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혁명가들] 경부고속도로에 피땀 흘린 890만명…한강의 기적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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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기자
입력 2020-07-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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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살에 품질 관리자로 파견된 박경부 기념사업회장

  • 사상 첫 대규모 토목공사…"전쟁터서 얻은 시행착오"

  • 사업완료 후 호남·남해고속도로 등지로 노하우 전파

  • 배운 기술 고도화해 50여년 뒤 수출 선도국 지위로

<편집자 주>포스트 코로나 시대, 교통·모빌리티, 네트워크, 물류유통 등이 유망 산업군으로 주목받으면서 미래 교통의 개발과 상용화가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본지는 한국 항만, 도로·철도 등 교통산업의 기반을 닦은 사람들, 현재를 살며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향후 나아가야 할 방안을 모색하는 '교통혁명가들(Transportation-frontier)' 기획을 총 9회에 걸쳐 보도한다.
 
​국가 예산 4분의1 투입…유례없는 토목공사

"경부고속도로는 나의 스승이자, 은인입니다. 국민께 한강의 기적을, 국가에 고속도로 강국의 토대를, 나에게는 삶의 방향을 선물했으니까요."

지난달 12일 서울시 동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경부 경부고속도로기념사업회장(81)은 반 백년의 세월을 되짚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지난 1968년 29살의 나이에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경부고속도로 대전공구 품질관리 직책을 맡은 후 30여 차례 이사하며 고속도로 건설현장을 따라 족적을 남겼다.

지금은 기념사업회장으로서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대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기 위해 피땀 흘린 890만명의 건설노동자를 기리는 역할을 맡고 있다. 
 

박경부 경부고속도로기념사업회장.


첫 도로와의 인연은 사실 악연이었다. 본래 항만시설국에 근무하면서 프랑스 연수를 준비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전쟁터'로 차출됐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을 전쟁터와 같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은 가장 값싸고 튼튼하면서 빠르게 완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890만명이 동원된 공사였다.

실제로 하루하루 공정은 국방부 학군단 및 공병장교 80여명과 건설공병단 3개 대대 지휘 아래 작전처럼 진행됐다고 한다.

고속도로라는 개념조차 낯선 탓에 예산 추정도 쉽지 않았다. 당시 건설부는 450억~650억원을, 재무부는 330억원, 서울시는 180억원, 육군은 490억원, 현대건설은 280억원을 제시하는 등 제각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1967년 기준 국가 예산 1643억원의 27.4%인 429억원을 한 사업에 투입한 유례없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됐다.

완공 후 20년간 보수비로 1500억원을 넘게 지출했을 정도로 '돌관공사'였다는 비판이 있지만, 시행착오와 훈련된 인력은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아홉 번째 고속도로 강국으로 만들었다.

해외에서 배워온 기술을 고도화해 수출 선도국 지위까지 오른 셈이다.

실제로 지난 1969년부터 이번달까지의 해외건설 도로 누적 수주액은 총 187조7223억원(882건)으로, 전체 해외 토목공사 1015조6344억원(2302건)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69년 당재터널 공사현장 전경. [자료=도로공사]
 

지옥과 같았다…맨몸으로 부딪혀 얻은 시행착오

고속도로 역사의 시작은 1968년 2월 1일 서울~오산 공구에서 출발해 오산~천안~대전(68. 4. 3)과 대구~부산(68. 9. 11), 대전~대구(69. 1. 14)로 이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4년 12월 서독 아우토반을 보고 고속도로 건설 의지를 밝힌 후 3년여간 실무자 해외연수와 설계도를 구상한 끝에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준비작업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기본적인 콘크리트 배합기술부터 터널 및 교량공사 능력까지 태부족한 상황이었다.

"레미콘 차가 없으니까 도로에 깔 콘크리트 재료를 몇 부대씩 짊어지고 양철로 도랑을 만들어서 삽으로 섞었어요. 그러니까 품질이 균일하지 않았던 겁니다."

"물이 가장 중요한데, 물을 적게 넣으면 재료들이 도랑에서 흐르지 않으니까 인부들이 많이 넣는다든지, 시방서를 잘못 해석해서 황토를 넣는다든지 말도 안 되는 일이 많았어요.(하하)"

"다리를 올릴 기중기가 없어서 도르래로 끌어 올렸고 터널을 팔 장비가 없어서 1m를 가려고 3교대로 밤낮을 새면서 굴을 팠습니다.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1969년 길치터널 공사현장. 여자아이들이 동원된 모습이 보인다. [자료=도로공사]


특히 총 77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터널공사는 사람이 작은 갱도를 만들어서 폭약을 터트려 넓히고 지지대를 세워 앞으로 나아가는 위험한 방식이었다.

40톤짜리 교량 상판 하나를 수직으로만 움직이는 도르래 아래 놓기 위해 나무로 길을 내고 밀어서 옮기는 작업도 하루가 걸렸고 사고도 잦았다고 한다.

"한번은 유성IC 인근 국도 위에 육교를 세우는데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나무로 지지대를 세웠어요. 긴 나무도 없이 10m짜리 3~4개를 붙여서."

"이음매 강도가 약하니까 하중을 못 견뎌서 폭삭 내려앉은 거예요. 다행히 인명피해가 없었지만, 주변 현장 인력을 빌려서 국도로 떨어진 교량 상판을 드릴로 쪼개서 옮기고 난리였지."

"월급 8000원 받고 할 만한 일은 아니었죠. 당시 회사원들 봉급의 3분의1 정도였을 거예요. 당시 함께했던 모두가 젊은 패기로, 사명감으로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한강의 기적 발판을 세운 그들

그렇게 국토를 남북으로 연결한 경부고속도로 428㎞ 전 구간은 착공 2년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준공됐다. 1㎞당 1억원으로 가장 값싸고 빠르게 건설한다는 목표도 달성했다.

국가사업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들과 유공자를 기리는 완공 기념탑이 금강휴게소에 세워졌다. 남은 이들은 호남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등으로 노하우를 전했다.

국내에서 유일한 고속도로 건설 경험자들이 새 현장에 투입돼 실수를 만회하고 인력 교육 및 신기술 도입에 싹을 틔웠다.
 

서해대교 공사현장.
 

박경부 회장도 경부고속도로를 계기로 도로와 인연을 이어갔다. 프랑스 항만기술 유학길에서 대전지방국토관리청장까지 먼 길을 가게 된 셈이다.

최고도로인상과 대통령·국무총리표창 등을 받은 그는 경부·호남·영동·서울-문산·남해고속도로 등지에서 주감독과 보수공사 또는 감독 자문관을 맡았다.

"경부고속도로 파견이 끝나자 다른 현장으로 곧장 투입됐어요. 노하우가 끊길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계속 고속도로와 연이 이어진 거예요."

"유학 생각에 젖어있다가 건설현장으로 갔다고 생각해봐요(하하). 정말, 처음에는 빨리 비행기를 타고 싶었지. 계속 다음 사업으로 불러서 가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함께 고속도로 현장을 누비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지만, 이렇게 매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들 덕분에 물자와 사람을 각지로 보내는 대동맥과 같은 고속도로 길이는 벌써 4767㎞에 육박했다. 1966년 5만대에 불과했던 자동차 수는 1971년 14만4337대, 지난해 말 기준 2367만대에 이른다.

전국 일일교통량은 1970년 2만대에서 지난해 말 455만대로, 화물수송량은 6200만톤에서 2017년 18억5400만톤까지 늘었다.

도로공사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9번째,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돌파한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재화의 빠른 이동을 가능하게 한 공공 인프라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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