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부장관은 북한을 향해 대화 재개에 나서라는 원론적 입장만을 반복하는 한편, 자신의 북측 카운터파트(대화상대방)가 불분명한 상황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비핵화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미국이 아닌 북한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압박한 셈이다.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선거를 4개월 앞둔 상황에서 북·미가 협상 중단의 책임 화살을 서로에 돌리며 향후 양국 대화 전망도 어두워졌다.
◆"카운터파트 나와라"...北에 공 넘긴 비건
비건 부장관은 8일 오전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한·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하고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국제사회와 공조하겠다고 밝혔다.
비건 부장관은 협의 뒤 약식 기자회견을 열고 '대화'와 '협상'만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미국이 한국 정부의 남북협력 노력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미국 국무부가 국내에서 불거진 한·미 워킹그룹 논란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최근 국내 정치권에서는 한국과 미국 간 북한 문제를 조율하기 위해 만든 워킹그룹이 오히려 남북관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우려가 이어지고 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날 본지와의 통화에서 "미국 측이 한·미 워킹그룹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보이려고 했다면 '워킹그룹은 한·미 동맹의 핵심'과 같은 발언을 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비건 부장관이 한·미 워킹그룹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자제하고 남북한 간 협력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거론한 데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월 대선 전 외교 성과를 내기 위해 북·미 3차 정상회담을 계획, 한국 정부에 중재역 수행을 요청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비건 부장관은 북한에 대화 재개 손짓을 하면서도 카운터파트 설정 등을 요구하며 강경한 기조를 보였다.
특히 그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과 볼턴 전 보좌관을 콕 집어 언급, "나는 이들로부터 지시를 받지 않는다"며 "(이들은) 무엇이 가능한지 창의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부정적인 것과 불가능한 것에만 집중한다. 낡은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고 엄중히 비판했다.
미국과 대화할 의사가 없다며 말 폭탄을 던진 최 부상과 백악관 내 '반(反) 대화론자'로 유명했던 볼턴 보좌관과 달리 본인은 대화 재개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비건 부장관은 "김 위원장이 권한이 있는 카운터파트를 임명하면 북한은 우리가 그 순간 (대화할) 준비가 됐음을 확인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비건 부장관 스스로는 북·미 대화 의지와 자격을 모두 갖췄지만, 그렇지 않은 북측 입장이 현 북·미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는 제1 변수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향후 한반도 비핵화 전망 어두워질 듯"
비건 부장관 방한에도 북한이 기대한 획기적 방안이 제시되지 않으면서 한반도 비핵화 전망은 어두워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비건 부장관 방한으로 북·미 3차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기대감이 모였지만,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비건 부장관은 이날 오전 일정으로 이번 방한 기간 예정된 외교부 공식 일정을 모두 마쳤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오늘내일 중으로 북한은 알맹이 없는 비건 부장관의 방한을 비난하고 미국과의 대화 거부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님을 항변하는 담화를 낼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결국 정부로서는 한반도 상황 관리를 위해 북·미 양측에 대화 재개를 지속 촉구해야 한다는 전문가 조언이 나온다.
양 교수는 "정부로서는 남북협력을 성사시켜 북·미 대화의 우호적 분위기를 만들고 미국 정부를 향해 대선 전에 북한과의 선제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지속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도 "공은 이제 우리 정부에게 넘어왔다"며 "새로운 외교안보라인이 남북협력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대화재개의 물꼬를 틀 수 있으면 해보라는 메시지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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