정리된 사안을 지금까지도 왜곡하고 폄훼하는 발언들이 있고, 그것을 일부 정치권에서 조차도 그런 주장들을 받아들여서 이렇게 막 확대 재생산시켜지는 일들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런 식의 고리를 끊어야 우리 사회가 보다 통합적인 사회로 나갈 수 있고, 우리 정치도 보다 통합적인 정치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5·18의 여러 인물들이 있습니다. 5·18을 상징하는 여러 인물들이 있는데, 대통령께서 생각하시기에 5·18 하면 생각나는 인물 혹시 있으시면 왜 그런지도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5·18 하면 조금 이야기가 약간 멀어질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노무현 전(前)대통령, 그러니까 그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납니다. 1980년대 이후의 부산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주를 알게 될수록 시민들은 그 당시 광주가 외롭게 고립되어서 희생당했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던 그 사실에 대해서 큰 부채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이제 민주화운동의 하나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유인물들을 통해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도 하고, 또 해마다 5·18이 되면 버스를 2대, 3대 전세 내서 민주화운동 하는 분들이 함께 합동으로 5·18 묘역을 참배하기도 하고,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난 이후에는 그 당시의 광주의 상황을 촬영한 동영상들, 이른바 광주 비디오라고 부르던, 거의 한 시간 정도 되는 분량이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고 정말로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그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을 할 수 없는 그런 말하자면 확실한 증거가 되는 그런 비디오인데, 그 비디오들을 처음에는 성당이나 교회에서 몇 사람들이 돌려보다가 나중에는 대학의 동아리들, 학생회 이런 차원에서도 돌려보고, 6월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 5월에는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와 제가 주동이 돼서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 비디오, 말하자면 관람회를 가졌습니다. 영화 상영하듯이 하루 종일 모니터로 광주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산 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서 광주 비디오를 보고, 그때 비로소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그런 분들도 많았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3, 4일 정도는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부산 지역 6월항쟁의 큰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또 부산의 가톨릭센터가 6월항쟁 때 서울의 명동성당처럼 자연스럽게 부산 지역 6월항쟁을 이끄는 그런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함께했던 그 노무현 변호사, 광주 항쟁의 주역은 아니지만 그러나 광주를 확장한 그런 분으로서 기억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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