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읽어봐도 신문(新聞)이 없구나
류영모는 참신앙을 찾기 위해 허튼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허튼 우상이란 무엇인가. 신(神)이 아닌 인간을 숭배하는 일, 성령이 아닌 육신을 우러르는 일이 잘못된 믿음이다. 그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유불선(儒佛仙)과 세속적 믿음 속에 들어 있는 공허한 가치관들을 경계했다. 그의 연작 한시 '불배우상(不拜偶像,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은 '참'을 찾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궁신(窮神)함으로써 터득한 지화(知化, 조화를 읽어냄)라고 할 수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공염불이요
유토피아는 이상국이라지만
승려가 타락하니 하느님도 떠나는구나
조간 읽고 석간 읽어도 신문(新聞)이랄 게 하나도 없구나
정치 배우고 경제 전공해도 제대로 깨닫는 게 없구나
배운 바를 못 이루면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 맹세하더니
큰 리더가 되자마자 염치부터 깨버리는구나
修齊治平空念佛(수제치평공염불)
博施濟衆廢宿題(박시제중폐숙제)
有道彼我理想國(유도피아이상국)
僧託末法主昇天(승탁말법주승천)
朝夕刊讀無新聞(조석간독무신문)
政經學究不神通(정경학구불신통)
學若不成誓不歸(학약불성서불귀)
成則君王破廉恥(성즉군왕파렴치)
(1957.1.12)
우리는 과연 어떤 '신앙'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수제치평(修齊治平)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대학(大學)'에 나온다. 이 말의 핵심은 수신(修身)이다. 내가 스스로 몸을 닦으면, 가족이 본받아 가정이 다스려지고, 그것을 이웃이 본받아 나라가 다스려지며, 그것을 세상이 본받아 온천하가 평안해진다는 유교적 이상(理想)이다. 이때 몸을 닦는 사람은 리더다. 리더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지만, 이 말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는 몸을 닦는다는 것이 지향점이 모호하다. 육신은 육신일 뿐 그것으로 인간이 거듭나는 참에 닿을 수 없다. 둘째는 특정 권력자의 수신에만 의지하여 세상이 평화로워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즘 같은 민주사회에선 오히려 권력의 '독재'만 부추기는 생각일 뿐이다. 류영모는 이런 '수신'을 불교적인 표현인 공염불(空念佛)이라고 했다. '염불'이란 반드시 필요한 수행이지만, 그것이 헛되이 공회전하는 것일 뿐이다.
박시제중(博施濟衆,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함)도 공자가 한 말이다. 유도피아(有道彼我)는 유토피아(Utopia)를 음차한 것으로 류영모의 언어 센스를 보여준다. 토머스 모어가 말한 유토피아는 플라톤의 국가론에 등장하는 이상국(理想國)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유토피아는 중세질서에서 근세질서로 옮겨가는 변혁기에 생겨나는 사회모순이 과학기술 문명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낙관론을 담고 있다.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 오히려 불교에서 말하는 말법(末法)의 시대엔 말세가 찾아와 성직자는 타락하고 신(神)은 떠나지 않았는가. 통렬한 표현들이 이어진다.
옛 사상들을 일일이 논파(論破)한 뒤, 류영모는 그런 가치의 불모(不毛)에서 현실은 어떻게 굴러가느냐를 따진다. 현대사회의 '가치' 중심이라는 신문은 어떤가. 한 소리 또 하고 의미 없는 뉴스들만 남발할 뿐 도대체 새롭게 들을 얘기가 없다는 것 아닌가. 공부 많이 했다는 지식인과 전문가는 어떤가. 모든 것에 대해 아는 티는 내지만, 뭐 하나 제대로 통하는 게 없지 않던가. 학문을 이루겠다고 하던 이들은 높은 벼슬 자리 하나 꿰차고 나면 왕이나 된 듯 설치고, 그 전의 맹세는 까마득히 잊고 온갖 파렴치한 일을 행하지 않던가.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올곧은 '가치' 하나를 생각에 들여놓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헛된 망상과 그릇된 가치를 좇는 것이 인간의 갖가지 '우상 숭배'다.
그러나 류영모는 유불선의 가치와 지혜까지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에너지를 찾아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에서 발본(發本)하여 예수의 길을 갔지만 동양의 사유체계 속에 숨어 있는 '신'의 숨결을 찾아낸다. 신은 '하나'다.
