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잇따른 대남 비난 담화로 우리 정부를 흔들더니 물리적인 알력 행사에 나선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일종의 군사 도발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왔다.
가뜩이나 정체기를 맞고 있는 남북 관계가 이번 북한의 돌발 행동으로 상당 기간 동안 경색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이 이 같은 위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지 관심이 쏠린다.
◆당혹감 감추지 못한 靑, 하루종일 분주
이날 오후 북한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청사 폭파 소식이 알려지자, 청와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문 대통령이 전날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북한을 향해 “한반도 평화의 약속을 뒤로 돌릴 수는 없다”며 대화와 협력을 요청한 바로 다음날 북한이 폭파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20주년 기념식에 보낸 영상 축사에서 20년 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넥타이까지 ‘공수’하며 공을 들였다. 김 전 대통령이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문 서명식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을 때 착용한 것이다.
예고는 돼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렇게 빨리 실제 행동으로 옮길지는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지난 13일 담화에서 “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실제로 북한이 연락사무소를 폭파하기 불과 20분 전인 오후 2시 30분께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춘추관에서 기자들을 만나 4차 남북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당연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이어 문 대통령은 오후 3시부터 청와대에서 장경룡 주캐나다 대사, 홍진욱 주이집트 대사, 이인호 주도미니카공화국 대사, 박종석 주네팔 대사, 권기환 주아일랜드 대사에게 신임장을 수여하고 예정대로 환담의 시간을 가졌다. 신임장 수여식에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도 배석했다.
청와대는 폭파 소식이 알려진 뒤, 정 실장 주재로 긴급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다.
문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지 않은 것은 ‘카운터파트’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은 폭파 및 대응책에 대해 서훈 국가정보원장 등 NSC 위원들로부터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향후 남북 관계에서 문 대통령의 운신 폭을 좁히지 않으려는 의도도 깔린 것으로 점쳐졌다. 반등할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은 남겨둔 것이다.
◆말 아끼던 정부, 엄중 경고…‘강경기조’로 선회하나
청와대는 북한이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청사를 폭파한 데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고 북측이 계속 상황을 악화시킬 경우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엄중 경고했다.
NSC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김유근 안보실1차장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오늘 북측이 2018년 판문점선언에 의해 개설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을 일방적으로 폭파한 것에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명한다”면서 “북측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파괴는 남북 관계의 발전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바라는 모든 이들의 기대를 저버린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 차장은 “정부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사태의 책임이 전적으로 북측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면서 “북측이 상황을 계속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할 경우, 우리는 그에 강력히 대응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했다.
회의는 오후 2시 49분께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고 2시간이 지난 뒤에 열렸으며, 1시간가량 진행됐다. 김 차장의 이미 지난 11일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서도 ‘엄정히 대응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통일부와 국방부도 바쁘게 움직였다. 폭파 소식이 전해진 시각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 중이었다.
통일부 당국자들이 김 장관에게 쪽지로 보고하는 듯한 장면이 포착됐고, 김 장관은 상황 파악 여부를 묻자 “정확한 상황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답했다.
김 장관은 그러면서도 “예고된 부분이 있다. 조금조금 보고를 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파악되자 송영길 외통위원장이 질의를 중단시켰고, 김 장관은 오후 3시 53분께 국회를 나와 곧바로 정부서울청사로 돌아왔다.
김 장관은 실국장들과 긴급회의를 한 뒤 오후 5시 5분에 시작된 청와대 NSC 상임위 회의에 참석했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남측 소장인 통일부 서호 차관도 입장 발표를 통해 “남북 관계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비상식적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깊은 유감을 표하고 강력히 항의한다”고 밝혔다.
또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파괴는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며 “북측은 이번 행동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국방부도 “군은 북한군의 동향을 24시간 면밀히 감시하면서 확고한 군사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면밀한 상황관리를 통해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이 군사적 도발행위를 감행한다면 군은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의 다음 도발 시나리오는
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실행하면서 다음 도발이 이행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북한은 경고성 담화에 따라 지난 9일부터 남북연락사무소 통신선, 군의 동·서해 통신선, 노동당~청와대 직통전화선을 차단했으며 공동연락사무소까지 실제로 폭파했다.
통신 차단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김 제1부부장의 담화가 단순히 위협용이 아닌 것으로 입증된 셈이다.
담화에서 언급된 대로 개성공단 철거, 9·19 남북 군사합의 파기 등이 다음 수순으로 예상된다.
북한군 총참모부가 군사행동 지휘를 위임받음으로써 군 관련 조치가 이뤄질 가능성도 크다.
북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같은 날 공개보도에서 “우리는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와 대적관계부서들로부터 북남합의에 따라 비무장화된 지대들에 군대가 다시 진출해 전선을 요새화하며 대남군사적 경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행동방안을 연구할 데 대한 의견을 접수했다”고 밝혔다.
북측이 언급한 남북합의에 따라 비무장화된 지대는 2018년 9·19 남북 군사합의에 따른 장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9·19 군사합의에 따라 비무장화됐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무장화와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를 재설치가 예상된다.
공개보도 중 ‘지상전선과 서남해상의 많은 구역들을 개방하고 철저한 안전조치를 강구해 예견돼 있는 각계각층 우리 인민들의 대규모적인 대적삐라살포투쟁을 적극 협조할 데 대한 의견도 접수했다’는 문구는 서해상에서 군사 행동을 재개 가능성을 시사했다.
북한이 9·19 군사합의에 따라 중단됐던 군사분계선 일대 군사연습, 사격훈련 등을 재개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만 군사행동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인지, ‘삐라’만 뿌리겠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분석이 엇갈린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 각종 미사일 발사시험 등도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북한이 한국전쟁 발발 70주년(6월 25일)과 미국 독립기념일(7월 4일)을 맞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같은 대형 도발을 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 국익연구소(CNI)의 해리 카지아니스 한국담당 국장은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관련해 이같이 분석했다. 북한은 2017년 11월을 마지막으로 ICBM 시험 발사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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