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 역사를 지닌 성 소피아 성당이 정치에 휘둘리고 있다. 지난 24일 이슬람 예배가 열리자 예상대로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이슬람 지지자들은 환호했고, 기독교 문화권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이슬람 신자 수천명은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바뀐 것을 반겼다. 성당에서 86년 만에 열린 이슬람 예배는 공존에 균열을 냈다.
터키 최고행정법원은 이달 초, 성 소피아 성당은 더 이상 박물관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후 모스크로 전환됐다. 성당은 지난 1500년 동안 여러 차례 이름과 기능이 바뀌었다. 그리스정교회 성당(537년), 이슬람 사원(1453년), 박물관(1935년), 다시 이슬람 사원(2020년)으로 돌아왔다. 인류 공동 유산으로서 사랑을 받아왔던 성당은 다시 기로에 섰다.
성당이 주목받는 이유는 ‘공존(共存)’이라는 가치 때문이다. 건축양식과 내부 조형물에서 확인된다. 수년 전 성당에 갔을 때 눈을 의심했다. 이슬람 문자 조형물과 아기 예수,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 성화(聖畵)가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성 소피아 성당은 종교 간 공존과 화해를 이야기할 때마다 좋은 소재로 활용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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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감춰지는 건 아니다. 야당은 실정을 만회하고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꼼수로 판단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에서 세계문화유산을 이용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소속된 여당은 지난해 지자체장 선거에서 완패했다. 이스탄불을 포함한 대도시 5곳 중 4곳을 야당에 내줬다. 모스크로 전환 시점을 감안하면 정치적 의도를 배제하기 어렵다.
이 같은 메시지와 상징 조작은 우리 정치도 익숙하다. 정권이 취약할수록 도드라졌다.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12·12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그랬다. 이들은 조작과 왜곡을 통해 정권을 유지했다. 수시로 간첩을 만들고 북풍을 조작했다. 또 4·3 제주도민과 5·18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 국가 폭력을 정당화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보수정권에서 녹색성장과 창조경제라는 허상이 그렇다.
현 정부에서도 여전하다. 미래통합당은 문재인 정권을 북한과 내통하는 빨갱이 정부,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민주당을 색깔론으로 덧씌우는 것은 구시대적이다. 더구나 대선에 이은 지방선거, 총선까지 압승한 것은 민의가 반영된 결과다. 또 지금처럼 대통령과 정부를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언론환경이 있었나 싶다. 독주, 독선이라면 수긍하겠지만 독재는 엉뚱한 이미지 조작에 불과하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회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한 것에 대해 많은 국민들은 회의적이다. 국민들은 정치 불균형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여당과 야당 사이에 견제와 비판, 균형은 상식이다. 또 정부를 지지했던 지식인들은 조국·윤미향 사태에서 노골화된 진영논리에 불편해하고 있다. 민주당 정부 또한 ‘촛불정권’이라는 상징에 취한 나머지 시야가 좁아진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버겁다. 미·중 패권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일본과의 갈등, 남북문제, 코로나 경제위기, 주택정책, 고용 위기, 최저임금 논쟁까지 다양하다. 명·청 교체기에 조선은 오락가락하다 환란을 겪었다.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패권경쟁도 속성은 같다. 한반도의 생존전략을 마련해야 할 절박한 시점이다. 또 위기에 처한 기업과 가계, 청년들에게도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비난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민주당은 야당과 ‘더불어’ 가야 한다. 다수당 지위에만 안주한다면 간극을 좁히기 어렵다. 통합당 또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면 여당과 ‘통합’된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반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시 성 소피아 성당에서 공존의 의미를 되새긴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길이 열린다. A J 크로닌은 <천국의 열쇠>에서 기독교 중심에서 벗어난 공존을 제시했다. 토착 종교와도 화해하며 함께하는 선교였다. 내 길은 맞고 상대는 틀리다는 독선을 경계하자. 민주당과 통합당은 다른 등산로를 택했을 뿐, 국민을 위한 지향점은 같다. 서로 배척하고, 말꼬리 잡고 비난할 만큼 현실은 한가롭지 않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柔能制强)’고 했다.
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전 국회 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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