유교의 하늘과 성(性)과 효, 하느님
동양의 유불선에서 과연 서구 기독교의 하느님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먼저 유교에도 하느님이 있다. 첫째, 유교 경전에는 '하늘(天)'이라는 신이 등장한다. 자연 속의 하늘에서 비롯된 이것은 농경생활 속에서 자연현상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신(神)이며 우주의 근본으로 여겨졌다. 이런 인식이 발전되어 천신(天神)이나 상제(上帝)의 개념으로 정리되기도 했다. 공자는 하늘이 문(文, 무력에 대비되는 인문학적인 질서)을 위하여 자신을 보냈다고 믿었다. 하늘에 대한 신앙은 고대 인류역사에서 보편적인 사유체계를 이뤄왔다. 서구의 하느님 또한 '하늘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존재로 시작된 보편적인 표상이다. 다만 서구의 문화와 관념 특질에 따라 '하늘과 인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내면화해온 것이 사실이다.
둘째, 유교에서는 성(性)이라는 개념을 서구의 '하느님'과 비슷한 의미로 쓰고 있다. 중용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란 구절이 등장한다. 천명(天命)은 서구 종교의 개념인 성령(하느님의 뜻)에 가까운 말이다. "성령을 성(性)이라 부르고 그 '성'에 따르는 것은 도(道)라고 부른다." 즉,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은 바로 신앙이며 그 신앙을 행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맹자는 인간이 부여받은 성령은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다. 하느님의 뜻은 선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마음이 가난한 자'와 같은 심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는 저 성령을 '얼' 혹은 '바탈'이라고 표현했다.
셋째, 유교는 효(孝)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강력한 유대관계를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고 표현했다. 부자유친의 정신은 아버지가 돌아간 다음의 상례와 제례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이승에 존재하는 아들과 이승에 부재하는 아버지 사이의 간절하고 친밀한 관계 정서는, 사실은 인간 존재와 절대적 부재를 잇는 사유의 표현이기도 하다. 류영모는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과 예수의 부자유친을 거론한다.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행위는 '효'라는 덕목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들어가 앉은 의미심장한 상징이다.
불교의 공(空)과 심(心), 그리고 하느님
불교 속에 기독교 하느님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첫째, 하느님은 공(空)이다. 반야심경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을 말했다. 색으로 표현된, 눈으로 보여지는 삼라만상은 본질적으로 텅 비어 있다는 뜻이다. 그걸 반대로 표현하면,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것이 삼라만상을 만들어내는 그것이라는 의미다. 보여지는 세계의 실상은 없음이며, 없다고 생각하는 빈 공간은 또한 지금 우리가 보는 그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역설로,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은 것임을 밝힌 명구이다.
불교의 공(空, sunya)은 원래 '팽창하다'라는 뜻이다. 즉, 팽창하는 것은 그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라는 통찰에서 나온 말이다. 류영모는 허공을 '빈탕한데'라고 표현했다. 빈탕한데는 일체의 근원이며 절대세계이다. 그는 '빈탕한데(허공)'를 하느님이라고 표현했다. 빈탕한데는 시작과 근원이며 시·공간과 유무를 초월한 개념이다.
서구에서 신은 자주 '인간의 형상과 닮은' 인신(人神)' 혹은 인격신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신 또한 인간과 같은 물질세계 혹은 상대세계에 존재한다는 믿음과 연결되었다. 인간의 육신에 대한 구원의 생각이 뿌리 깊은 까닭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다. 류영모는, 하느님의 존재는 상대세계에서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는 것이 신의 존재를 규명한 강력한 명제이다. 신이 존재하는 곳이 불교적 사유체계가 이룩해놓은 저 '빈탕한데'이다. 빈탕한데는 그냥 없는 것이 아니라, 뒤집으면 만물의 색이 존재하는 바로 그것과 같은 것이다. 신과 인간은 상대세계에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세계에서 빈탕한데로 합치되면서도 상대세계에서는 색즉시공의 양가(兩價)로 존재하는 바로 그 '없이 계심'이 된다.
