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나면 일상이 오기 마련이다. 비가 그치면 다시 맑은 날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일이 있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오기 어려울 수가 있다. 홍수가 오면 집이 물에 잠겨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듯 말이다. 팬데믹은 경제에 일시적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일시적 충격이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라는 점에서 그 변화를 정확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심상치 않은 국제유가의 흐름
코로나19의 경제 충격은 소비와 투자 심리를 위축시켰다. 심리뿐 아니라 실물에 충격을 주었다. 고용을 불안정하게 만들면서 사상 최대의 실업난을 야기했고, 이는 곧바로 소득 절벽과 소비 침체로 연결되었다. 이런 시국에는 자동차, 가전제품, 스마트폰 등과 같은 내구 소비재의 수요가 크게 위축된다. 공장 가동이 멈춰서고, 해운·항공 물동량이 줄었으며, 인적·물적 자원의 이동이 단절되었다. 2020년 2분기 들어 금속, 비금속, 에너지 등의 원자재 가격이 최대 60% 급락했다.
국제유가 하락은 원유를 수입·가공해 석유제품을 생산·수출하는 국내 정유업계에 큰 충격을 준다. 종전에 사놨던 막대한 양의 원유 가치가 떨어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특히, 복합정제마진이 배럴당 4달러의 벽을 넘지 못한 채 마이너스를 오르내리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의 정제마진 손익분기점이 통상 배럴당 4~5달러라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또한, 국제유가가 불안정할 때는 중동 등의 세계 석유화학 플랜트 발주량이 줄게 됨에 따라 국내 해외 건설사 및 엔지니어링 기업들의 수주가 급감하게 된다. 전기차, 수소연료전지차, 태양광 발전 등과 같은 재생에너지 관련 산업은 흉흉하기만 하다.
디플레이션 오는가?
국제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 하락세는 무시무시한 구조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한국의 물가상승률 추이를 보면, 2000년대 약 3.5% 수준을 유지하다가 2010년대 들어 약 1%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level down)되었다. 그러더니 2019년에는 0.4%로 내려앉고, 2020년에는 0.3%로 더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IMF는 코로나19 사태가 2020년 하반기에 완화될 것으로 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2021년 물가상승률을 0.4%로 전망했다. 만약 코로나19 확진자가 예상을 넘는 수준으로 확대되거나 재확산될 경우, 물가상승률은 이마저도 어렵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디플레이션(deflation)은 경제 전반에 걸쳐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마치 팽창되었던 풍선에 바람이 빠지면서 경제활동이 위축되는 모습과 같다. 최근 물가상승률을 보면, 디플레이션이 코앞에 온 듯하다. 2019년 한 해 동안 물가상승률이 줄곧 1%를 밑돌았고, 9월에는 -0.4%를 기록하기도 했다. 2019년 하반기 두 차례의 기준금리 인하와 미·중 무역갈등의 (일시적) 완화로 물가가 회복되는 듯하다가, 코로나19 사태로 다시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원자재 수급을 해외에 의존하는 한국의 경제 구조상 수입물가가 하락하면, 자연스레 소비자물가가 하락한다. 코로나19가 국내에서는 종식될지라도 세계적으로 계속될 경우 물가 하락을 막을 수 없게 된다. GDP 디플레이터도 2019년 1분기부터 줄곧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어, 경제 전반에 걸쳐 가격이 하락하는 추세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물가하락은 또 다른 물가하락을 일으킨다. 물건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할 것이라고 믿으면, 가계는 소비를 미루기 마련이다. 기업도 투자를 단행할 수 없게 된다.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면 물건의 가격이 추가적으로 하락하게 된다. 물가하락의 악순환이라는 고리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게 된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디플레이션 소용돌이(Deflationary Spiral)라고 명명한다. 대표적인 예를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라고 거론하는 만큼, 절대로 그러한 상황에 처해서는 안 되는 무서운 현상이다.
디플레이션 소용돌이, 막을 카드는 있는가?
지금, 이 상황이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디플레이션을 막을 카드가 없다는 점이다. 도둑이 물건을 훔치러 왔지만, 주인이 묶여 있어 그걸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김광석·김상윤·박정호·이재호가 공동 저술한 <미래 시나리오 2021>에 따르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이미 무제한 양적완화 및 대대적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하는 완화의 시대에 진입했다. 미국은 마이너스 기준금리 도입 여부를 놓고 갈등이 고조되어 있지만 2009~2015년 경험했던 가장 낮은 기준금리로 회귀했고, 한국은 건국 이래 가장 낮은 기준금리를 경험하고 있다.
중앙은행의 설립 목적은 물가안정에 있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고려 요인이 물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행은 물가안정 목표를 2%로 상정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물가상승률이 최근 1%가 채 안 되는 상황 하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등의 완화적 통화정책을 동원할 수 있다. 저물가 현상을 막기 위해 통화정책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물가안정 목표제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플레이션이 우려되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이를 막을 수 있는 카드가 마땅히 없다는 점에서 긴장감이 가중된다.
디플레이션 상황을 막기 위한 유연한 경제정책
무엇보다, 디플레이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떤 전문가들이나 정책 의사결정자들도 디플레이션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디플레이션은 아니다. 디플레이션 우려가 있는 것이다. 다만 디플레이션이라는 재앙이 너무 심각하므로, 아니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정책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욱이 추가적인 기준금리를 인하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으므로 심각한 상황임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저물가 기조에서 탈피하기 위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저물가 상황은 코로나19 이후에도 경제가 뚜렷하게 회복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정책적인 방향성이 기업들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투자환경을 조성하는 데 맞추어져야 한다. 근로조건 개선, 분배 정의 실현 등도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한국 경제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방향성이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성장 정책으로 유연하게 변화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디플레이션 소용돌이에 빠지면 분배 중심의 정책마저도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책의 방향성은 코로나19 이후 경제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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