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견해가 있는 반면 ‘일본 우익의 논리를 뒷받침해 준 행동’이라는 비난도 있다. '위안부와 일본군은 동지적 관계였다'는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식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것 아니냐는 것.
반면 '이 일로 이 할머니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반론도 있고 '비난할 일이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쉽사리 동의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견해도 있다.
일부에서는 ‘영혼결혼식’이 아니라 ‘위령제’였다는 전혀 새로운 내용의 반박도 있다. 만약 위령제였다면 애초에 논란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제 아무리 원수라고 해도 위령제 정도는 불가능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이 할머니의 ‘영혼결혼식’을 보도한 기사는 모두 세 건이다. 연합뉴스(1998년 8월 26일자) 성연재 기자의 기사와 중앙일보 송의호 기자(1998년 8월 27일자)의 기사, 한겨레 황상철 기자(1998년 8월 27일)의 기사 등이다.
이 가운데 연합뉴스 기사와 중앙일보 기사는 이용수 할머니가 일본군 장교 ‘하세가와’와 영혼결혼식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1998년 8월 22일 과거 일본군 부대와 위안소가 있던 대만 신죽시에서 영혼결혼식이 열렸고, 당시 대만의 국회의원이었던 사계대(謝啓大)와 일본의 역사연구가 등이 주선했다는 내용이다.
장소는 과거 일본군의 위안소가 있던 장소였는데 한국에서 준비해 간 두 개의 인형을 놓고 진행이 됐다는 것과 이 과정이 대만 국영TV인 CTV 등 대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는 내용도 있다.
연합뉴스는 할머니와 일본군 전사자의 인연도 소개하고 있다. 1944년 위안소에서 처음 만났고, 1945년 7월 가미가제 특공대로 차출된 일본군 장교가 ‘네가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죽어서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과 이 할머니가 ‘전쟁 때문에 못다 이룬 사랑을 꽃피우고 싶었다’라고 말했다는 부분까지 있다.
중앙일보 기사에서는 이 할머니가 ‘李할머니는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은 저주해 마땅하지만 그이의 인간애는 어떤 이념으로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하지만 한겨레신문의 보도는 이 두 기사와는 결이 많이 다르다. 할머니가 올린 것은 영혼결혼식이 아니라 ‘위령제’였으며, 영혼결혼식도 할머니가 아니라 ‘하세가와’와 ‘무명씨’가 올린 것으로 나온다. 할머니는 ‘하세가와’와 ‘무명씨’의 영혼결혼식을 마련해 준 것으로 돼 있다.
일본군 장교와의 인연도 조금 다르다. 위안소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다가 두들겨 맞아 초죽음이 됐는데, 그 일본군이 자신을 인근으로 데리고 가서 보살펴 줬고 겨우 살아났다는 것. 일본군이지만 자신을 죽음의 고비에서 건져준 것이 고마워 뒤늦게나마 위령제를 지내줬다는 내용이다.
연합뉴스 기사에서는 그 일본군을 할머니의 ‘첫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한겨레는 ‘그 일본군이 할머니를 첫사랑으로 생각한 것’으로 돼 있다.
이처럼 각각의 보도가 다른 것은 세건의 기사 모두 현장을 직접 취재하고 쓴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령제든 영혼결혼식이든 이 할머니가 대만에서 행사를 치른 뒤, 국내로 들어와 대구의 위안부 지원관련 단체의 행사에 참가했던 사실을 알리면서 외부로 공개됐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세 건의 기사가 대체로 일치한다.
‘영혼결혼식’이었는지 아니면 ‘위령제’였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면 당시 현장을 취재한 대만의 CTV 등을 확인해 볼 수밖에 없다.
정의기억연대 관계자들은 이 사안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31일 정의연 관계자는 이용수 할머니의 영혼결혼식(혹은 위령제)에 대한 논란과 관련해 “처음 들은 이야기”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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