공(空)사상은 논리적 분별이 끝내는 자가당착의 모순을 일으켜 언어개념이나 언어논리에 의한 분별지(分別智)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본다. 빈탕한데의 절대세계에 존재하는 신 또한 미망에서 벗어난 반야지(般若智)로만 이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류영모는 기독교 속에서의 '신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불교적인 공(空)으로 풀어냈다. 실질과 구체성으로 신을 찾으려 하는 서구세계의 태도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차원을 결합한 것이 류영모의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다.
둘째, 하느님은 심(心)일 수 있다. 마조(馬祖)선사는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마음은 부처가 될 수 있으나, 부처가 곧 모든 마음일 수는 없다는 점을 류영모는 지적했다. 마음은 변덕과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되, 깨달은 마음은 영생의 얼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보았다. 마음에서 말씀의 생수가 터져나올 때라야만 즉심즉성(卽心卽性, 마음이 곧 하느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도(道)'와 조물주, 그리고 영생
노자 도덕경 속에 하느님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노자는 '도(道)'를 말했으며, 도는 하느님에 근접한 개념이다. 노자는 무극(無極)의 하느님을 가르치고 천도(天道)의 영원한 생명을 가르쳐 주었다. 도는 도덕경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으로, 우주와 인간이 공유하는 큰 진리를 의미한다. 도가 행해지는 방식은 무위자연이다. 아무것도 간섭하여 행함이 없이 스스로 이뤄지는 자연계의 작동 원리다. 무위자연은 바로 조물주의 원칙이다. 신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했다는 창조론에 바탕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노자의 사유와 긴밀하게 부합하는 점이 있다.
류영모는 지모(地母)론을 밝힌 바 있다. 죽음의 과정은 지구가 나를 하늘로 출산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영국 과학자 블록의 '가이아가설'과도 닮아 있음을 이미 지적했다. 도덕경은 조물주의 여성성을 부각하면서 생산의 수고를 하는 존재의 끝없는 겸손에 대해 주목하기도 한다. 이런 성찰은 기독교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영생의 약속과도 닮은 맥락을 제공하고 있다. 류영모는 20세 때부터 도덕경을 즐겨 읽었고 69세 때 우리말로 완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노자사상을 육신의 영생과 결부시킨 도사와 방사(方士)들의 어리석음은 반면교사로 삼았다. 노자는 "생물은 한창 때부터 늙어가니 이것은 도가 아니다. 도가 아닌 것은 오래 갈 수 없다(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도덕경 30장)고 말한 바 있다. 노자는 이렇게 갈파했지만 뒷사람들은 헤아리지 못했다. 몸뚱이가 영생불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은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다. 서양의 연금술이나 동양의 연단술 (煉丹術)이 모두 그런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구 기독교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육신 부활'과 '육신 영생'의 기대감 또한 물장즉로(物壯則老)를 인정하지 않는 헛된 꿈일 뿐이다. 노자 또한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하느님은 진리의 편에 서 있다. 육신은 피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요, 성령은 영생하는 것이다.
류영모는 예수와 같은 인자(人子)로서 적극적으로 성령의 품으로 귀의하는 기독교적인 본질을 바탕 삼으면서, 석가가 행한 '깨달음'과 해탈의 방식으로 자아를 깨고 하느님과 합치하는 '하나로 나아감(一進)'을 이뤄냈고 빈탕(허공)의 실존을 확인했으며, 공자가 말한 극치의 효를 신에게 실천하여 하느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길을 열었고, 또한 노자의 도(道)가 주목하고 있는 '육신의 삶이 아닌 진정한 생명'의 영생을 탐구했다. 서구의 신앙이 지니고 있던 모호한 구석들을 털어내고 단호한 믿음으로 죽음을 향해 담담하게 나아갔다.
유불선을 '귀한 방편(方便)' 삼아 기독교의 참을 찾다
동양의 깊은 사유 속에서 건져올린 유불선 사상과 수행들은 죽음 이후에 대면할 '신'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 볼 수 있을까. 류영모는 그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석가의 해탈론과 노자의 우주론과 공자의 천명(天命)론을 믿음수행의 자양분과 추진체로 삼았다. 그리고 서구 하느님 신앙의 풍부한 내면을 구축하는 자율 기독사상의 중대한 기원을 열었다. 이것이 류영모의 진면목이다. 그는 다원주의 종교사상가가 아니라, 동양사상들의 정수를 기독교 일원론의 에너지로 태워 신앙적 활기를 돋운 기독교사상의 혁신가이자 실천궁행자였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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